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주변의 환경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이 땅에 남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들의 자취를 찍고 싶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남겨진 분위기를 반영하려고 합니다. 사진이 가진 역사성이라는 힘이야말로 사진을 회화 드로잉, 조각 등과 비교할 때 리얼리티에 가까이 있게 만들어주는 차이점입니다.”
아마도 현존하는 사진작가 중 ‘남겨진 흔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마이클 케나를 고를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꾸준히 풍경 속의 여백을 관찰하는 사진가이며 단순함과 어슴푸레함을 자신의 미적 구도로 삼고 있다는 흔적을 고집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전부터 그에게 관심을 가져왔다. 언젠가 어떤 인터뷰 중 존 레논의 노래 한 구절을 빌려 ‘삶이란 당신이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고 바쁠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Life is what happens when you are busy making other plans’)라고 그가 고백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영국의 소도시 랭커셔의 위드네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 런던 판화대학에서 판화와 사진을 전공한 뒤 집중적으로 고향의 풍경인 잉글랜드 북서부 산업지대를 묘사한 사진작가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케나는 특유의 관찰력으로 80년대 산업화된 풍경의 이면을 통해 자신만의 황량한 시선을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랫클리프 온 소어 (RATCLIFFE-ON-SOAR)발전소의 탑 시리즈나 고향 근처의 노팅엄셔(Nottinghamshire)의 사진들에서 그의 사진들은 온통 잿빛투성이다. 잉글랜드 북서부의 풍경에서 그가 천착한 안개와 잿빛이 보여주는 분위기는 쓸쓸함을 넘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흑백의 단순성과 여백
이 천재적인 사진작가의 마법에 걸려들면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아이러니가 하나 있는데 어떤 풍경이나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는 사진 속에 어딘가 비어 있는 황량함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곳을 풍성하게 만들어버리는 정서적 역설(우리의 시선으로 하여금 조금씩 이상한 이미지의 화학을 발생시키면서)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동시대 어떤 사진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케나의 사진이 제공하는 매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막이가 줄지어 설치된 프랑스 칼레의 해변이나 거대한 풍차가 늘어서 있는 스페인의 캄포 디 크립타나, 프랑스 생나제르의 바다와 함께 어슴푸레 멀리 서 있는 등대들을 보면서 그의 단순함과 여백, 황량함에 대한 충격을 맛보지 못했다면 그의 사진 속에서 로맨틱만을 챙겨간 탓이라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저명한 런던의 큐레이터 앤 W. 터커(Ane W. tucker)는 케나는 의식적으로 유행하는 예술사조에서 비켜나 있는 것을 즐긴다(케나의 사진집 서문-레트로스펙티브 투(Retrospective Two)고 말한다. 실제로 디지털, 포스트 모더니즘, 테크노 아트가 성행하던 90년대부터 일관적으로 전통적인 사진방식을 고집한 터너는 ‘사진과 실제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괴하는’ 그러한 기술론들을 배반해왔다. 이후(그가 꽤 알려지고 난 다음의 일이지만) 그가 작업한 BMW, 아우디, 사브, 볼보 등의 자동차 광고사진에서도 그는 기계를 하나의 자연의 연장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언제나 감각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감각을 지우는 작업에 골몰하는 자의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여백과 단순성을 작품의 세계에 투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에겐 그것은 고혹적인 고집이거나 위험한 균형으로 비칠 확률도 크다. 비교적 후반의 그의 작업들만 비추어본다면 그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감각’의 영역임에 틀림없지만 그러한 그의 감각을 진화시켜왔던 고집은 ‘광고적 계산’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본질에 대해 물어왔던, 그 영감과 시각에 대한 자신의 예측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가 생각하는 리얼리티는 여백을 보장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마이클 케나가 보여주는 일종의 복화술이다.
그는 늘 여행을 떠난다
복화술은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말을 감추는 자의 입술이다. 복화술은 입술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말이 흘러나오는 실재이며 말이 귀에 들리면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복화술은 화술이면서 동시에 화술의 너머에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복화술은 마법이 아니라 실재라는 점이며 인간의 영역에서 복화술은 침묵과 말의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흔적이다. 마이클 케나는 자신이 유년 시절부터 보아왔던 한없이 단순한 풍경에 덧칠되어가는 산업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 흑백의 단순성과 여백을 선택했다. 예술이란 늘 현재의 풍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건너가게 하면서 본래의 ‘이름’을 복원하고자 하는 자들의 작업임에 착안한다면 그가 선택한 흑백과 여백은 어떤 시적 정감에 분명 닿아 있다.
“어떤 일 또는 사람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물론 계획을 세울 수는 있겠지만, 우리 앞에 놓인 일에 충분히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런 것이야말로 창조의 영역과 가장 근접한 생각이 아닐까요? a에서 b로 넘어간다는 식으로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매달려 밀어붙이면 목표에는 도달하겠지만 훨씬 흥미로운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길을 예측하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국의 미술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는 말한다. ‘우리 작가들이 죽음의 서기들인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짧은 삶 속에서 이 렌즈들을 연마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마이클 케나의 사진 속에서 빈 풍경을 발견하고 어떤 허무를 목격했다면 그건 우리의 삶이 언제나 어떤 ‘한때’에 분명 닿아 있지만 그 ‘한때’가 항상 어떤 허랑함을 품고 있는 것을 동시에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마이클 케나의 복화술이 지닌 이중구조가 드러난다. 때로 무엇인가를 목격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마이클 케나는 자신의 사진을 통해 보여준다. 풍경은 계획을 품고 세계를 견디기보다는 흐름을 품고 단순해져가기로 하는 자연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케나는 숨어 있는 풍경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의 흔적을 더욱 감추고 인간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풍경을 여행하고 있는 여백을 더욱 내세운다. 그것은 빛과 그늘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언어이다. 마이클 케나는 그 언어를 쓴다. 그는 늘 어슴푸레한 빛과 그늘을 사용해 인간의 시선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한다.
기계화와 계획에 숨막혀하는 세계 속에서 마이클 케나가 근래에 더욱 환영받는 이유를 한 가지만 더 뽑으라면 그가 자신의 작업에 내세우는 주제에 대한 확신이나 그가 선택한 작업의 질료인 흑백의 단순성과 여백보다 그가 늘 여행 중에 있다는 ‘삶의 사실’에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그는 여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작업을 늘 예측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진 속으로 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 중 누군가의 자취를 꼭 남긴다. 그때 가서야 사람들은 그가 ‘삶이란 누군가의 혹은 어떤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