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이라는 제목의 단편 원고를 마감했다. 사회의 뒷방으로 밀려나버린 노인들이 실은 세상을 수호해온 용사들이었다는 설정의 짧은 코미디로, 아마 여름이 끝나기 전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을 작업하는 한달 남짓 동안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서영의 <노병들>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물론 그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얼추 비슷해 보이기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수줍게 고백하자면 SF 작가 이서영은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작가다. 10년 전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악어의 맛>을 읽었을 때부터 그랬다. 이서영의 작품들이 품고 있는 메시지와 사연 깊은 정서는 언제나 내가 꿈꾸는 목적지 중 하나였다.
나는 작가의 재능이 그 내면의 시선으로부터 결정된다고 믿는 편이다. 촘촘한 문장도, 숨 막히는 사건 전개도, 탁월한 반전도, 미려한 묘사력도 이에 비하면 사소한 잔재주일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재능도 노력과 학습으로 상당 부분 갭을 메울 수 있다. 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의 유니크한 시선만은 결코 배우거나 흉내낼 수 없는 법이다. 그건 그 사람이 살아온 삶 자체니까. 우리는 작가가 지닌 독특한 시선, 오직 그의 관점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세계를 흠뻑 느끼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그런 면에서 이서영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기본적으로 이서영의 작품들은 투쟁적이다. 문장 곳곳에서 활동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그간의 삶이 듬뿍 묻어난다. 딸을 잃은 엄마도, 친구를 잃은 소년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한없이 강한 존재에 맞서 다 함께 창끝을 겨눈다.
이서영의 세계에서는 심지어 고양이들마저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서영의 세계엔 이해와 사랑의 시선이 가득하다. 때로는 자신의 적들마저 사랑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편집 <악어의 맛> 후기에서 작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말한다. 세상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 어찌할 수 없는 사랑으로 적들마저 그 속에 품고 마는. 투사이되 적군을 사랑하다니, 이건 그야말로 영웅의 풍모이지 않은가.
<노병들>의 주인공 철구는 한때 초능력으로 시민들의 집회를 분쇄하던 국정원의 비밀 요원이었으나, 이제는 며느리의 눈치를 보며 탑골공원을 전전하는 노인일 뿐이다. 매번 시민들의 편에 섰던 그의 초능력 맞수 ‘엿가락’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 늙어 초능력마저 사그라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지만 이제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따위는 상관없어져버린 지 오래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공평히 늙어 공원 구석에 쭈그려 앉은 신세이니. 어느 쪽도 그저 처량할 뿐이다.
<바리케이드와 개구멍>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도 재미있다. 파업에 돌입한 철도… 아니 우주선 기관사들은 기관실 문을 굳게 잠그고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쌓는다. 하지만 파업은 시작도 전에 와해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 이유는 단순하다. 담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숨겨진 개구멍을 통해 어떻게든 담배를 구해와야 한다.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조합원들로부터 파업 대오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비장한 대의명분을 위해 모인다 한들 우리는 인간이다. 영웅도 악마도 아닌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존재들. 투쟁 기계가 될 순 없다. 개인적으로 이서영의 작품 중 가장 귀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코미디니 부담 없이 찾아보셔도 좋겠다.
<센서티브>는 앞선 이야기들보단 조금 어둡다. 이 이야기 속 주인공 모녀는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다. 센서에 잘 감지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고 자동화되어가는 미래. 센서에 감지되지 않는 모녀는 점차 소외되고 잦은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서로에게 감춘다. 바삐 먹고사느라. 괜한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모녀의 서로를 향한 사랑과 의도된 무심함은 결국 파괴적 결말로 치닫는다.
이서영의 세계를 가장 깊게 탐구하고 싶다면 장편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를 추천드린다. 코스믹 호러의 대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을 재해석한 이 장편은 호러 장르의 문법과 결합하며 이서영의 작품 세계 중 가장 깊고 낮은 지점에까지 도달한다.
건설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 이슬은 사타구니에 흐르는 냉과 악취, 극심한 생리통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 그런 슬에게 회사는 백화점의 악취를 해결하는 보수공사 업무를 배정하고, 슬은 어딘지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듯한 건물에 흥미를 느끼고 지하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쩐지 슬의 몸과 닮았고, 슬의 몸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우주적 공포의 초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작가는 1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할애해 우리의 낮고 깊은 현실을 빼곡히 그려 보인다. 생리 중인 슬에게 은근히 섹스를 요구하는 남친, 슬의 사타구니 냄새를 비웃는 남친과 친구들의 은밀한 카톡방, 폭력을 휘두르는 노인, 불편한 회식 자리, 극명하게 구분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명품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거짓 웃음과 미스터리 쇼퍼의 강압적 평가 같은 것들. 백화점 보수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슬이 보고 겪는 일들은 너무나 리얼해 마치 종이에 쓰인 글자 하나하나가 살갗으로 기어올라 모공 속에 파고드는 듯 생생하다. 100페이지 가까이 집착적으로 쌓아올린 리얼리티는 독자로 하여금 작중 세계를 온전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나아가 종반부의 초현실적 사건에 엄청난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단지 혐오, 폭력, 비정규직 노동과 같은 표면의 키워드를 훑는 수준을 넘어 한층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듯 보인다. 개별적 현상을 넘어 그 기저에 깔린 근본적 원인, 생명이 가진 시큼찝찝한 본성 같은 것. 거북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생물적인 속성을 끄집어 어루만지고자 하는 것이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땀과 피의 냄새, 고름과 진물의 냄새와 같다. 생명을 지닌 이상 우리는 이러한 악취를 씻어낼 도리가 없다. 잠시 억누를 수 있을지언정 완벽히 제거하거나 교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생성된 악취는 백화점의 지하, ‘빈오재’라 불리는 공간으로 흘러 고여든다.
참을 수 없이 강렬한 오징어 냄새가 나는 이 공간에는 여성의 성기에 가해지는 폭력과 혐오, 불쾌감과 성적 매료 같은 것들이 끔찍하게 뒤엉켜 있다. 백화점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원한이 점차 낮은 곳으로, 끈적한 점액처럼 흘러 흘러 지하에 고여든 것이다. 과거 미쓰코시 백화점이던 시절부터 백년 분량의 원한을 축적한 지하 공간은 이윽고 세상을 파멸시킬 우주적 존재를 소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신비롭게도, 이 모습은 공포보다는 오히려 환희에 가깝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현실의 폭력은 우주적 존재보다 두려우며, 차라리 거대한 빨판 괴수에 의해 멸해지기를 염원할 정도로 추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