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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의 아수라장] 영화는 시체인가?
김곡(영화감독) 2014-08-08

순간이 소멸하는 순간 태어난 영화 속 다잉 메시지

<스탠 바이 미>

시체는 말이 없다. 지워진 밤, 쏟아지는 잠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세 바가지. 꾸벅꾸벅 졸다보면 응고혈은 과거형 시제. 시체는 과거형으로만 증언하는 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육신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시체는 말이 없지만, 말이 있는 거다. 시체는 수다는 떨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신 시체는 증언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체는 생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지만, 생의 끝자락에 대해선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예컨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소싯적 보았던 추리퀴즈에선, ‘다잉 메시지’라고 했던 거 같다. 마그마라는 사람이 당신을 암살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죽는 순간에 범인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리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죽어가는 당신의 눈앞엔 여러 가지 채소들이 즐비하다. 배추, 시금치, 양파, 토마토, 감자. 자, 무엇을 잡을 것인가?! 범인의 이름은 ‘마그마’다! 무엇을 잡을 것인가? 유치한 추리문제라고? 투덜대는 사이에서도 숨은 다해간다. 범인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끝나가는데, 유치한 게 대수인가? 자, 무엇을 잡을 것인가?!(‘토마토’가 정답이다. 마그마. 토마토. 마그마. 토마토….) 토마토는 다잉 메시지다. 죽는 순간에, 죽음을 증거하는 마지막 몸짓, 발버둥, 각종 제스처.

뭐 사실 다잉 메시지는 꼭 몸짓만은 아니다. 아무런 몸짓이 없어도, 다잉 메시지는 시체에 고스란히 남는다. 최소한 목 졸려 죽은 시체엔 끈 자국이 남는다. 그리고 차에 치어 죽은 시체엔 그 차의 범퍼 자국이 남는다. 게다가 SUV에 치인 시체와 소형차에 치인 시체는, (범퍼 높이 때문에) 골절된 부위가 다르다. 골절 부위가 각기 다른 차종을 지목하는 훌륭한 다잉 메시지 역할을 하는 거다. 다잉 메시지는 상징도 도상도 아니고, 지표(index)다. 뱀이 지나간 땅에 남는 빗금 자국처럼 무언가 눌렸던 자국, 무엇과의 접촉에 의해 남겨진 흔적이 곧 다잉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파업>

고전적 시체와 현대적 시체

영화도 사실 지표다. 빛이 필름에 닿아서 만든 지표가 바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한순간이 소멸해가는 그 순간, 영화는 태어난다. 그렇다면 영화도 시체일까? 온갖 흔적들을 이멀전에 품고 있는, 말은 없지만 증언만은 또박또박 해대는 시체? 시네마테크에서 방귀 좀 뀌어봤다는 시네필은 드레이어와 베리만과 같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열정적인, 그래서 생까지도 얼어붙게 하거나 반대로 태워버리는 얼굴들, 즉 시체-클로즈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잔 다르크의 민낯엔 유통기한이 얼마?). 그리고 데스메탈과 영화의 접점을 찾으려고 했던 마니아 감성의 시네필들은, 시체를 하수구나 들판에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쓰레기처럼 취급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스스로 꼭두각시 혹은 마네킹이 되려는 사람들을 시체로 취급하는 브뉘엘의 영화들을 언급할 것이다(<아르치발도의 범죄인생> 강추). 하지만 진정 고전 시체영화를 찾으려고 한다면, 난 소비에트에서 찾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에이젠슈테인을 <전함 포템킨> <10월>로 태그하겠지만, 사실 그가 시체화술법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은 그의 입봉작(아… 너무 구린 단어다) <파업>이다. 너무나 순진한 나머지 당하고만 살았던 민중이 비로소 성난 폭도로 돌변하는 것은, 한 어린아이의 시체가 그들의 생을 두 동강낸 바로 그 순간부터다. 에이젠슈테인에게 시체는 진정한 변증법의 촉발기이자, 혁명의 가속기였던 거다. 시체는 견인기다. 소 시체는 민중을 도살되는 존재로 견인하며, 반대로 학살된 시체는 눈동자를 역사의 목격자로 견인한다. 견인 몽타주란 시체 몽타주다. 시체가 얼마나 혁명적인 요소인가를 간파했던 작가를 소비에트에서 한명만 더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바로 도브첸코다. 도브첸코에게 인간이란 봉기하는 인간이 아니라 반대로 쓰러지는 인간, 추락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전장에 서 있는 인간은 이미 사후경직된 시체들에 다름없지만(<병기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연의 섭리에 연결시키는 비장한 결단이 또한 죽음이었다. 우크라이나 들판을 비행하는 곡식 알갱이들처럼, 장례 행렬은 과거를 언제나 미래를 향해서 되돌려놓는다. 도브첸코에게 봉기는 언제나 장례식에서, 시체를 딛고 일어나는 셈이다(<대지>).

고전영화의 시체는 얼마든지 더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가 없고, 언제라도 끝날 수 있는 현재만 충실히 살아가는, 그러나 이승에 잠깐 마실 나온 듯 초연하게 살아가는 오즈의 인물들도 사실은 예비 시체들이다. 수묵화에도 시체는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노래하는. 고전적 시체는 목소리를 가진다. 우리 엄마가 꼽는 가장 멋진 고전적인 시체는, <태양은 가득히>(감독 르네 클레망)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시체다. 모든 범죄와 음모가 성공적으로 끝난 줄 알았던 바로 그 순간, 시체는 끈덕지게 배 밑동에 매달려 있었다. 울 엄마의 아들이 꼽는 가장 멋진 고전적인 시체는, <스탠 바이 미>(감독 로브 라이너)의 시체다. 공포의 끝판왕일 것 같았던 시체는, 오히려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죽음이 생의 끝장이 아니라, 반대로 생의 일부임을 증언하고 있었던 거다. 이게 바로 고전적 시체다. 그들은 다잉 메시지를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비명 지른다. 반대로 현대영화의 시체는 목소리가 아니다. 현대영화의 시체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목소리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스스로 척추를 곧추세우고 관절을 움직일 때, 즉 마치 생을 다시 찾듯이 과감하게 되살아날 때 태어난다. 시체의 현대화(?)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장르를 공포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포영화는 끊임없이 시체들을 되살려낸다. 뿐만 아니라, 공포영화의 시체는 산 사람 시늉까지 해줘야 명함이나 내민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지나친 클래식들은 식상하다. 마니아 성향의 클래식 <좀비오>(감독 스튜어트 고든)에서 되살아난 시체가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보라. 시체도 리비도가 있고, 체위가 있다. 기상천외한 외계인들도 시체 현대화의 일등공신이다. 그들은 시체는 아니지만, 인간의 신체에 잠입하거나 잠복하면서, 거꾸로 인간을 그들의 숙주로, 즉 걸어다니는 시체로 만들기 때문이다(잔 다르크의 민낯이 하느님을 배태하였다면, 지구인의 몸통은 에일리언을 배태하였도다). 현대적 시체들은 좀비들이다. 그들은 다잉 메시지를 온몸으로, 움직임으로, 그리고 생생한 동작으로 표현한다. 예컨대 쏟아져 내리는 좀비들은, 그들이 살아생전에 간직했던 허기와 무의식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배고파. 한입만. 배고파. 한입만. 배고파. 한입만…. 아, 이 얼마나 졸라 현대사회스럽고도 포스트모던한 다잉 메시지인가! 물론 가장 극한적인 좀비는 시체애호증자들의 시체들이다. 사랑해줘. 아흫흫. 사랑해줘. 아흫흫. 사랑해줘. 아흫흫…. 죽어서야 비로소 뿜을 수 있는 욕정은 또 얼마나 포스트모던한 다잉 메시지인가!!(부트게라이트 감독의 <네크로맨틱> 시리즈, 특히 2편을 강추한다.)

<트루먼 쇼>

유병언의 시체가 말하는 것

사람 시늉을 내는 시체, 반대로 시체 시늉을 내는 사람. 그래서 고전적인 시체는 못하고, 현대적 시체만 할 수 있는 게 바로 ‘연기’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입고 사람 시늉을 내는 식이다(<신체강탈자> 시리즈). 그리고 바이러스의 형태와 개념이 얼마든지 변용될 수 있다면, 숙주 시체의 물리적/개념적 외연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사실은 자기주체성을 잃은 채, 멍한 동공으로 유령처럼 배회하는 연기자들, 꼭두각시들, 마리오네트들, 괴뢰들은 모두 현대의 시체들이다. 미모의 여배우? 방부제 미모는 ‘방부제’ 미모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호구로 살았나? 그렇다면 당신은 시체다. 그렇다면 질문: <트루먼 쇼>(감독 피터 위어)에서 트루먼이 시체일까? 아니면 그를 속이고 있는 다른 배우들이 시체들일까? 누가 더 좀비 같은가? 확실한 건- 누가 어떻게 죽었건 간에- 다잉 메시지는 더이상 목소리의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잉 메시지는,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무대조명처럼(<트루먼 쇼>), 물질화되어 있고 무대화되어 있다. 다잉 메시지는 배우와 시나리오 그리고 무대장치들에 숨어 있다. 당신의 사망시각과 사망기전, 사인에 대해서 말해주는 상처들, 시반들, 그리고 콧구멍과 귓구멍 속에 피어나는 구더기들은, 이제 무대조명의 희뿌연 광자들처럼 무대 위 특수효과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메시지들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다. 숙주에겐 몸속에 있는 바이러스가 그렇듯이. 배우에겐 자신이 맡은 배역이 그렇듯이. 유병언 회장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시체는 도대체 어떤 흔적들로, 무슨 증언을 하려는 걸까? 그 시체는 어떤 무대 위에서, 어떤 배역을 맡은 것일까? 그의 다잉 메시지는 무대 안을 향하는 걸까? 아니면 무대 바깥을 향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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