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영화제의 경쟁부문 작품이 칸영화제의 그것에 비해 주목을 덜 받은 지는 이미 제법 됐다. 칸이 유럽 작가감독들의 작품들을 선호했다면, 베니스는 상대적으로 동방, 곧 동구와 아시아 지역 작가들의 작품들을 주목했는데, 지금은 이런 구분도 무의미한 것 같다. 작가들에게 단연 인기 있는 영화제는 칸이 됐다.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키아로스타미 등 베니스를 통해 이름을 알린 작가들도 이젠 칸과 더 친밀한 행보를 보인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베니스의 경쟁작 리스트들도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기에는 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였다. 숫자에 본질적인 의미야 있겠냐만, 그래도 영화제 개최 ‘70주년’을 맞이했다면 뭔가 다른 기대를 하기 마련인데, 올해의 경쟁부문 초대작들도 예년 수준,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올해 최고의 인기작은 비경쟁부문에 초대된 개막작 <그래비티>였다. 그런 반면 시네필들의 시선을 끈 것은 ‘베니스 클래식’으로 분류된 섹션, 곧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복원된 고전들이 상영되는 프로그램이었다.
12월17일부터 1월5일까지 열리는 2013 ‘베니스 인 서울’의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섹션은 ‘베니스 클래식’이다. 여기에서 올해에는 전부 이탈리아영화들이 소개되는 까닭에, 관객은 이탈리아영화의 황금기와 현재를 비교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베니스 클래식’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예언: 파졸리니의 아프리카>이다. 이탈리아의 방송기자 출신인 엔리코 멘두니의 다큐멘터리인데, 파졸리니와 아프리카 사이의 친화력을 다루고 있다. 파졸리니의 아프리카에 대한 사랑은 유명했다. 그는 <분노>(1963), <오이디푸스 왕>(1967), <아프리카의 오레스테스를 위한 노트>(1970) 등 세 작품을 아프리카에서 촬영했다. 마르크시스트였던 파졸리니는 부르주아 사회로 급변하는 서구의 질서에 혐오를 느꼈고, 이의 대안으로 아프리카를 꿈꿨다. 아직은 부르주아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이하 계급’(sottoproletariato), 곧 농민과 같은 조직되지 않은 최하층계급에서 가능하다고 봤고, 그 가능성의 공간이 아프리카이길 기대했다.
그런데 파졸리니는 막상 아프리카에서 촬영하며 극심한 동요를 느꼈다. 아프리카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 독재, 인종청소 때문에 지옥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고, 기회가 된다면 다들 유럽으로 떠나려 했다. 순수한 원시의 질서에서 새싹을 찾으려던 파졸리니의 열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만나고 말았다.
이 다큐멘터리가 한 영화감독의 정치적 전기에 머물지 않고 비극의 궁극적인 순수함에 이르는 것은 파졸리니의 그런 절망을 예수의 그것과 설핏 비교하는 대목에서다. 접근은 파졸리니의 데뷔작 <아카토네>(1961)를 통해서다. 도둑인 아카토네는 태어나서 한순간도 기존 질서에 포함되지 못한 천한 남자인데, 파졸리니는 그를 ‘프롤레타리아 이하 계급’의 상징으로 표현하며, 그의 죽음에 감히 예수의 죽음에서 느낀 ‘희생’의 테마를 그려놓았다. 아카토네와 예수, 두 청년에게서 파졸리니는 계급의 유사성을 봤고, 그들의 죽음은 모두 기성(부르주아) 질서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예언: 파졸리니의 아프리카>의 감독 멘두니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반복하여 아프리카를 찾아가는 파졸리니의 모습에, 특히 그의 죽음에, 예수의 비극적 테마를 슬쩍 깔아놓는다. 말하자면 파졸리니, 그의 캐릭터 아카토네, 그리고 예수는 모두 유사한 계급 출신이고, 죽음의 의미에선 ‘희생’이라는 테마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예언: 파졸리니의 아프리카>는 마르크시스트 파졸리니가 전 생애를 통해 자신의 슈퍼에고로 예수를 얼마나 통렬하게 의식하며 살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베르톨루치가 말하는 베르톨루치>는 <아이 엠 러브>(2009)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만든 다큐멘터리다. 데뷔작 <냉혹한 학살자>(1962)부터 최근작 <미 앤 유>(2012)까지의 작품들을 일별한다. 베르톨루치는 파졸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파졸리니가 지시한 클로즈업을 찍으며, ‘세계 영화사의 클로즈업’을 찍었다고 회고할 정도이니, 그에게 파졸리니는 영화사의 한 정점이다. 21살에 감독이 된 영재 베르톨루치는 파졸리니의 조감독 시절부터 시작하여,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스캔들, <마지막 황제>(1987)의 흥행 성공 등 영화적 역정을 회고한다. 그의 회고는 자신의 전기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좌파 지식인이 기억한 20세기 후반부 이탈리아영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로셀리니, 안토니오니, 파졸리니, 펠리니, 그리고 베르톨루치의 우상인 르누아르, 고다르 등이 역사 속으로 불려나온다.
<신화 속의 여인: 할리우드의 안나 마냐니>는 <무방비 도시>의 배우이자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상징인 안나 마냐니의 미국에서의 경력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특히 테네시 윌리엄스와의 관계가 이 작품의 모티브인데, 윌리엄스는 오직 마냐니를 위해 희곡 <장미 문신>을 썼다. 그런데 마냐니는 영어 대사가 어려워 연극 공연은 거절했고, 나중에 영화에는 출연했는데, 이 작품 덕분에 외국인 배우로는 드물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복원된 극영화로는 로셀리니의 <파이자>(1946), 그리고 1960, 70년대 이탈리아 정치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인 프란체스코 로시의 <도시 위에 군림하는 손>(1963), 엘리오 페트리의 <사적 소유는 절도가 아니다>(1973), 다미아노 다미아니의 <장군에게 총알을>(1966) 등이 소개된다. 세 작품 모두 당대 유럽의 흥분된 사회적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
경쟁부문 작품은 세편 상영된다. 올해 황금사자상을 받은 지안프란코 로시의 <성스러운 도로>는 로마 외곽을 마치 토성의 띠처럼 둘러싸고 있는 고속도로 주변을 찍은 다큐멘터리다. 로시는 2010년 멕시코의 마약 범죄집단에서 20년간 일했던 실제 킬러와 인터뷰를 한 <164호실의 킬러>라는 다큐멘터리로 베니스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이번에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최근 세계 영화제의 공통된 테마이기도 한데, 신자유주의 이후 지옥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에세이 같은 작품이다. 감독은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참조했다고 밝혔는데,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가 타타르 제국의 쿠빌라이 칸 앞에 앉아, 자신의 수많은 도시 경험을 들려주듯, 로마 ‘변두리’의 지리학을 펼쳐놓고 있다.
노장 잔니 아멜리오의 <용감무쌍>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중년 노동자의 이야기다. 그는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도 못 된, 말하자면 이들의 ‘땜빵’ 노동자다. 이를테면 공사판 노동자가 갑자기 쉬어야 한다면, 그날만 그를 대신하여 임시로 일하는 식이다. 극심한 실업 문제, 도시의 빈민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최근의 사회파 감독들이 즐겨 다루는 테마들이 그려져 있다. 패션의 도시, 문화의 도시 밀라노가 배경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도시’와는 한참 다른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팔레르모의 전투>는 연극계의 중견 감독 에마 단테의 영화감독 데뷔작이다.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페미니즘 테마와 관련해 꾸준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단테답게, 여성들 사이의 우정, 여성들 사이의 결투, 그리고 그런 갈등을 낳은 시칠리아 사회의 부조리가 코미디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좁은 길에서 서로 비켜주지 않으려고 두 여성 운전자가 하루 종일 차에서 버티고 있는 장면은 이탈리아 정치의 파멸적인 양극성을, 아니 세계 정치의 투쟁적 양극성을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신인들의 등용문인 ‘오리종티’ 부문의 두 작품은 ‘주변인들’의 스산한 삶을 그린다. <첫눈>은 아프리카에서 탈출한 불법이주민이 흰 눈에 덮인 북부 이탈리아에서 마치 검은 점처럼 고립된 삶을 헤쳐가는 과정을, 그리고 <작은 국가>는 이탈리아 ‘잉여’ 처녀들의 시행착오를 다루고 있다.
‘베니스 인 서울’은 겨울처럼 스산한 현대 세계의 부조리한 풍경과 찬란했던, 그러나 사라진 영화의 역사를 동시에 펼쳐놓는다. 어느 쪽을 볼지는 당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