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의 모티프가 어느 정도의 극적 긴장을 획득하려면 대체로 잃어버린 그것의 가치가 상당히 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른바 ‘사건’이란 게 형성되려면 무언가 중요한 곳에 급히 쓰일 거액의 돈 정도는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천국의 아이들>은 이런 ‘좁은’ 생각이 결코 옳지 않음을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알리가 잃어버린 것은 기껏해야 여동생 자라의 헌 구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에서 주인공 부자가 잃어버리고 만, 생계수단으로서의 자전거와 비교해봐도 너무나 하찮은 것처럼만 보인다. 하지만 <천국의 아이들>은 잃어버린 물건이 그처럼 미미하다는 것을 오히려 통절한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남들이 대단치 않다고 치부하는 그런 것조차도 갖지 못하는 사정이야말로 비극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어이없지 않은가.
구두 한 켤레 잃어버린 소소한 일만 갖고도 알리와 자라는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잔인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자전거 도둑>에서부터 <로스 올비다도스>(루이스 브뉘엘, 1950), <픽쇼테>(헥터 바벤코, 1981), <살람 봄베이>(미라 네어, 1988), <베개 위의 잎새>(가린 누그로호, 1998)에 이르는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고통받는 아이들과 형제 사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알리와 자라는 이 ‘거리의 아이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건 <천국의 아이들>의 주인공(들)이 ‘결핍’을 만회하기 위한 범죄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럼으로써 수난 이야기의 일종의 희생자로 자리 매김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리와 자라는 자신들의 부족한 처지를 잘 알지만 그걸 정직하게 타개해나가려 노력하는 아이들이다. 이 오빠와 동생은 부모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부모님을 조르거나 하는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대신 한 운동화를 서로 나눠 신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그리고 동생에게 새 운동화를 얻어 줄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 생기게 되자 알리는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한다. 마라톤 대회에서 1등도, 2등도 아닌 운동화가 상품으로 걸린 3등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 꼬마에게 ‘소명’이라고 불러도 됨직한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이 이처럼 대견스러우니, 그들의 투명하고 큰 눈동자에 고인 눈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지 않을 재간이 없다.
비대하고 기름지기만 한 요즘 영화들 가운데에서 기술과 돈이 아니라 이 아이들의 그것처럼 소박한 마음으로 재미를 만들어내고 또 가슴을 울리는 영화인 <천국의 아이들>은 정말이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듯 보이는 영화다. 이란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는 등 특히 서구에서 이 영화가 “고요하고 미묘한 보석”이라며 호평을 받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의 아이들>이 어떤 ‘혐의’가 전혀 없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우선 우리는 이처럼 ‘맑은 눈’을 가진 이란영화를 너무 자주 보아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나 자파르 파나히의 <하얀 풍선>(1995) 등 어린 아이들의 순진한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다른 이란영화들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실제로 이 영화는 어린 아이의 순진함이란 모티프말고도 금붕어라든가 도랑 속에 빠진 신발 같은 요소들을 <하얀 풍선>과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천국의 아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면에서도 앞선 그 영화들이 견지하고 있던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 영화 속의 세상은 분명 곤궁함이 일종의 악(惡)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갈등이라고 할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것은 감히 악이라고 지칭할 수도 없을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알리와 자라는 물론이고 그들의 아버지까지 모두가 확고한 도덕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며 악으로서 가난은 그것을 공고히 해 줄 뿐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 속의 사람들은 제목 그대로 ‘천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렇듯 일면적인 세계를 리얼리즘의 낡은 방법론을 이용해 그렸다고 해서 이 영화를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이 감독 자신의 세계관이라고 강변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 협소한 세계를 설득력 있게 묘파하는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영화를 만들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크고 강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는 오늘의 관객에게 의미있는 자극이다. 자잘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능력은 아무나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
제목 : 악의 손길 없음, 그러니 따뜻한가?...이란영화의 ‘어떤 경향’
<천국의 아이들>을 보고 난 후의 느낌, 즉 ‘이란영화는 왜 이렇게 모두가 천진한 시각을 갖고 있지?’라는 식의 인상은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테헤란에서 나오는 영문판 이란영화 잡지 <필름 인터내셔널>(2000년 봄)에는 최근 이란영화에서의 ‘소박한 도덕주의’의 경향에 대해 다룬 평문이 실려 있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영화의 소박한 도덕주의”라는 이 글에서 필자인 로버트 사파리안은 ‘단순한 도덕주의’란 모든 악을 무시하고 그것의 힘과 상대적인 무게를 경시하는 세계관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경향이 이란영화에 너무도 다양하게 퍼져있다고 분석했다. 그 구체적인 예로 첫 번째로 거론된 영화가 바로 <천국의 아이들>. 사파리안이 분석한 또 다른 영화들로는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 업>과 <체리 향기>, 그리고 라크샨 바니 에테마드의 <푸른 베일> 등이 있었다. <푸른 베일>의 예를 들어보면, 이것은 60대의 부르주아 남성과 젊은 여성 노동자 사이의 사랑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가능한 성적·계급적 차이의 문제가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사파리안의 분석에 따르면, 세속적인 서구 중심의 독재 체제에서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정치 체제의 변화, 지식인 사회(특히 좌파 측)의 분위기의 변화 같은 요인들이 영화계에 무조건적인 휴머니즘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가져왔다고. 한편으로 그는 이란영화의 이 도덕주의적 경향이 긴장들로 가득 찬 현재의 이란 사회를 반영하지 않는 영화들로 귀결되었다고 지적한다. 글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악, 모든 증오, 모든 성적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확실히 그렇진 않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이 제거된 세계이다. 아니면 대립하는 힘들 사이의 어떤 긴장과 갈등이 없는, 따라서 생명이 없는 세계가 따뜻하다고 불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