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험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어느 봄에 나는 그 말에 완전히 꽂혀 있었다. 학교를 어설프게 졸업했고, 다니던 직장은 그만두었고, 1집 앨범을 내고 나서 밴드 활동은 어떻게 흘러갈지 확신이 없던 시기였다. 앨범 발매 후 유일하게 나간 보도는 밴드가 무기한 활동을 중단한다는 이야기였고, 어떤 활동도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원치 않는 방학이 시작될 판이었다. 그때 작업했던 노래가 <잔인한 사월>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이 곡을 쓰고 발표하면서 그 방학은 짧은 봄방학으로 끝나게 되었고, 길다면 긴 인디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당시 동네슈퍼 지하에 자리한 작업실은 비가 오면 물이 새곤 했다. 혹시나 녹음할 때 다른 소리가 들어갈까봐 새벽에 지하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을 해야 했다. 봄은 한창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봄인데도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 같다. 땅속에 있었지만 뭔가 새로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들을 담은 데모 CD를 발매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아서 직접 포장을 해서 배송했다. 수천장의 CD가 만들어져서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로 전해졌다. 브로콜리너마저가 아직 활동을 하고 있고, 이런 노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그때 친구들과 모여 함께 CD를 포장하고 보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시간이 10년이나 지나버렸다.
최근에 홈페이지에서 절판 예정인 CD를 판매하면서 CD를 포장해 발송할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긴 했지만 포장비닐을 튼튼히 감아서 봉투에 넣던 느낌이 아직 손에 익숙하게 남아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꽤 막막한 순간이었는데 어떻게든 넘겨왔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코로나19도 여전하고 공연은 열리기 어려우며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잊히고 있을 테고 새로운 노래는 만들기가 어렵다. 예전엔 어떻게 이런 좋은 노래를 만들었지?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했던 것 같기도 한데 왠지 기분 탓이기를 바라본다.
‘가수는 노래 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웃어넘겼던 적도 있지만 (정말 그렇다면 왠지 우리팀은 좀 슬프게 될 것 같다) <잔인한 사월>을 발표한 뒤로는 왠지 사월을 맞을 때마다 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월이면 떠올리게 되는 4·3 사건 같은 슬픈 역사적 사건이 예전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팀 내부적으로는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지난해 사월에 스탭들과 작별을 하기도 했고, 멤버 변화도 있었다. 이쯤 되면 정말 사월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사월이 잔인한 달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처음 듣고 알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다들 사월을 잔인하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부끄럽지만 나중에서야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곡을 쓸 때에도 지금에도 나는 그 시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최근에 다시 훑어보았지만 워낙에 길고 알아야 할 배경 지식이 많은 탓에 그 내용 전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잔인한 사월을 묘사하는 도입부를 읽으며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는 대목에서 환절기의 일교차에 대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두터운 외투는 벗었지만 낮과 밤으로 찬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는 봄날, 왠지 마음만 앞섰다가 되레 상처받고 말았던 일들이 떠오른다. 새 학기로 떠들썩했던 시간이 끝나고 중간고사가 다가올 때쯤 쓸쓸한 기분이 들었을 때,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심정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즈음에는 ‘나의 자리를 찾는’ 때가 언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지났지만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 하는 물음에 명쾌히 답하기는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마음이 가는 만큼 몸도 함께 움직인다면 좋을 텐데, 우리의 시선은 어느덧 녹색으로 가득한 나무 사이를 지나 빛나고 있는 봄볕으로 향하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현실에 묶여 있는 것 같다. 봄은 그 거리가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그 간극을 메꾸려 일상의 틈에서 부지런히 특별한 순간들을 찾아왔었지만 올해는 유독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마스크를 벗으면 조금 나아질까?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그전이 어땠는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다시 사월은 돌아왔고, 요즘은 다시 새로운 곡 작업에 몰두 중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작업실은 지하에 있고, 사월의 봄빛은 푸르지만 오히려 땅속 깊숙이 들어가버리고 싶다. 섣불리 기대조차 하지 않은 채로 엉엉 울 힘조차 아껴서 파고들다보면 죽은 땅에서도 싹을 틔워낼 라일락을 다시 길러낼 수 있을까 싶다.
<잔인한 사월> _브로콜리너마저
거짓말 같던 사월의 첫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왠지 나만 여기 혼자 남아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네
떠들썩하던 새로운 계절
그 기분이 가실 때쯤 깨달을 수 있었지
약속된 시간이 끝난 뒤엔
누구도 갈 곳을 알려주지 않는 걸
나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지금은
깊어만 가는 잔인한 계절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나듯
가슴 설레기엔 나이를 먹은
아이들에겐 갈 곳이 없어
봄빛은 푸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