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SF 작가들을 MBTI…, 아니, MICE라는 네 가지 척도로 분류해보곤 한다. MICE는 <엔더의 게임>으로 유명한 오슨 스콧 카드의 작법서에 등장하는 개념인데, 인물에 집중하는 기성 소설과 달리 장르 소설은 세계(Milieu), 착상(Idea), 인물(Character), 사건(Event) 등 네 가지 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슨 스콧 카드에 따르면 SF 소설은 MICE 네 가지 요소 중 하나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다시 말해 SF는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세계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특정한 사건이나 기막힌 아이디어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계와 착상, 인물과 사건 중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작품과 작가의 성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심너울의 작품은 착상에 집중하는 편이다. 곽재식은 사건에, 천선란은 인물에 집중한다. 김초엽은 인물과 착상에, 배명훈은 사건과 세계에, 문목하는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며, 김보영은 네 가지 요소에 고루 투자하는 편이다. SF의 신(神)인 듀나는 이 네 가지 요소의 비율을 그때그때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듯하다.
이번에 소개할 작가인 해도연은 그중에서도 ‘세계’라는 무기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다. 세상을 지배하는 달의 거대기업 ‘인텍 루나’와 그들이 보유한 중력파 기술을 중심으로 압도적 스케일의 서사가 펼쳐지는 <위대한 침묵>, 멸망한 지구와 마주하게 된 우주 탐사대원들의 지적 유희극 <우주탐사선 베르티아>, 차갑게 식어버린 행성속 화산 분화구에 갇혀 살게 된 생존자들의 이야기 <밤의 끝>까지. 해도연이 창조해낸 작품 속 세계는 하나하나가 모두 매력적이고 촘촘한 설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중에서도 해도연의 팬들이 가장 매력적인 세계로 손꼽는 작품은 아마도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이 아닐까.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에우로파에 파견된 세 과학자 세실리아, 수미, 마야는 두꺼운 빙하 아래 심해에서 지적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같은 시각, 지구에 떨어진 운석에서 미지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인류는 멸망 위기에 처한다. 우주로 파견된 모든 과학자들에게 지구로의 철수 명령이 떨어지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남은 72시간 내에 에우로파 생물들의 샘플을 회수해야 한다. 어쩌면 바이러스를 치료할 해법이 그 생물들에게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무대인 에우로파는 무척이나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다. 빙하 아래 깊디깊은 심해 속에는 8개의 열수구(바다 속 화산, 마그마로 인해 뜨겁게 데워진 해수가 솟아오르는 지점)가 있고, 각각의 열수구마다 독자적인 생물 종들이 번성해 작은 문명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열수구들은 제각각 멀리 떨어져 있기에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에우로파의 작은 생명들에게 열수구는 하나의 행성이며 바다는 공허한 우주다. 여덟개의 세계를 얼음 위에서 내려다보며, 세명의 과학자는 각각의 열수구에 북유럽 신화에서 따온 이름을 붙인다. 어떤 세계는 아스가르드이고, 어떤 세계는 니플헤임인 것이다.
작중에서 그려지는 에우로파는 과학적 사실과 허구적 가정이 우아하게 뒤섞여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과학인지 알 수 없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Science’와 ‘Fiction’이 자연스러운 한쌍처럼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엄밀하고 딱딱한 과학을 부드러운 신화가 감싸며 서로를 더욱 온전한 존재로 이끌어가는 것. 현직 천문학자인 해도연만이 부릴 수 있는 절묘한 묘기다.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이 세련된 SF로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는 여러모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라 부를 만하다. 지구로부터 한참 떨어진 머나먼 해저 세계의 거대한 비밀이야말로 이 작품을 읽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힘이며, 주인공인 과학자들이 에우로파의 비밀을 탐구하고 해소하는 과정이 이 이야기의 중심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탐구 과정은 페이지마다 빼곡한 각주가 채워질 정도로 탄탄하고 과학적이다.
그런데도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은 조금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과학자들의 논쟁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적절한 긴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들이 요소요소마다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쉴 틈 없이 새로운 위기 상황을 부여하며 독자가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의 긴장을 끌어올린다.
한차례 위기를 넘길 때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세계의 비밀에 한 걸음 다가선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자로서의 우아한 태도를 견지해내고, 불필요한 다툼도 폭력도 없이 이성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아낸다. 여덟개의 열수구와 이를 둘러싼 바다가 어떻게 생명을 잉태했고,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끝내 멸망에 이르렀는지. 지구에 창궐한 바이러스의 정체는 무엇인지, 또한 세 과학자 사이엔 어떤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지. 삼중 나선처럼 꼬인 비밀들이 퍼즐처럼 맞물리며 하나씩 풀려나간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위기와 급전개. 정말이지 완급 조절이 일품인 작품이다. 이야기의 본질에 능통한 작가만이 부릴 수 있는 높은 경지의 기교랄까. 해도연의 작품을 읽다 보면 SF가 어렵다는 말은 다 비겁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처럼만 쓴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과학도 충분히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에후, 말은 쉽지).
물론 이 대단한 작품에도 단점이 하나 있다. 분량이 짧다는 것. 너무 짧아서 속상할 정도다. 두꺼운 장편 한권은 너끈히 뽑아낼 방대한 설정과 빼곡한 사건들이 롤러코스터처럼 휙휙 스쳐 지나가버린다. 매력적인 에우로파의 생태계를 아주 짧게만 다루고 지나가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세 과학자들의 관계나 병풍이 되어버린 제롬의 사연도 많이 궁금했고. 좋은 이야기인 만큼 아쉬움도 크게 남는 모양이다.
전부 떠나서,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은 재미있는 단편이다. 언젠가 꼭 장편 버전으로도 읽고 싶은 작품이다. 해도연이 장편을 쓰게 될 날만 나는 몇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가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은 지금까지보다 더 긴 분량의 이야기라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으니 그 작품 또한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