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꿈의 제인>을 보다가 구교환을 처음 만났다. 이태원의 트랜스우먼 제인 역을 연기한 그는 하얀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치고 또각또각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퇴근 중이었다. 제인의 손에는 가방과 함께 나이트클럽 미러볼이 들려 있었는데 한쪽 귀에 댄 핸드폰에 제인은 당당히 쏘아붙이는 중이었다. “아니, 내가 어디다 쓴다고 미러볼을 가져갔다고 그래!” 순간 나는 스크린의 캐릭터가 아니라, 초면인데도 뒤따라가서 뭐라도 더 물어보고 싶은 사람을 마주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구교환을 영화 팟캐스트 초대석에서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그는 <타이타닉>을 극장에서 수없이 반복 관람했으며 매주 박스오피스 1위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열혈 응원까지 했다며 뜻밖의 영화 취향을 알려주었다.
일단 스크린에 등장하면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천부의 자질을 입증한 2020년의 <반도>에 이어, 올해 세편의 신작을 내놓은 구교환은 상업장르영화와 시리즈에 유유히 스며들고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8월 말 공개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에서 구교환은 정해인이 연기하는 안준호와 함께 군무 이탈자 체포조에 소속된 한호열을 연기한다. 각색자이기도 한 <D.P.>의 한준희 감독은 “구교환의 상업영화 첫 주연을 내 작품에서 보고 싶었다”며 사사로운 욕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참여하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부쩍 커지고 대중적 노출이 잦아졌지만, 파트너 이옥섭 감독(<메기>)과 함께 이끌어가는 2X9 HD 프로덕션의 엔진도 멈추지 않고 있다. 사장 넷, 직원 넷인 오피스 배경의 시트콤을 쓰는 중인데 야외 신이 많아져 고민이고, 패션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기획을 포함한 여러 단편을 진행 중이다.
독특한 부류의 매력을 가진 남자배우라는 사실을 넘어 구교환의 연기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스토리상의 기능으로 규정되지 않은 인물을 오직 순간의 진실을 믿고 담대하고 유연하게 연기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어제도 그제도 여기에서 살아온 인간처럼 보인다는 점. 둘째는 자신의 캐릭터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는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킹덤: 아신전>의 아이다간에 대해 구교환은 “그가 부락을 습격하는 장면을 찍고 나서 이 인물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담담히 말한다. 생에 대한 판단 유보를 풍부하게 표현하는 힘이야말로 예술가의 표식이라고 믿는 영화 팬들에게 구교환은 희소식이다. 구교환과의 세 번째 만남은 다음과 같다.
*‘김혜리의 콘택트’에서는 <씨네21> 김혜리 편집위원이 만난 대중문화예술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상을 기반으로 한 이 인터뷰는 앞으로 한달에 한번 <씨네21> 공식 유튜브 채널과 지면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구교환 배우와의 인터뷰는 8월 27일 <씨네21> 유튜브 채널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
=<모가디슈> 개봉 후 관객과 만나고 있다. 넷플릭스의 <킹덤: 아신전>에서 호전적인 변방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아이다간으로 출연했고 한준희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에서 탈영병을 찾으러 다니는 한호열 상병 역을 맡았다.
-바쁠 텐데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하나.
=더 자고 싶다?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인가.
=그날그날 상태에 따라 다양한 시간대에 잠이 든다.
-여러 인터뷰로 짐작해보면 일관되게 고정적으로 뭔가를 하는 법이 없는 성격인 것 같다.
=산만하고 작업도 여러 가지를 펼쳐놓고 진행한다. 능률적이지 못한 방법이라 최근에는 일의 중요도에 순위를 둬서 우선순위 일부터 먼저 하자고 생각하긴 하는데 사람이 변하기 쉽지 않다.
-<킹덤: 아신전> <모가디슈> <D.P.>까지 세편의 신작을 하면서 배우로서 처음 해본 경험을 각각 꼽아본다면.
=<킹덤: 아신전>에서 1순위로 둔 것은 아이다간이 타는 마리오라는 말이었다. 그 친구랑 보낸 두세달이 굉장히 특별했다. 걸음걸이도 나랑 비슷해서, 내가 걸을 때 발을 툭툭 던지듯 걷는데 마리오도 그렇게 걷더라. 나랑 피부톤도 비슷한 거 같고. (웃음) 말이 아이다간이란 인물의 실루엣이나 면모를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었다.
-<모가디슈>에서 처음 해본 일은 일대일 격투기 액션인가.
=지금껏 해온 영화에선 없었던 합이 짜인 안무 같은 액션을 처음 해봤다. <모가디슈> 이전 나의 액션이라면 ‘미러볼 들기’, ‘미러볼 숨기기’ 정도였는데 말이다. (웃음) 지금까지 해본 액션이 짧고 일회적이었다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된 액션이었다. 남한의 강대진 참사관(조인성)과 좁은 방에서 싸우는 장면으로 달려가는 재미도 있었다. 몸에 그런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감독님이 현장에서 디렉션을 바꿔도 가능했다. 단순히 그 그림만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기부터 훈련받게 되니 체력도 좋아졌다. <반도> 당시엔 액션스쿨을 2~3회 갔는데 <모가디슈>는 감독님 미팅 후 바로 액션스쿨에 가서 태준기 참사관을 만들었다.
-태준기는 어떻게 싸우는 스타일이라고 설정했나.
=피지컬적으로 불리한 부분이 있는 데다가 강대진 참사관과 맞붙는 시점엔 체력적으로 바닥난 상태여서 각종 소품을 이용했다. 콘티를 보고도 성격에 대해 많은 힌트를 얻었다.
-시나리오 지문을 통해서도 캐릭터를 알 수 있겠다.
=맞다. 대사보다 지문의 영향을 더 받는 것 같다. 다른 작품을 할 때도 오히려 여백에 더 집중한다. 대사는 정확한 목적성이 있는데 지문은 현장에 가서 실체를 알게 되거나 전후 장면을 찍고 나서야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모가디슈>의 경우 감독님도 태준기를 계속 지켜보면서 인물을 만든 면이 있고 나 역시 진행 과정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D.P.>에서는 무엇을 처음 해봤나.
=<D.P.>에서는 <모가디슈>에서 만든 것을 다 흐뜨러뜨렸다. (좌중 폭소) 태준기 참사관과 한호열 상병은 진짜 다른 인물이다.
-그러고보니 다 군인이다.
=<반도>의 서 대위부터 나의 밀리터리 3부작, <킹덤: 아신전>까지 치면 밀리터리 4부작이다.
-뜻밖에 무관의 피가 흐르는 걸까.
=나도 놀랍다. 기술적으로는 와이어 액션을 부산 추격전에서 처음 해봤다. 와이어 하면 이명세 감독님의 <형사 Duelist> 같은 근사한 와이어 연기를 흔히 생각하겠지만 나는 “폴짝 포~올짝 엉금엉금”에 가까웠다. 나 스스로는 항상 스타일리시하다고 느끼며 모든 액션을 했는데 관객의 판단에 맡기겠다.
-상업적 작품의 첫 주연이어도 배우 입장에서 별 차이가 없었나.
=글쎄, 주연이라 생각하고 다가가진 않았다. 그냥 한호열을 연기했다. 분명 아이다간의 스크린 타임과 한호열의 그것은 다르겠지만…. 아이다간의 경우 노루보다 덜 나온다는 주변의 평이 있었는데 (그렇게 분량이 적은지) 듣고서야 알았다. 수치로 인물을 재지는 않아서 아이다간, 태준기, 한호열 다 같은 마음으로 했다.
-출연 시간 대비 존재감은 아이다간이 최고이긴 하다. 아이다간의 숏이 호랑이 숏에 이어진 대목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통해 증폭되는 마스크가 있는데 <킹덤: 아신전>은 TV 스크린으로 봤음에도 구교환 배우가 갖고 있는 전압이 기본적으로 높다는 생각을 확인시켰다. 한데 그런 강렬함에 비해 이 인물에 대해 알려진 바는 너무 적다. 본인이 가정한 아이다간에 대한 사실 한 가지만 알려줄 수 있나.
=내가 만난 인물 중에서는 가장 전투력이 세다. 전력도 세지만 무엇이 그를 강인하게 만들었나 생각했는데 그 전사(前史)들은 매일 바뀌었고 심지어 신마다 바뀌기도 했다. 강한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을까. 아니면 타고난 기질의 문제일까. 그런데 그것을 확정해놓으면 인물이 납작해진다. 더구나 아이다간은 관객에게 친절한 정보를 주는 인물이 아니라서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했던 것 같다.
-하긴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배우 아닌 사람이 생각하기엔 매번 다른 백스토리를 갖고 연기하다 인물 궤도를 벗어나면 어떡하나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감독님이 계신 거 아닐까. 나는 함께 작업한 모든 감독을 연애 상대처럼 생각한다.
-그럼 본인이 감독과 주연을 겸했을 때는 자신을 믿으며 찍었나.
=내가 감독인 경우는 배우를 믿는다. (웃음) 연출하고 출연한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경우는 내가 토크쇼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챕터를 나눈 이유도 그렇다. 회차당 하루에 감독 한명을 게스트처럼 만나는 기분으로 촬영했다.
-<꿈의 제인>에서 영화를 많이 보는 관객이 구교환 배우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면 <반도>는 영화를 가끔 보는 사람들도 서 대위가 누군지 묻게 만들었다. <반도>의 연상호 감독에 대해 ‘구교환 사용법’을 잘 아는 것 같다고 농담한 적이 있는데 신작에서 다시 만난다고 들었다.
=티빙에서 방영될 <괴이>라고, 연상호 감독님이 각본을 쓰고 장건재 감독님이 연출하는 오컬트물이다. 사실 배우 사용법은 모든 감독님들이 알고 계신다. 다 달리 사용할 뿐. 연상호 감독님 경우는, 컷을 미루거나 테이크를 계속하며 즐기시는 것 같았다.
-편집에 안 들어갈 연기도 이것저것 주문하며 즐거워하는 식인가.
=컷을 버티는 시간은 사실 나도 좋아한다. 내가 연출한 영화에서도 가끔 왜 컷을 안 하지 싶은 숏들이 있다. 내 장면이 길면 좋아서… 는 농담이고 사실 컷이 지속될수록 불안하기보다 감독님이 뭔가를 더 보고 싶은 거구나 짐작이 가면서 한쪽에서 구교환이 튀어나온다. 100% 그 인물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더 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반도>에서도 서 대위가 “여기서 인천항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며 막 고민을 하다가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서 “황 중사(김민재) 데려갈까?” 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냥 강해 보이니까. 필요할 것 같아서. (웃음) 김 이병 역의 배우(김기백)가 그런 무드를 가능하게 해줬다. 둘이 그렇게 주고받다가 갑자기 스노볼이 눈에 띄었다. 서 대위가 갑자기 위로를 원했는지 점괘를 원했는지 스노볼을 막 흔들어서 들여다봤다. 어차피 프레임 밖 연기였고 감독님이 안 쓸 거 알면서도 그런 연기들을 했다. 프로덕션을 진행하면서 인물에 친밀해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류승완 감독님은, 나의 피지컬이나 저런 종류의 예민함과 날카로움을 가진 사람이 참사관이 되려고 훈련받았다면 어떤 분위기가 나올 것인가라는 방향에서 접근해주셨다.
-여담이지만 <모가디슈>에서 제일 구교환스러운 장면은 대사관에 출근하기 전 소말리아 마을에 가서 어린이들에게 축구공을 툭 던져주고 미소짓는 대목이었다.
=맞다. 익살스러우려고 하는 사람이다. 실제 나와 차이가 있다면 나보다 덜 웃긴다. (좌중 폭소) 태준기 참사관은 자기는 굉장히 재밌는데 남들은 재미없어하는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촬영을 진행하며 이 사람 외롭겠구나, 싶었다. 또 힌트가 있다면 시나리오 안에서 그의 가족 이야기는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를 알 수 없다는 속성은 구교환의 캐릭터들이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태준기 참사관은 그래도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스트레이트하다. 과거사는 모르지만 상대적으로 전작의 인물들에 비해 주변 인물과 연결된 꽉 짜인 구도 안에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메기>를 예로 들면 내 캐릭터는 여윤영(이주영) 주변을 도는 위성 같은 인물이었다. 극 안에 흡수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데 태준기 참사관은 극에 온몸을 던져서 붙어 있으려는 인물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끼어들려고 하는.
-아주 정확한 표현이다.
=“나도 껴줘, 껴줘” 하는 인상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받았고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나를 아는 관객은 스트레이트하다는 인상을 받겠지만 나에게 태준기 참사관은 여태 안 해본 커브볼 같은 역할인 거다.
-하긴 구교환 배우를 보면 감독들이 대개 단독자로 쓰고 싶어 하니까.
=서 대위도 독립적인 신이 많다.
-일단 독방을 쓴다.
=하지만 <모가디슈>의 태준기 참사관은 계속 대사관 사람들을 지켜보는 입장이다. 발성도 약간 바꿨다. (웃음) 내가 소리를 다르게 내는 건 알았는데 나중에 극장에서 들어보니 마치 재밌는 분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가디슈>도 <반도>도 장르영화지만 <D.P.>가 제일 장르적 관습이 강한 연기를 요구하는 작품이 아닐까. 게다가 한준희 감독에게 들은 바로는 콘티에 충실하게 카메라 무빙의 자유도를 좀 낮춰서 촬영했다고 하더라. 구교환 배우 하면 매우 자유롭게 움직이는 배우란 인상이 있다보니 <D.P.>가 컨벤션이건 동선이건 많이 긴장된 작업이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긴장은 없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콘티와 내가 한마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웃음) 한준희 감독님이 나를 캐스팅한 이유일 것이다.
-심지어 원작에도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내서 같이했다.
=일단 저분이 나를 애정하고 있구나. 그래서 한호열을 내게 준 거 아닌가. 그럴 때 생기는 자신감을 토대로 콘티와 한마음이 되자고 결심했다. (웃음) 제약은 사실 기술적인 것이다. 돌리를 깔건 대형 지미집이 인물을 훑건 정해진 바운더리 안에서만 연기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 영역 안에서 자유는 열려 있다. 오히려 기존에 많이들 좋아해주셨던 스타일의 내 연기가 많이 이식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흰자위를 이렇게 떠주세요” 하는 식의 세세한 디렉션이 아니었기에 부자유스러울 건 없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그랬다고 들었다.
-생전에 본인 작품의 한국판 개봉 포스터 서체까지 검수한 분이긴 하다.
=그런 감독님과도 일하고 싶다. 내가 나를 발견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내가 나를 낯설게 보는 순간들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쓰고 연출하는 콘텐츠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잘하거나 내 취향의 것들을 하게 된다. 류승완, 김성훈, 한준희 감독님과 일할 땐 다 그냥 좋아하는 포인트가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기분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경우 정체가 가려진 인물을 연기했다. <꿈의 제인>의 제인도 어디서 왔는지 좀 애매하고 서 대위도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시간에 어떻게 지냈는지 명시되지 않는다. 왜 이런 자리가 확정되지 않은 역들이 자신에게 많이 올까 생각해본 적 있나.
=변덕이 심하고 자주 마음이 변화하는 내 기질이 그런 인물들에 들어 있다. 반대로 그런 캐릭터들이 쌓여가서 나를 만들기도 한다. 사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이 아직 파악은 안된다. 나는 다만 매신 정확한 이유를 갖고 연기하려고 한다. 단지 그 마음이 자주 바뀔 뿐.
-그렇다면 모두가 잘 아는 역사적 평가가 이뤄진 실존 인물도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고 싶다. 허용된다면 내 방식으로 연기하고 싶다. 지켜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겠지만 사실 내가 하든 다른 배우가 하든 캐스팅에 따라 작품의 방향은 바뀌는 것 같다.
-누구를 연기하면 재밌을까.
=가수 이소라씨 역을 해보고 싶다.
-모든 테이크의 연기가 다른데 인물에 충실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어디에서도 유머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송강호 배우와 닮은 점도 보인다.
=아, 이런 비교는 처음이자 마지막 아닐까. 액자할 수 있도록 글로 써달라. (좌중 폭소) 아마 송강호 선배님의 영화를 보고 자라 영향받은 부분도 있을 것이고 내가 좋아한 여러 감독님들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살면서 지치고 무너져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힘을 줬던 방식이 다 유머였다. 영화에서도 항상 유머의 순간에 반했다. 웃어야 할지 말지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래서 <더 랍스터> <킬링 디어>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을 좋아한다.
-<꿈의 제인>과 <반도> 사이에 어떤 제안들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많은 사람이 충무로의 숱한 제안을 거절하고 <반도>를 골랐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많은 제안을 넣고 다녔다.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사 문을 두드렸다. 정말 욕심나는 역할 제안도 받긴 했지만 거짓말처럼 계속 진행 중인 작업이 있었다. <메기>의 프로듀서 역도 하다보니 잠깐 다른 작품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오겠지 하며 넘기는 것이 내 방법이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나는 스스로 찾아가서는 매력을 보여주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디션을 보고 돌아오는데- 그럴 때 개똥철학이 생기지 않나- ‘나는 연기를, 리딩을 왜 이리 못하지’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서 나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지만 그때부터 ‘아, 나는 이렇게 태어난 배우구나’ 정도는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럼 뭘 해야 할까? 그렇게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흔치 않은 이름을 가졌다. 본인 이름 그대로 연기한 <우리 손자 베스트>에도 특이한 이름에 대한 대사가 있었다. 자꾸 불리면 이름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 않나
=거울 보면서 “교환아, 잘하자” 하는 타입은 아니다. (웃음) 나를 좋아하는 팬들이 닉네임을 ‘영수증’이라고 하시더라. 한번은 이름만 따로 캐스팅된 적도 있다. 나는 캐스팅 안 하고 말이다. 이름 따로 본체 따로 일하는 국내 최초 모듈형 배우인가 싶었다. (웃음)
-10대 때도 패션과 성격이 1학기 다르고 2학기 다르지 않았을까.
=그랬다. 진짜 주변에 있는 사람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가는 자리마다 캐릭터도 바뀌는 거 같다.
-배우가 되라는 운명적 체질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배우로서 장점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 친구가 나의 최근작들을 보더니 그랬다. 네가 장르영화에 어울리는지 몰랐다고.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도 괜찮아. 좋아, 자연스러웠어”, 했다. (웃음) 스며드는 능력은 있는 것 같다.
-카메라와 영화 기자재는 서울예술대학교 입학 후 처음 만져보았나.
=그렇다. 장비에 대한 로망이 있고 편집 툴 다루는 작업도 좋아한다. 쉽게 배우고 금방 사용법을 잊는 편인데 이제는 익숙한 거 같다. 편집을 무척 좋아한다.
-직접 감독하고 편집한 작품의 편집이 정말 훌륭하다. 중단편, 초단편의 커팅 포인트가 좋다.
=나 잘하지 않나? (웃음) 배우로서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까 B컷 쓰면 되지 않나?’ 하고 생각하니 도움이 안되는 것도 같다. 편집실에서 보면, 클래퍼보드를 친 다음 액션 사인이 떨어지기 직전 배우들의 얼굴이 너무 좋다. 그래서 아예 그 숏을 반응숏으로 쓰기도 한다. <메기>에도 문소리 선배님이 연기에서 살짝 빠져나온 숏이 부원장 캐릭터에 맞아서 썼다. 그 역시 배우의 집중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옥섭 감독님과 내가 그런 결이 잘 맞는다. 배우 캐스팅 자체가 영화의 어떤 내러티브를 책임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요소를 애정을 갖고 지켜보자는 생각이 있다.
-연기 전공자로서 학교에서 여러 가지 교과서적인 훈련과 접근법을 배웠을 텐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렸나.
=공통과정이라 연극과와 영화과가 함께 수업을 들었다. 1학년 때는 무대를 경험했다. 영화과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첫째는 영화를 순서대로 찍지 않는다는 거. (웃음) 가장 중요한 것은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빨리 알아야 한다는 것. 마블만 유니버스가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유니버스가 있어서 저 사람은 뭘 좋아하고 내 어떤 부분에서 비전을 봤을까를 빨리 파악해야 한단 걸 배웠다. 눈치를 잘 보자. (웃음) 감독님을 알려고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주변 동료 연출자들을 사석에서, 작업에서 만나보면 자기가 곧 영화더라.
-감독들을 많이 관찰하겠다.
=사람들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판단은 안 하려고 한다.
-서 대위에 대해 “인터뷰하듯 인물을 만들었다”고 답한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서 대위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캐릭터와 항상 거리를 좀 두는 편인지, 작품과 배역에 따라 다른지 궁금하다.
=인터뷰하듯이 인물을 만든다는 건 그냥 궁금한 것만 답을 내는 거다. 전부를 알면 재미가 없어져서 어느 정도는 그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신비감 혹은 미스터리가 있어야 한다.
-인터뷰는 질문을 던진 답만 얻게 되니까 그런가.
=그래서 <반도>의 서 대위는 공리를 좋아할 거 같다거나 국수를 좋아한다는 답을 얻었다. 내 성향이 약간 들어갔다. (웃음) 내가 만두를 포함해 면식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들은 다행히 다 알면 더 내게 혼란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캐릭터와 거리를 두는 건 사실 방어행위다. 내가 누구보다 그 인물에 찰싹 달라붙고 싶어 하고 실제로도 가깝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마음을 먹는 것 같다.
-그건 자연인 구교환의 건강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내가 건강한 생각을 하질 않는다. 앞으로는 그런 걸로 해야겠다. (웃음) <반도>의 경우는 잘 버텨온 가족들한테 마음이 더 기울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라는 상 많이 탄 단편을 보면 “꿈이 바뀌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건 꿈이 없는 거고, 더 부끄러운 건 꿈을 핑계로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다”라는 육상효 감독님의 글을 인물이 인용한 대사가 있다. 이것은 구교환 개인이 영화에 대해 갖는 태도일 수도 있을까? 영화의 제단에 삶을 바치려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내가 내년에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도 있지 않나. 함몰되지 않으려고 계속 스스로에게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 난 너무 영화를 사랑하지만 언제든지 우린 이별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상실감을 갖지 말자”라고 계속 나를 훈련시킨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불행할 것 같다. 꼭 내가 영화를 공부했고 연기를 공부했다고 이대로 가야만 할까. 내가 공부한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인생을 낭비한 걸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남기고 극중에서 주인공은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연출부로 발탁된다. (웃음)
=(웃음) 그것이 또 내 마음이기도 했다. 앞뒤인 거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계속 판단내리지 말자고, 나는 언제든 마음이 바뀔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