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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움에 갈채를!
2001-03-08

오!컬트 <타임머신>

제가 처음 본 조지 팔의 영화는 <엄지동이 톰>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연도는 생각나지 않지만 굉장히 어렸을 때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유치원 다니기 전이었을지도 몰라요. 영화의 줄거리도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기억나는 것은 사람 손바닥 위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러스 탬블린의 작은 모습이 정말로 경이로웠다는 것입니다.

정작 팔의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틴에이저 때는 그의 영화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슬슬 영화와 SF 장르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건방져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전 그의 촌스러운 특수효과를 비웃었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아, 그것도 또 나이가 드니까 변합니다. 이런 순진무구한 영화들이 희소가치를 띠게 되고 또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자잘한 단점들이 오히려 재미있어지니까요. 예전에는 우주선 가장자리에 블루스크린 터치 때 남는 까만 선만 나와도 짜증이 났지만, 요샌 80년대 SF영화에 나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괴물들을 보면 가슴이 쿵쿵 뜁니다. 며칠 전에도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그런 괴물을 보았는데 정말 반가웠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무슨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가요? 맞아요, 조지 팔의 <타임머신>이었습니다. 이 영화 역시 제가 틴에이저 때 야유를 퍼부어가며 보았던 영화였지요.

당시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당시 열성적인 허버트 조지 웰스 팬이었으니까요. 원작소설에 있던 그 아름답고 압도적인 비전에 혹해 있던 저라, 조지 팔이 50년대 만화풍으로 재현해낸 소설에 만족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어요. 우선 팔이 만들어낸 전 엘로이 족과 몰록 족이 전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무옷을 입고 어기적거리는 몰록 족은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벙거지 가발을 뒤집어쓰고 유창한 영어를 지껄여대는 엘로이 족들은 정말 깼어요. 제가 맘속으로 그리고 있던 요정 같은 존재들은 절대로 아니었지요.

웰스 역시 조지 팔의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특히 종교 묘사에서는요. 팔은 웰스의 소설 속에 종종 드러나는 종교에 대한 냉소주의를 싹 지우고 대신 엄청나게 기독교적인 메시지로 채웠습니다. 팔이 제작한 <우주전쟁>을 보세요. 미친 목사는 싹 사라지고 박테리아는 신의 구원이 됩니다. <타임머신>은 좀 덜하지만 주인공이 미래로 가져간 책들 중 한권이 성경책이었음은 분명해요.

그러나 냉소주의는 여기서 그만. 요새 <타임머신>을 다시 보면 이런 단점들은 용서가 되니까 말입니다. 웰스의 원작에 충실하지 않지만 팔의 <타임머신>은 정말 귀여운 영화입니다. 그 귀여움이 어딘지 모르게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린 기린 그림의 귀여움과 닮아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전 이 영화의 타임머신 디자인을 좋아하고 계속 옷을 바꾸어 입는 마네킹(참 명도 긴 마네킹이지요!), 반짝거리는 알루미늄옷을 입고 돌아다니던 근미래 사람들의 촌스런 이미지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타임머신>이 리메이크되고 있습니다. 각본 평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물론 조지 팔의 버전보다는 세련된 영화여야겠지요. 아무리 귀여워도 팔식 영화는 하나로 족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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