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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아무나 기러기가 될 수는 없다

<즐거운 인생> <우아한 세계> <전설의 주먹> 등으로 보는 기러기 아빠의 도(道)

<즐거운 인생>

고운 꿈을 먹고 자라던, 아니 그 나이에 새삼스럽게 자라기는 어려우니까 그냥 살만 찌던 스물다섯,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는데 두살 많은 남자 동기가 애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와서 나 좀 구해줘.” 선배들이 술 먹자니까 좋다고 나만 버리고 나가더니 꼴좋구나, 어디 한번 날이 새도록 아저씨들한테 고문과 농락을 당해보려무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마음 착했던 나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 회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단란주점에 2분 만에 착륙했다. 동료가 “좀전에 몰래 (무척 맛있고 비쌌던 그 집의) 소고기 튀김 시켰어”라며 전화를 끊은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도착하니 그곳의 광경은, 목불인견, 눈이 있는 자라면 차마 볼 수 없었지. 동료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안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제 여자친구가 왔네요, … 누님.” 그랬다, 동료는 선배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누님들로부터 구해달라고 애원했던 거였다. 그렇다면 그 누님들은 어디에서 왔던가, 외로운 아저씨들이 단란주점 웨이터를 닦달해 부킹한 옆방 여고 동창 모임에서 왔다.

당시 아저씨 구성은 이혼남 하나, 기러기 아빠 둘, (애는 없으니까)기러기 남편 하나, 나이는 나무랄 데 없는 아저씨지만 신분만은 총각 하나로서, 그 다섯명이 모두 스테이지에 나가 옆방 아주머니들 허리를 껴안고 돌아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다섯, 아주머니는 여섯, 그렇다면 한명이 남을 테지만 세상에 그런 부킹이 어딨어. 웨이터는 20대인 내 동료까지 계산에 넣었고, 그 결과 한명 남은 아주머니가 내 동료의 ‘누님’이 되었던 것이다.

그날 스크럼을 짜는 듯한 결의로 팔짱을 끼고 단란주점을 탈출한 나와 동료는 다짐했다, 우리 커서 절대 기러기는 되지 말자, 부킹은 20대에서 끝내자고(서른 넘으면 당연히 결혼하는 줄 알고 그랬는데, 휴). 하지만 그땐 몰랐다, 나이만 먹는다고 아무나 기러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아한 세계>

왜냐, 기러기 아빠가 되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하는데(아니, 그보다 먼저 애가 있어야겠지만) 그 돈이 나이와는 반비례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밴드를 만들어 중고차 파는 동창을 등쳐먹는 영화 <즐거운 인생>만 봐도 그렇다. 대학 동창 셋이 모였는데 그중 비록 머리는 없어도 돈은 있는 자는 혁수(김상호)뿐. 집 팔고 창고 같은 데서 지낸다고는 하지만 아이들 학비에다가 마누라가 바람피우러 다닐 정도의 용돈까지 보내는 와중에 친구들 악기도 사주면서 한켠에 연습실까지 차릴 만큼 넓은 매장을 가지고 있으니 가히 4인조 그룹 활화산의 총수라 할 만하지 않은가.

<우아한 세계>의 조폭 인구(송강호)도 조직의 2.5인자쯤 되는 위치에 있다가(큰형님 동생이 낙하산 상무라서 레벨 0.5 하락) 일인자가 되자마자 아내와 딸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고 자유를 얻는다. 기러기의 자유, 밤새 술 마시고 퍼질 수 있는 자유, 향수와 화장품 냄새에 절어 들어가서 씻지도 않고 잘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다음날 대낮에 일어나 라면이나 대충 끓여 먹을 수 있는 자유. 그래, 라면은 기러기의 친구지.

먼 옛날 그 단란주점 근처 회사에 다니던 시절, 아침마다 숙취에 시달리던 기러기 세 마리가 대형 컵라면으로 해장을 하는 바람에 라면 냄새에 질린 나는 그 회사 다닌 2년 동안 라면을 먹지 못했고, 25년 인생 처음으로 몸무게가 역주행을 하여 여자들 꿈의 몸무게라는 ○○kg에 도달했다. 그래요, 그것만은 고마웠어요, 기러기들.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자유와 수명을 맞바꾸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기러기 아빠는 울지 않는다>라는, 눈물나지만 왠지 사치스러운(그래도 기러기 아빠니까) 제목의 책을 쓴 기러기 아빠 박의석은 기러기 생활 두달 만에 앞니 두개가 나갔고 곧이어 피부 노화와 탈모, 시력 감퇴, 요산과 콜레스테롤 수치 상승, 디스크 악화 등에 시달렸다고(이렇게 쓰니까 마치 제약회사 광고 같군요) 고백했다.

<전설의 주먹>

근데 진짜 그렇다. 기러기라고는 있을 수가 없는, 업계에서 소문난 저임금 회사의 저임금 정규직 노동자로 근무하다가 고임금 회사의 저임금 계약직 노동자로 이직한 첫날(그럴 거면 뭐하러 직장을 바꿨을까), 나는 마치 성인병의 표본을 진열한 듯한 사무실 풍경에 경악했다. 어떻게 제각기 다른 유전자를 타고난 중년 남자들이 이토록 일제히 배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그 회사에 가득했던 기러기 아빠들은 낮에도 술과 고기를 먹었고, 저녁에도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밤에도 술과 고기를 먹었으니, 그들과 더불어 술과 고기에 빠져 한달 만에 2kg이 불어난 나는 계약직의 특권으로 점심 시간이 지나서 출근하는 길을 택했다. 술과 고기는 하루에 두번만, 이러다 요절하겠어. 아니, 요절하기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지만.

그러므로 기러기들은 알코올뿐만 아니라 운동에 중독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차라리 세상을 두루 이롭게 한다. <전설의 주먹>의 기러기 아빠 상훈(유준상)처럼 격투기를 연마하면 동갑내기 회장님(정웅인)보다 열살은 젊어 보일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어느 영화에선가 상사부일체라 했던가, 상사를 스승과 부친처럼 한몸으로 섬기던 내 친구는 알코올중독 기러기 상사와 더불어 배가 나왔다가 그가 마라톤에 중독되면서 더불어 배가 들어갔다. 기러기 상사와 놀아주며 불행할 수밖에 없다면, 배라도 들어가는 편이 낫지.

계약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제 버릇 개 못 주고 회사를 떠난 이후, 한국엔 새로운 단어가 생겼다, 기레기. 그렇게 그 회사의 기러기들은 기레기가 되었다. 계속 거기에 있었다면 나 또한 기레기가 되었을 텐데, 기러기는 못 되어도 기레기는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할까, 아이도 있으면서 돈도 있는 기레기 겸 기러기가 중년 실업자에 외기러기인 나보단 낫다고 할까. 혹은 기레기이기에 비로소 기러기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할까. 모든 것이 분명했던 20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디스토피아의 현재다.

요리는 기본

울지 않는 기러기 아빠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두세 가지 것들

<즐거운 인생>

영어를 배우자

<즐거운 인생>의 혁수는 한국어를 쓰면 안 된다는 엄명을 내린 아내 때문에 딸하고 안부 한마디 제대로 주고받지 못한다. 이것이 대입 위주 주입식 외국어 교육의 폐해, 6년 동안 일주일에 다섯 시간 이상 영어를 배웠는데도 태어난 지 12년밖에 안 된 애보다 못하지. 내 지인은 영어 교육을 어찌나 철저히 시켰던지 기러기 생활 청산 이후 딸하고 뭔가 긴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필리핀 출신 도우미에게 통역을 시키곤 했다. 원래 가사 도우미였는데, 지금은 통역 도우미. 하지만 그는 딸에게 한국어 대신 인도어 과외 선생을 붙일 예정이다.

<수상한 고객들>

경제를 배우자

왠지 경제에 밝을 것 같은 보험업계, 그 정글에서 부장까지 올라갔던 <수상한 고객들>(2011)의 오 부장(박철민)은 사기를 당해 새로 차린 빵집을 비롯한 전 재산을 날리고 아파트에서 고시원으로 옮긴 다음 대리운전을 시작한다. 상황이 어찌나 심각한지 과거 부하 직원이었던 보험왕 병우(류승범)가 자살 방지 차원에서 스토킹할 정도. 기러기의 세월은 대륙 사이에 놓인 바다만큼이나 넓고도 깊은데 정년은 코앞이니, 경제를 배우자.

<전설의 주먹>

외로움을 배우자

한창 데이트 중이던 어느 새벽,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10분 넘게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전화기 너머에선 누군가가 흐느끼고 있었다. “누구냐.” “매형이야.” “이 새벽에 그게 말이 되냐.” “기러기 아빠거든.” 아. 사람이 외로움을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외로움에 익숙해질 수는 있다. <전설의 주먹>의 상훈은 그 외로움과 더불어 복근을 키우지만, 그의 동창이자 회장인 진호는 “내가 요즘 외로워서” 제 발로 나간 상훈을 연봉 1억원 얹어서 데려오려고 한다. 외로움에 지지 않는 것도 돈 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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