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홍상수를 말해주십시오. 홍상수 감독과 영화를 함께한 배우와 스탭,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한국의 유명 감독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배우들에게는 몇개의 문항으로 물었다. 그들이 그렇게 성심성의껏 답해줄지 몰랐다. 추억이 배어 있고 유머러스함이 넘친다. 그 대답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돈이 아니라 일하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감동적이다. 뒤이어 스탭들은 현장에서 언제 어떤 연출의 마술이 일어나는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감독들은 존중과 애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홍상수 파이팅!
※온라인에는 배우편만 게재됩니다. 다른 글이 궁금하신 분들은 <씨네21> 752호(홍상수 에디션)을 참고하세요.
공통문항 1. 캐릭터 한줄 소개 2. 내가 사랑하는 나의 대사 3. 잊지 못할 그 순간 4. 이 말 (홍상수에게) 꼭 하고 싶었다
고현정: 아침 9시, 대본을 기다리는 순간
1.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중래(김승우)와 밀고 당기기 하는 성격의 시원시원한 여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고순은 제주도에 사는 화백 양천수의 아내이자 구경남(김태우)을 연모했던 후배로, 제주도에 온 구경남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면 안된다고 바른 말하는 여자다.
2.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마지막 장면인데 바닷가에서 “사람 마음 얻기가 참 쉽지 않죠. 아는 만큼만 아는 척하세요”라고 했던 대사가 참 기억에 남는다. 다른 대사들에 비해 쉬웠다고 해야 하나. 그 대사는 설명적이기도 했고 친절했다.
3. 아침 9시면 다 같이 모여 대본을 기다린다. 그렇게 스탠바이하면서 따끈한 대사를 기다릴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술은… 홍 감독님 영화 촬영 과정에서 중요한 일부분인 것 같지만 사실 감독님이 원하는 걸 (배우가) 잘할 수 있으면 술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감독님은 사람들이 필요없는 얘기를 할 때, 진짜 생각을 얘기하지 않을 때, 핵심을 뚫지 못했을 때 술을 마시라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절실하게 질문할 게 있고 궁금하거나 답이 듣고 싶은 부분이 있을 때는 술을 피하신다.
4. 유머를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작품이 너무 어려워지고 심각해지면 나 같은 사람은 영화 보면서 웃지 못할 테니까. 나 같은 사람도 영화 보고 많이 웃을 수 있도록 같이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가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김상경: 괴물은 되지 말고, 소주나 많이 마셔요
1. <생활의 발견>의 경수는 연극계에선 꽤 알려졌지만 영화쪽에선 영 신통치 않은 배우, <극장전>의 김동수는 10년째 감독 데뷔만 준비하다 어느 날 배우 영실(엄지원)을 만나 작업 거는 남자, <하하하>의 영화감독 조문경은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고 내려간 통영에서 왕성옥(문소리)을 만나고 로맨스를 키우는 영화감독이다.
2. 내가 한 대사는 아니지만 <생활의 발견> 중, 첫 부분에 개런티 받으러 온 경수에게 사장이 하는 말 “우리 사람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와 <극장전>의 마지막 장면 내레이션에서 “그래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하면 담배…”를 좋아한다. 두 대사 모두 특이한데다 그 장면에 딱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대사다. 그래서 재밌다.
3. 수많은 우연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생활의 발견> 찍을 때, 대구 막창집에서 마지막에 불이 크게 올라온 것이 생각난다. 또 <하하하> 촬영 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홍 감독님과 준상이 형과 아침에 소주 한잔 하고 헤어졌던 일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4. 지금까지 새로운 영화 , 새로운 작업 시스템 만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꼭꼭 건강 조심하시길!! 그래야 우리끼리 소주도 많이 마실 수 있잖아요.
김승우: 신두리에서 재미나게 놀았다
1.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문숙(고현정)과 하룻밤을 보내지만 아침이 되자 겁도 나고 다른 여자가 더 예뻐 보이기도 하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남자다.
2.“우리는 실체를 보지 못하고 이미지를 보게 돼.” 고현정씨와 해변에서 치열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중래가 하는 대사다. 그 신 자체가 너무 예뻤다. 전형적으로 핑계를 대고 있는 남자와 정말 몰라서 남자의 말을 믿는 여자가 예쁘더라.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중래는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려고 하고. (웃음)
3. 이전에 했던 작품들과 달리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시나리오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촬영 전 시놉시스를 함께 읽으면서 감독님이 “이번에는 서정적일 것 같다”고 하셔서 소풍 가는 기분으로 촬영하러 갔다. 배경도 바다고. 촬영지인 신두리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는데, 그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달 반 동안 재미나게 놀았다. 술도 잘 못하시는데 촬영하면서 많이 마셨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당시 감독님께서 몸이 안 좋을 때였다. 그래서 주로 백세주를 마셨다. 하루 세끼 함께 밥 먹고 술 먹고 하면서 나오는 말이 다음날 대사로 나오는 게 신기했다.
4.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2~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놀고 싶을 때 함께 놀고, 술 마시고 싶을 때 함께 술잔도 나누었다. 그런데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요즘 연락을 못 드려서 미안하다. 보고 싶다. 감독님은 만나면 상대방을 되게 유쾌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고 꿋꿋하게 타협하지 말고 예쁘게 잘 찍었으면 좋겠다.
김영호: 촬영하면서 두 번 기절했었지
1. <밤과낮>의 성남은 대마초를 피우다 들켜 파리로 도피하는 화가로, 한국에 있는 아내를 두고 파리에서 미술학도 유정(박은혜)과 연애를 하는 남자다. <하하하>의 김영호는 성웅 이순신으로 깜짝 등장한다.
2. “좋은 것만 봐라.” <하하하>에 나오는 대사인데 평소에 내가 한 말을 감독님이 똑같이 썼더라. 영화도 즐겁고 재밌는 것 보고, 음악도 밝고 신나는 것 듣고, 좋은 데만 가라고 내가 감독님에게도 했던 말이다.
3. 아마 홍상수 감독과 함께 작업한 배우 중 내가 제일 술을 못하지 않을까. 맥주 두잔밖에 못 마신다. <밤과낮> 촬영할 때 박은혜씨와 식당에 앉아서 ‘미술을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대사를 주고받던 장면이었다. 촬영하며 술을 마셨고 ‘OK’하는 순간 내가 기절했다더라. 나는 기억이 전혀 없었고 OK한 줄도 몰라서 다음날 감독님한테 ‘만취해서 촬영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OK했다고. <밤과낮> 첫날, 첫신 공항장면 찍으면서 담배 40개비 피웠던 것도 기억난다. 그때도 다 찍고 기절했었지. <밤과낮> 전까지 5년간 담배도 끊은 상태였는데.
4.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우시고 그렇다고 특별히 운동을 많이 하시는 것도 아니고. 감독님이 건강해야지 좋아하는 영화 많이 볼 수 있잖나.
김태우: 이거 지문이죠? 아니 대사야
1.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헌준은 선화(성현아)의 첫사랑이자 문호(유지태)의 선배인데, 7년 만에 선화를 만나러 가서 문호와 경쟁하는 이상한 남자다. <해변의 여인>의 원창욱은 영화감독 중래(김승우)에게 자신의 여자친구 문숙(고현정)을 소개시켜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는 남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구경남은 제천과 제주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과거의 지인들을 만나 이것저것 세상을 구경하는 영화감독이다.
2.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꿈속 장면이다. 공형진씨가 죽은 줄 알고 부인인 (정)유미가 울고 있는데 내가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불쌍한 여자”라고 한다. 불쌍한 여자라니… 감독님이 잘 못 쓴 줄 알았다. 웬만하면 토 안 다는데 감독님한테 물었다. “이거 지문이죠?” “대사야.” “이걸 어떻게 해요?” “그냥 알아서.” (웃음) 그 장면 찍으면서 감독님도, 편집기사님도 웃으면서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3. <해변의 여인> 장면 중에 횟집 앞에서 미친놈처럼 “감독님, 감독님” 하고 부르면서 (김)승우 형 쫓아가서 “사과하세요, 사과하셔야 해요” 그러는 장면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서 연결되는 거였다. 해질 무렵이라 신 연결이 걱정됐지만 촬영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감독님이 다시 찍어야 한다는 거다. 난 다른 일정이 있어서 빨리 촬영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감독님의 말대로 다시 찍게 됐다. 마음이 조급했고 어제의 느낌과 호흡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모퉁이에서 감독님이 쓱 나타났다. 한손에는 소주를, 다른 한손에는 김치를 들고 있더라. “태우야, 이거 한잔 쭉 들이켜고 시작하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4. 감독님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이 그렇게 좋지는 않으시다. 감독님의 팬으로서 작품을 오랫동안 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건강하셔야 하지 않겠나.
문성근: 술 마시다 잠들어버렸네
1. <오! 수정>의 영수는 수정(고 이은주)과 함께 일하는 무능한 중년 케이블TV PD다. <해변의 여인>의 영화사 정 대표는 영화감독 중래(김승우)에게 전화하는 목소리로만 잠깐 등장한다. <첩첩산중>의 상옥은 미숙(정유미)의 스승이자 옛 애인으로, 미숙의 친구 진영(김진경)과도 관계를 가진 뻔뻔한 남자다.
2. <오! 수정>에서 영수(문성근)가 수정(고 이은주)과 여관에서 섹스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한마디 한다. “빤스는 벗긴 거다.” 이게 압권이지. 그러니까 섹스는 실패했지만 ‘일부러 안 한 거다’라고 말함으로써 수컷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지. 가장 홍상수의 인물 냄새가 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촬영이었던 것 같은데, 썩 유쾌한 촬영은 아니었다. 이런 장면은 여배우의 심리, 상태가 민감해지니까. 배우니까 했지.
3. 친구의 집에 수정과 함께 가서 거실에서 술 마시는 장면. 정동에서 찍었던 것 같은데… 촬영할 때 그 양반(홍상수)은 실제로 술 마시면서 찍는 걸 좋아한다. 보통 배우 교과서나 철칙 같은 것을 보면 연기할 때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하지 않나. 그러면 그 양반은 “왜 교과서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반문하곤 했다. 어쨌든 술을 위스키 잔에 3분의 1쯤 따라 마시면서 찍는데, 테이크를 계속 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술에 넘어가게 됐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촬영하자며 누가 깨우더라. ‘이렇게 술 마셨는데 무슨 촬영이냐’며 신경질을 냈고. 결국 두 번째 깨울 때 일어났는데 촬영장임을 깨달았다. 내가 자는 동안 스탭들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더라.
4. 그런 건 없다. 술 마시면서 다 얘기하니까. 그 양반의 영화 속 인물들의 모순된 모습들, 동물적인 면모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니까. 술을 너무 많이 마시자고 하니까 그게 좀 힘들지. (웃음) 지난주에 <하하하>를 보고 나서 뒤풀이에 가지 못했다. 감기에 심하게 걸렸거든. 홍상수 감독이 술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못 가겠다고 얘기하니까 처음으로 그냥 놔두더라. 이제는 술로 붙잡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지….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 좋았다. 엄마(윤여정)가 사랑스러운 존재로 나오는데 굉장히 인상깊었다. 그간 그 친구 영화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없었거든.
문소리: 폭우 속에서 무슨 연기냐며 투털투털
1.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문소리는 잠깐 목소리 출연했다. <하하하>의 왕성옥은 통영의 관광해설가인데, 통영을 찾은 문경(김상경)과 애인 정호(김강우) 사이에서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되는 사투리가 귀여운 여자다.
2. <하하하>에서 “악! 나는 왜 이렇게 센 사람만 만나지?” 이 대사가 귀여운 것 같다. 실제로는 센 사람만 만난 것이 아니라 군대 면제받은 남자들만 만났다. (웃음) 또 “당신은 뭘 보면서 살아요?”라는 대사가 있다. 평범한 대사인 것 같지만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사다. 스스로에게 질문도 하게 되고.
3. 세병관에서 비 맞는 장면 찍을 때 큰 우산 세개가 부러질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스탭들 모두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감독님이 ‘그냥 찍어봐’ 그러셨다. 폭우 속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서 있었다. ‘어떻게 연기하겠다는 거지? 이 비를 맞고’ 그런 생각도 했지만 영화 속 내 표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우습고, 귀여웠다. 이게 홍상수 영화의 매력 아닐까?
4. 고맙다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서로 고마워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내 돈 써가며 한달을 지냈는데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고마운 일이다. 감독님은 나를 자유롭게 해준 사람이다. 또 내가 표현을 잘 못한다. 낯 부끄럽거나 진심이 섞인 말은 표현하기 힘들다. 남편한테는 잘하는데….
엄지원: 영화 찍다 주량 포텐셜이 터졌네
1. <극장전>의 최영실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감독의 후배(김상경)를 만나는 신비로운 여배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공현희는 영화제 심사위원 구경남(김태우) 감독을 안내하는 제천영화제 프로그래머다.
2. <극장전>에서 최영실(엄지원)이 병원에 입원한 감독을 후원하는 동창회에 가서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 최영실입니다”라고 인사하는 대사. 아무리 배우라도 어떻게 자기 입으로 배우라고 말할 수 있지? 완전 손발이 오그라들잖아. (웃음) 대본에 그렇게 하라고 나와 있기에 감독님께 가서 말했다. “정말 이렇게 말해야 돼요? 이건 정말 이상하잖아요.” 또, 동창 중 한명이 “영실씨, 드라마도 하셔야죠”라고 말하자 “저는 드라마라고 무시 안 해요”라고 대답하는 영실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내 모습이 아니라서 대사를 할 때 기분이 더 묘하달까.
3. 촬영할 때나 함께 술을 마실 때 모든 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원래 술을 잘 못 마셨다. 맥주나 와인 정도만 마셨다. 홍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오! 수정>에 나왔던 종로 피맛골의 고갈비집에 종종 가서 마시곤 했다. 마시면서 (주량에 대한) 포텐셜(가능성)을 발견했다! (웃음) 무엇보다 가장 잊지 못하는 건 역시 술자리 레퍼토리인 가위바위보 게임이 아닐까. 작업하면서 좋았던 것은 감독님이 이기적이고 독사 같은 면도 있지만 배우에게 주는 에너지가 굉장히 크다는 점이다. 그만큼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인정해준다.
4. 영화 오래 찍었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예지원: 내가 쓴 편지가 영화 속에
1. <생활의 발견>의 명숙은 춘천에 사는 무용가인데 영화 데뷔에 실패한 배우 김경수(김상경)에게 팬이라며 작업 거는 여자다. <하하하>의 연주는 유부남 중식(유준상)의 애인으로, 중식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여자다.
2.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 <생활의 발견>의 대사다. 촬영 전날 감독님이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써오라고 하셨다. 실제로 내가 쓴 편지가 영화에 들어갔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3. <생활의 발견> 때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남자와 헤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전날 울면 얼굴이 심하게 붓는 편인데, 그 장면 찍을 때 전날 울고 다음날 촬영에 임했다. 퉁퉁 부은 얼굴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여배우니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재밌었다. 주변 사람들과 관객이 공감해줘서 위로도 됐고. <하하하>의 마지막도 고속버스 장면인데 그것 참 신기하다. <하하하>는 촬영장에선 웃으면서 재밌게 찍었는데 기자 시사회 때는 영화 보고서 울었다. 내 역할이 참 슬픈 거였더라.
4. 좋은 영화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 감독님은 역할과 배우에 대한 열정이, 애정이 참 대단하시다. 좋은 추억 안겨주어서 감사드린다.
유준상: 전복에 소주 한잔, 캬아~
1.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고 국장은 구경남(김태우)의 학교 선배이자 제주영상위원회에서 일하는 질투심 많은 남자다. <하하하>의 중식은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지만 만날 웃기만 하는 남자로, 유부남이지만 애인 연주(예지원)를 사랑한다.
2. “엉까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나오는 대사인데 내가 쓰던 말이다. 학교에서 선배들이 후배에게 ‘엄살 무리지 마’, ‘엉기지 마’ 그런 뜻으로 쓰는 말이다. 감독님한테 그런 얘기를 했는데 역시나 다음날 대사에 “엉까지 마”가 있더라. <하하하>에선 예지원씨에게 “내 천사 새끼”라고 했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을 영화로 보고 나니 참 슬프더라.
3. <하하하> 찍을 때 계단에서 넘어지는 장면이 있다. 계속 NG가 났는데 급기야 실제로 계단에서 넘어지기까지 했다. 다음날 허리가 너무 아팠는데 감독님께서 ‘허리 많이 아프지. 한의원 가자’ 그러시더라. 영화에 침 맞는 장면도 그래서 찍은 거다.
4. “감독님, 전복에 소주 한잔이 그립습니다.” 통영에서 마지막 날 감독님과 김상경씨와 전복에 소주를 마셨는데 너무 맛있었다. 지금은 추억이다.
이선균: <슬램덩크> 안 선생님 같아요
1. <밤과낮>의 윤경수는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성남(김영호)을 초라하게 만드는 남자다운 남자다. <첩첩산중>의 명우는 상옥(문성근)에게 배신감을 느낀 미숙의 요청으로 전주에 내려오는 남자다.
2. 대사보다 장면이 기억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보통 드라마나 영화는 원래 대본이 있잖나. 촬영 전에 대사를 고민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나는 대사도 있는데 홍상수 감독님 영화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촬영 당일 아침에 대본이 나온다. 그래서 대사보다는 연기의 호흡을 살리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어쨌든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밤과낮>에서 성남과 팔씨름을 하는 장면이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의 팔씨름이라는 이데올로기만 느껴졌다. 그런데 찍고 나서 모니터로 보니까 생각지도 않은 호흡과 코믹함이 나와서 놀랐다. 찍기도 재미있게 찍었고.
3. 감독, 배우, 그리고 스탭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 이번에 문성근 선배님, 정유미와 함께 홍상수 감독님의 <옥희의 영화>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촬영감독, 동시녹음, 연출부, 그리고 제작부로 참여한 내 매니저까지 총 네명의 스탭만으로 말이다. 이동할 때도 모니터 차량, 장비 차량 두대로 이동했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처럼 배우나 각각의 스탭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는 식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님의 현장은 모두 하나되어 움직인다. 그런데 네명으로 찍으니까 힘드셨는지 “다음에는 2~3명 정도 더 필요할 것 같아”라고 말씀하시더라. (웃음) 그런 모습들이 만화 <슬램덩크>의 안 선생님 같았다. 인자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4. 이전의 감독님 작품들이 꿀꿀하고 우울했다면 요즘은 코믹하고 재미있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정말 궁금하다. 지금처럼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면 좋겠다. 가위바위보 오래 하려면 건강도 좀 챙기시고. (웃음)
정유미: 배추밭에서 시나리오 쓰는 감독님이라니
1.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유신은 부상용(공형진)의 아내인데, 집에 놀러온 남편의 절친 구경남(김태우)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여자다. <첩첩산중>의 미숙은 스승이자 옛 애인인 상옥(문성근)과 친구 진영(김진경)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하는 여자다.
2. 감독님 영화에서 내가 한 말들은 죄다 이상한 것밖에 없다. 술 먹고 이상한 얘기하거나 혼자 주절주절대거나. 내가 사랑하는 나의 대사는 솔직히 기억나는 게 없다. <첩첩산중>에서도 술 먹고 폭풍처럼 찍었고. (웃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에 고현정 선배님이 하신 대사 중에서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래요? 아는 만큼 말하세요”라는 대사도 좋았고.
3. 감독님과 처음 같이 작업한다고 했을 때 ‘시나리오를 아침에 주신다는데 정말일까?’ 싶었다. 그런데 진짜 아침에 주시더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내 첫 촬영이 제천 집 마당에서의 신이었는데 감독님이 그날 아침 배추밭 앞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계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고 인상적이던지.
4. 건강 잘 지키셨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그것 말고는 할 얘기가 없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감독님 직접 만나서 할 거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