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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닉스'의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가 의미하는 것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피닉스>의 초반부,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넬리(니나 호스)는 훼손된 얼굴을 복구하는 성형수술을 받고 머리에 붕대를 두른 채로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집으로 되돌아가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와 재회하는 꿈을 꾸던 넬리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녀와 똑같이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환자복을 입은 여인이 반쯤 열린 문 앞에서 넬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음 장면에 잠에서 깨어난 넬리는 그녀를 지켜본 여인의 발걸음을 따라 복도를 걸어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벽면에 여러 장의 사진이 걸려 있는 또 다른 작은 방이다. 그곳에서 넬리는 자신의 원래 얼굴이 찍힌 흑백사진을 발견하고 바라본다. 외견상으로 두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 넬리를 지켜보고 사진이 걸린 방으로 이끄는 여인에 대해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장면은 꽤 기묘한 인상을 자아낸다. 별다른 전조나 예비도 없이 불쑥, 기원이 불분명한 영화적 분신(‘double’)이 각인되는 것이다. 나와 닮은 누군가 나를 훔쳐본다는 것. 이 불확실한 분신의 형상은 부서진 거울에 반영된 넬리의 이중화된 이미지보다도 더욱 부조리한 생김새로 우리를 불안에 빠뜨린다.

​얼굴도, 이름도 없는 이 영화적 분신은 어째서 넬리와 단둘이 병원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걸까. 물론 서사적 개연성의 맥락으로 이 여인의 신원을 유추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넬리와 마찬가지로 얼굴 전체에 붕대를 두르고 병원에 머물러 있는 익명의 환자. 그녀 또한 얼굴에 새겨진 상처를 치료하는 수용소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장면들에서 구체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왜 넬리를 지켜보는지, 잠에서 깬 넬리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따라가는지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이질적인 장면들에서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 대두되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의 개연성이 아니라 그런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얼굴에 붕대를 두른 두 사람의 신체 이미지를 프레임에 배치하는 연출자의 시각적 자의식이다.

​넬리는 그 여인과 같은 방에 서서 과거에 찍힌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풀숲에 앉은 넬리와 조니가 흑백사진 특유의 분위기를 빌려 소실된 유토피아적 연인의 모습으로 그녀의 눈앞에 제시된다. 말하자면, 이 순간에 영화는 의도적으로 두 개의 초상 이미지를 병치해두고 있다. 하나는 흑백사진에 담긴 넬리의 손상되지 않은 얼굴이라면, 다른 하나는 넬리와 무명의 여인이 공유하는 붕대로 가려진 고통의 초상이다. 후자의 초상 이미지는 넬리가 하는 말처럼 전후의 세계에서 사라진 자들의 얼굴에 새겨진 역사적 ‘의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사람의 얼굴을 가리는 붕대의 이미지는 사진에 담긴 유일무이한 얼굴과 대비되는 범용한 가면이다. <피닉스>는 전후 베를린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분기점에 제기된 영화의 위기를 정체성과 의상의 경합으로 전면화한다. 붕대를 두른 두 여인의 이중적 형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지는 현실과 상상, 가능한 결합과 불가능한 열망 가운데서 분화하기 시작한다.

​시선과 목소리

크리스티안 펫졸트는 2차대전이 끝난 베를린의 잔해를 탐사하면서 시선과 목소리에 관한 하나의 우화를 조직한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과 입을 비스듬히 가로막는 흰 붕대는 이 우화의 주요한 표상이자 장치로 자리매김한다. 거대한 폐허의 지대에서 우리의 시선과 목소리는 가닿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자신임을, 혹은 자신이 이곳에 발을 디디고 서 있음을 증명할 수 없는 신체. <피닉스>에서 가려진 시선과 소거된 목소리는 인물들이 머무는 세계의 표면을 불투명하게 세공한다. 클럽에서 조니를 마주친 넬리가 그의 이름을 외치는 장면에서, 조니는 충분히 상대방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있음에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온 것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능력한 지각은 강제 수용소의 집단 학살을 외면한 영화의 속성에 새겨진 불가피한 변형을 예증한다. 이 영화에는 다음의 전제가 동시에 일어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실되었으므로 세계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예전의 자리로 거슬러 돌아가려는 여자의 신체가 세계의 한 테두리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펫졸트는 그렇게 분리 불가능해 보이는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머무는 세계의 질서가 일으키는 불화를 주시한다.

​넬리의 유대인 친구 레네는 말한다. 대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의무가 있다. 나치가 갈취한 것들을 전부 돌려받아야 할 의무가. 그녀가 말하는 의무는 넬리에게 남겨진 유산으로 안전한 삶의 공간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견해에 한 가지 층위를 덧붙인다면, 전후의 시간을 다루는 한 명의 영화작가로서 페촐트가 <피닉스>에서 짊어진 의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게 도착한 자의 의무. 그것은 영화를 이루는 근본적인 두 가지 체계, 즉 어긋나버린 시각과 청각의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에 있다. 생존자를 태운 자동차가 다리를 건너면서 강렬한 빛 번짐이 화면 가득 차오르는 매혹적인 도입부의 한 장면이 보여주듯이, 수용소의 경계를 넘어 되돌아오는 자들은 마치 눈이 먼 듯한 상태에 노출된다. 어둠 속에서 넬리가 밝은 빛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불을 켜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영화의 빛은 더 이상 인물을 선명하게 비추는 전능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다.

​넬리가 폐허가 된 한밤의 도시를 지나다니면서 발걸음을 멈추는 자리는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마주치는 순간에서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눈먼 자들만이 어둠 속에서 역설적으로 빛과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들이다. 넬리는 눈먼 바이올리니스트의 인도를 따라 진실로 향하는, 조니에게 다가가는 경로를 얻는다. 크리스티안 펫졸트는 <피닉스>의 드라마를 간단하게 정의한다. 이것은 단 한 번도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전후의 시간 속에서 상대방의 눈빛을 지각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바라봄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난반사하는 시선과 목소리를 붙잡기 위한 하나의 도식이 요구된다.

​의상의 우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는 시선과 목소리의 불일치로 조직된 하나의 우화와 더불어, <피닉스>에 잠재된 한 편의 우화를 더 지켜보게 된다. 조니는 바뀐 얼굴로 나타난 아내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넨다. 자신의 아내를 연기해서 그녀가 받는 유산을 나눠 갖자는 제안이다. 조니는 그녀에게 ‘에스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넬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흉내 내게 한다. 눈앞에 나타난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놀랄 만한 시각적 무능력에 사로잡힌 조니는 우화의 규칙 아래서 또 다른 우화를 작성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우화는 넬리가 의상을 갈아입는 사태를 중심에 두고 치명적인 변형을 거듭한다. 조니와 넬리가 도모하는 거짓된 연극을 ‘의상의 우화’라고 부르고 싶다. 부연할 것도 없이, 이 우화를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장면은 넬리가 붉은 원피스와 짙은 화장을 두르고 조니 앞에 서는 순간이다. 그전까지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던 조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일순간 얼어붙는다. 넬리가 말한다. “날 알아보겠어?” 사랑과 배신, 책임과 두려움이 한자리에 응축된 넬리의 귀환이 실현된 자리에서 조니는 눈에 비치는 여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바로 넬리의 것임을 비로소 보고 듣는다.

​전쟁 이전의 일상적 시간과 전후의 파괴된 시간, 그리고 그 기점을 관통하는 수용소에서의 절멸의 시간. <피닉스>는 서로 다른 시간에 걸쳐 선 넬리의 신체적 표상을 통해 단절된 세계를 접속시키고 있다. 이로써 카메라에 노출되는 현재형의 이미지는 겹쳐진 시제에 짓눌리게 된다. 넬리가 입은 붉은색 원피스는 단지 그것을 입은 인물의 외형적 변화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녀가 화장을 고치고 의상을 갈아입은 그 자리에서 소용돌이치듯 모든 시제가 되돌아온다. 이 레드 톤의 원피스는 그녀가 비로소 넬리의 정체성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표면적 매개이다. 보이지 않는 과거는 붉은 색채의 의상에 들러붙어 우리를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플랫폼 안으로 기차가 도착한다. 한 여인이 내리고 친구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재회의 인사를 건넨다. 여인은 그들보다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말없이 포옹한다. 펫졸트는 기차역이라는 상징적 장소에서 서로 다른 우화에 속한 이들의 시간을 매개하는 퍼포먼스를 상연한다. 뤼미에르 열차의 도착으로 시작된 영화의 역사가, 집단 학살의 피해자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실어나른 또 다른 열차의 도착으로 중단되었다면, 펫졸트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멈춰버린 영화사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허구적 상황을 기차역에 투과한다. 수용소의 생존자가 집으로 되돌아오는 세 번째 열차의 도착을 그려내는 것이다. 역사와 영화사의 시간이 겹쳐진 자리에 틈새를 빌어 넬리는 다시 한번 그녀 자신의 존재로 되돌아온다.

​레네가 언급한 ‘의무’를 실천하듯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되찾아가는 넬리의 여정의 종착지에 노래가 놓여 있다. 그녀가 조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쿠르트 바일의 ‘Speak Low’를 부르는 이 마지막 장면은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꼽을 만하다. 넬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조니는 천천히 깨닫는다. 그녀가 바로 그녀임을. 당신의 목소리가 정확히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그의 눈앞에 넬리의 오른쪽 팔뚝에 새겨진 수용소의 수감번호가 스쳐 지나간다. 이 느릿한 숏의 연쇄로부터 영화는 드라마의 테두리를 채색하는 신체의 미적 움직임을 성취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조니는 뒤늦은 사랑과 수치를 자각하고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듣는,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토록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몸의 감각으로 말이다.

불타고 남겨진 것

노래를 마친 넬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는 조니를 외면하고 자신의 옷을 챙겨 문 바깥으로 퇴장한다. 검은색 겉옷을 손에 쥐는 넬리의 이 찰나의 제스처는 일견 닫힌 내부 공간을 넘어서는 단호한 멜로드라마적 선택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의상을 둘러싼 주제론적 체계를 불러내는 행위로 또한 프레임에 각인된다. 그녀가 폐쇄적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행하는 마지막 선택이 의상을 거두는 사소한 손짓으로 표현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의상이라는 물질적인 표면을 빌려 수용소에 관한 넬리의 증언을 재차 환기하는 세밀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이 장면이 놀라운 것은 단순히 넬리의 매혹적인 퍼포먼스로 조니에게 뒤늦은 깨달음을 안겨주는 극적인 클라이맥스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조니가 설정한 ‘의상의 우화’를 해체해버리는 제스처를 함의하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을 되돌아본다. 두 사람이 연기를 공모하던 지하실에서 조니가 아내의 붉은 원피스와 짙은 화장을 요구하자, 넬리는 수용소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는 건 부당하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수용소에서 겪은 체험을 고백한다. 그곳에서 알몸으로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막 도착한 사람들의 옷을 조사해 숨겨둔 귀금속과 돈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옷을 입은 어느 여자아이의 눈을 바라봤다는 경험을…. 간신히 더듬거리는 말로 발화되는 넬리의 이러한 증언은 외형적 의상으로 정체성을 구분하는 조니의 계획을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신체의 비가시적 이미지로 되받아치고 있다. 그녀의 고백은 조니에 의해 중단되지만, 그것은 최소한 한 가지 단서를 환기한다. <피닉스>는 벌거벗겨진 옷, 상처와 흉터를 흰 붕대로 가리던 비참한 신체가 붉은 원피스의 관능을 되찾아가는 시간에 관한 영화라는 것을.

​하지만 이 관능의 회복은 모든 것을 유토피아적 과거로 되돌리는 회고형의 결론이 아니다. 넬리는 여전히 시간의 경계에 머물러 있다. 검은 상의를 붙잡는 넬리의 손의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상에 깃든 모호한 면모다. 나는 붉은 원피스를 즐겨 입던 바로 그 넬리가 맞아요. 하지만 더는 붉은 원피스만을 입는 넬리일 수 없어요. 우리는 레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는 장면에서 넬리가 입고 있던 바로 그 검은 상의를 기억하게 된다. 그러므로 넬리의 손에 쥐어진 검은 상의는 죽음과 고통의 기억이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 스크린의 텅 빈 구멍이다. 이것이 조니가 구상한 ‘의상의 우화’에 대항하는 넬리의 마지막 선택을 가시화한다. 붉은 원피스가 조니에게 넬리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넬리는 그 검은 상의에 드리워진 기억을 잊지 않는다.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의 결합으로, 결코 동시에 솟구칠 리 없는 수용소 바깥의 시간과 수용소 내부의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신체라는 공통의 장소에서 대면하고 있다. 펫졸트에게 영화의 장소는 강제 수용소의 수감번호가 새겨진 손으로 검은 상의를 붙잡는 균열적인 몽타주가 실현되는 곳이다. 이제 넬리는 둘로 나뉜 영화적 분신의 형상을 옆에 두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과 기억을 표상하는 의상의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 어느 순간보다 통합적으로 분열된 자기 신체를 자각하는 체험이다.

​무대가 끝나고 영화는 카메라의 시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는 넬리의 뒷모습을 담아낸다. 조니와 더불어 움직임을 멈춰버린 채로 실내에 남겨진 카메라의 위치는 끝내 통렬한 윤리적 자각을 요청한다. 조니는, 그리고 카메라는 멀어지는 넬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다. 그곳에 있는 어떤 사람도 붉은 원피스와 검은 상의의 결합이 지니는 의미를 감지하지 못한다. 이는 또한 수용소의 현장을 담아내지 못한 영화의 역사적 위치이기도 하다. ‘피닉스’라는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는 동안 넬리는 두 사람이 지속한 관계를 연소시킨 뒤, 모든 것이 불타고 사라진 자리에 형성된 마지막 숏으로 걸어 나간다. 다른 누구도 이 숏의 표면에 개입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범용한 화면전환이 아니라 넬리의 신체를 영화의 나머지 전체와 분리시키는 존재론적 단절이다. 하지만 넬리의 뒷모습이 담긴 희미한 화면은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수습되지 않은 모두의 흔적이 공유된 장소다. <피닉스>는 침묵하는 모두에게 이 화면을 지켜보라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숏은 이중적이다. 이것은 간신히 유지되어오던 하나의 세계가 산산이 조각나버리는 함몰점이지만, 동시에 그동안 머물러 있던 세계를 불태우고 떠나간 넬리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입구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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