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의 계절이 돌아왔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할 가장 무시무시한 시네마는 뭘까? 그 옛날 새벽잠을 쫓으며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듣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매주 한번씩 신예(!)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나오는 꼭지가 있었는데, 어느 여름밤 그는 호러영화 3편을 소개했더랬다. 그 작품 목록은 무시무시하게도 <프릭스>(Freaks), <엘토포>(El Topo), <이레이저헤드>(Eraserhead). 나는 당시 수입되지도 않은 이 영화들을 보려고 생난리를 쳤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영화평론가가 꼽은 이 영화들을 봐야 어디 가서 영화 좀 봅네라고 떠벌릴 수 있거니와 무엇보다 나를 정말 공포에 떨게 할 극악무도한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 언니들이 주최하는 지하 비디오 상영회에 달려가서 그 영화들을 직접 봤다. 무서웠냐고? 무섭진 않았다. 별 무섭지도 않은 영화들을 공포영화라고 소개하다니. 정성일 평론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화들의 공포는 상영회가 끝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릭스>에서 사지가 잘린 채로 진흙탕을 기던 기형아들이, <이레이저헤드>의 심연을 울리는 저음 사운드와 함께 매일 밤 나의 꿈자리를 (지금까지도) 흔들어놨던 것이다. 그것들은 “아이 깜딱이야-”류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제발 떨어져-”류의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를 쾌감으로 바꾸는 법
트라우마는 공포와 다르다. 존 카펜터가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공포가 “저 벽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라면, 트라우마는 “저 벽 뒤에 아무것도 없어도 내 등짝에 붙어 있을 것 같은 이물감” 정도가 되겠다. 즉, 공포는 정신 바짝 차리면 볼 수 있는 무엇이라면, 트라우마는 정신 바짝 차려도, <쏘우2>의 목 뒤에 있는 숫자처럼, 도저히 볼 수 없는 무엇이다. 고로 공포는 우리가 대적할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만 트라우마는 죽일 수 없다. 내 등짝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 등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쏘우2>에서 숫자가 육체에 새겨져 있듯이 말이다.
트라우마가 쾌감적일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리라. 나의 무기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나의 죽음을 전조하기에. 트라우마를 죽이려면 나를 죽여야 하기에.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사신(死神)이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 저항할 수 없다. 아니, 저항할 필요 없다. 어차피 우리는 패배할 거니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까나. 사신이 선인가? 악인가? 우문이다. <쏘우>의 직쏘(Jigsaw)가 선인인가? 악인인가? 직쏘가 밝히듯 “난 선도 악도 아니다. 그저 놀고 싶을 뿐이다”. 트라우마는 신이다. 놀고 싶은 신. 트라우마가 불쾌한 건 우리가 잘 놀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릭스> <엘 토포> <이레이저헤드>가 불쾌한 것도 같은 이유다. 하긴 누가 <이레이저헤드>의 정충처럼 생긴 신생아와 놀고 싶겠는가. 정성일 평론가, 정말 원망스럽다.
그럼, 우리가 잘 놀 수만 있으면 트라우마도 쾌감적일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트라우마 쾌감, 가능하다. 십년 전 난 여기에 대한 대답을 찾고 말았다. 그런데 이 답엔 전제조건이 있다. 먼저 사신이 되어야 한다. 직쏘가 되어야 한단 말이다. 부모한테 학대받고 사회에 보복하려는 소시오패스적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그저 신체를 해체하는 걸 좋아하는 사이코패스적 연쇄살인범. 배우의 명성이나, 편집의 부드러움이나, 연출의 세련됨이나, 이야기의 정합성을 “성취”하려는, 혹은 그것들을 정반대로 “실패”하려는 소시오 영화가 아니라 배우를, 편집을, 연출을, 이야기를 “해체-재구성”하려는 사이코 영화들. 자, 이제 공개한다. 놀기 좋은 트라우마 영화, 바로 실험영화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근접촬영할 수 있는 것
때는 바야흐로 2003년. 정성일 평론가가 소개한 불쾌한 트라우마에 여전히 시달리던 그때, 난 새로운 트라우마를 목격했다. 그 당시 인디포럼은 뉴브리드 영화를 선언하며 파격적으로 외국 실험영화들을 소개했는데, 난 보고 말았다. 마치 직쏘가 만든 것 같은 트라우마적 해체영화, 피터 체르카스키의 <드림 워크>(Dream Work)를. 얼핏 보면 <이레이저헤드>의 트라우마와 비슷해 보인다. 흑백 화면에, 공포스러운 집안 분위기, 공포에 떠는 인간들, 무엇보다 공포스럽게도 음산한 사운드.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구성의 로직부터 다르다. 다른 영화의 자투리를 사용한 푸티징 기법(found footage)이며, 옵티컬 프린팅으로 한땀한땀 만든 진동하는 프레임이며, 단추나 쇠못 등 실제 사물이 이중노출되거나, 심지어는 작가의 손이 불쑥 들어오는 등 필름의 물질성이 드러나면서까지 영화 공정은 아예 “해체”되고 있다. 다시 말해 <드림 워크>가 보여주려는 건 공포가 아니라 공포를 다루는 방식이다. 자멸해가는 희생양의 절박함이 아니라 해체를 즐기는 직쏘의 손이다. <이레이저헤드>가 “무섭지- 에비” 했다면, <드림 워크>는 “재밌지- 에비” 하는 꼴이랄까.
고로 <드림 워크>에서 트라우마는 더이상 극복이나 도전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놀이의 대상 혹은 놀이 자체가 된다. 때문에 관객은 직쏘가 되지 않으면 이 놀이는 단지 오타쿠적 괴기함이나 먹물적 난해함일 뿐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직쏘는 사신이다. 놀이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다. (직쏘의 해맑은 웃음을 보라. 희생양들이 죽어나갈 때 어찌나 천진난만해 보이던지….) 어린아이의 장난을 보고 괴기하네 난해하네, 비난하지 못하는 것처럼 실험영화에 의미가 뭐냐며 이해가 안 된다며 투덜대는 건 어리석은 푸념일 뿐이다. 놀기 쉽게 만든 게 실험영화다. 직쏘가 되는 게 어려울 뿐.
하지만 여긴 대한민국. 어려서부터 선과 악이 분명한, 왼쪽과 오른쪽이 분명한, 무의식과 의식이 분명한 이분법을 훈육받아왔다. 이런 대한민국에서 꾸러기 연쇄살인범이 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럴 줄 알고 우리의 사신 직쏘는 초심자를 위한 작품들도 준비해놓았다. 파트릭 보카노프스키의 <랑쥬>(L’ Ange)가 그것들 중 하나다. 프랑스 아트영화답게 기본적인 세팅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조롱- 살롱의 유한마담, 펜싱 복장의 군국주의자, 거대한 도서관의 어용 지식인들- 이지만, 실험영화가 늘 그러하듯 우리가 “의식”하는 것들은 밑밥에 불과하다. <랑쥬>가 “무의식”적으로 “유희”하려고 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기법과 운동의 반복성, 그리고 궁극적으론 반복에서 초래되는 구원에 대한 고행적 운동이다. 무기력한, 그러나 무한반복적 칼질이 일순간에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는 예수의 몸부림으로 치환될 때의 전복적 종교성은 이 영화가 놀기 시작한, 가지고 놀려는, 그리고 결국 놀다가 죽으려는 유희의 도착점이다. 무엇보다, 혼자 노는 게 아니라 예수의 순교를 관람(관찰!)하며 다같이 놀아보려는 집단 무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한 마리가 아니라 수천 마리의 직쏘가 상암월드컵 경기장에 떼거지로 모여 한꺼번에 같은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직쏘는 여전히 인간 아닌가. 어찌 인간의 육신을 하고 감히 해체를 꿈꾸는가”라며 개탄하는 급진주의자들은 스탠 브래키지나 쿠트 크렌, 아니면 아예 디지털의 입자성(물질성이 아니라!)을 파고드는 켄 제이콥스를 즐길 수도 있겠다. 혹은 정반대로 좀더 인간적인 직쏘를 꿈꾸는 자들은 마야 데런이나 오스트리아의 여성작가 마라 마투슈카를 선호할 수 있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이 모든 실험영화들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트라우마적이라는 거다. 공포영화가 트라우마를 다루는 데 그친다면 실험영화는 아예 트라우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실험영화가 실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의식을 가장 무의식적인 방법(해체)으로 직조해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마음(혹은 존재)을 가장 근접촬영할 수 있다는 것. 음악, 시, 소설, 회화 등 무의식을 재현하는 형태는 무수히 많겠지만, 활동사진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가장 꿈에 가깝고, 해체한다는 점에서 실험영화, 아니 기원영화는 가장 트라우마에 가깝다 하겠다.
뜬금없이 마무리하자면, 곡사도 실험영화란 걸 만들었다. 필름의 물질성과 디지털의 입자성을 아우르는(혹은 아우르려고 했던) 영화들을 세어보면 족히 예닐곱편은 될 듯하다. 그중에서 <자살변주>라는 단편영화가 있는데, 확실히 체르카스키를 염두에 두었던, 무엇보다 디지털적으로 체르카스키를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켄 제이콥스적이라고도 하겠다. 영화는 나름 이야기가 있는데, 자살하려는 여자가 불안감 때문에 자살을 포기했다가 죽음의 신을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야기를 쓴 게 기억나질 않는다는 거다. 나는 김곡이 쓴 줄 알았는데, 스탭들과 김곡마저 내가 이야기를 썼다고 증언하는 걸 들으며 “이야기라는 의식의 흐름을 망각이라는 무의식의 흐름으로 지우다니, 이것이야말로 무의식이 잉태한 ‘완전 무의식’ 영화인 것인가?”라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을 해보았던 것이다. 웬 쓸데없는 마무리냐고? 쓸데없는 건 없다. 모든 것이 트라우마가 될 수 있고 트라우마는 바로 당신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올여름에 잠이 너무 잘 올 땐 실험영화를 보자. 당신의 무의식을 의식해보는 무시무시한 경험을 해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성일 평론가님, 내 트라우마 책임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