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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오, 자유로운 상상력

단편 프로젝트 <사사건건> 중 조성희의 <남매의 집>의 독창성에 놀라다

<남매의 집>

얼마 전 개봉한 <사사건건>은 네편의 단편영화를 모은 작품이다. 이중 조성희의 <남매의 집>은 지난해 공개된 단편영화 가운데 가장 유명세를 탄 영화일 것이다. 칸에서도 상을 받았고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도 대상을 받았다. 상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최근에 개인적으로 이만큼 독창적이라고 생각한 단편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새로운 상상력을 지닌 감독이 출현한 건 아닌가, 영화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해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재능과는 질적 유형이 다른 직관을 감독이 갖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이 칼럼에서 인용한, 계간 <독립영화>에 기고한 유운성의 글에서 암시한 대로 사회적 알레고리로 치환될 수 없는 세대의 상상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감독이 <남매의 집>의 조성희가 아닌가 한다.

단순한 이야기 안에 증폭되는 미스터리

<남매의 집>의 내용은 단순하다. 어린 남매가 살고 있는 집에 정체불명의 괴한 세명이 들어와서 벌어지는 공포스런 상황을 담고 있다. 어린 남매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으며 아빠는 멀리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 남매 중 오빠가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빠는 보습 선생님이 올 때까지 열심히 교재를 공부하고 있으라고 아들에게 이른다. 누추한 반지하방에 사는 아이들의 행색이 지나치게 추레해서 좀 못사는 집 아이들인가보다 하고 여길 수밖에 없는, 관객이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현실에서 일어날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남매 중 오빠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낯선 이들의 발을 보는 것을 전조로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겁을 먹은 남매를 간단히 속여 문을 열게 하고는 성인 남자 세 사람이 남매의 집에 들이닥친다. 그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모양으로 공손하게 자신들의 보스와 통화도 하면서 될 수 있으면 좋게 여자아이를 데려가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예의바르지만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남매 중 오빠의 보습교재를 펼쳐놓고 초보 산수를 아주 힘겹게 풀고 있으며, 눈빛을 희번덕거리는 또 다른 남자는 남매 중 여동생을 두고 은근히 성희롱을 한다. 남자들 가운데 가장 어리버리하게 보이는 또 다른 남자는 소심해서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일 듯이 굴다가 자꾸 앵앵거리는 앵무새를 단숨에 죽여버려 남매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시제는 현재로 되어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남매의 집>은 SF 분위기를 띠기도 한다. 세상에 드러내놓고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은밀한 통제 메커니즘을 가동시키는 가까운 미래사회의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아직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린 남매의 시점으로 본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공포스럽다. 아이들은 오로지 충격에 사로잡혀 있을 뿐인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오빠의 반항도 아주 허무하게 제압당해버린다. 어릴 적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에서 동네 양아치들에게 린치당하고 돈을 뜯길 때처럼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이 상황의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지만 수수께끼 같은 남자들의 행동은 어린 남매의 시선으로 접수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감독 조성희는 이 상황을 인물의 시선에 따른 매치컷으로 접수하기보다는 이 상황에 무심한 듯한 카메라의 제3의 시점으로 조율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관객을 끌고 간다. 초보 산수문제를 풀고 있는 무리의 두목을 뒷모습으로 보여주는 카메라 앵글 같은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숏과 숏이 연결될 때 지식과 정보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미스터리만 증폭되는 방식인데도 <남매의 집>은 관객의 짜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공포심을 생성시키고 자기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사회적 알레고리로 치환될 수 없는 무정형의 꼴로 제시한 이 영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어떤 집단 무의식과 접속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고도에 갇혀 있는 느낌, 어디에 구조요청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겉으로는 공손하게 다가오는 가해자들,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가해자들의 자의식없는 행동, 스스로는 멀쩡하다고 여기지만 이상증후를 드러내는 그들의 비정상적 양태들과 같은 것이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현재의 삶과 환유적으로 묶이는 상황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가해자들이 보여주는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더불어 자신들이 망가뜨린 것에 대해 언제든지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 신묘한 약에 대한 신뢰감이다. 그들은 자꾸 떠든다는 이유로 앵무새를 해머로 때려죽이는데 나중에 그 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투여하자 다시 새가 멀쩡히 살아난다. 여동생을 납치하려다가 반항하는 여동생의 오빠를 죽이려 들 때 그들이 보이는 태도도 앵무새를 죽일 때와 똑같다. 나중에 차에 공간이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그들이 납치한 여동생을 다시 데리고 와서 보여주는 일상적인 태도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상상할 수 없는 파괴가 이뤄지고 있는데 지극히 일상적인 톤으로 그 파괴가 전개된다는 것, 망가지면 언제든 재생할 수 있다는 태도도 자꾸 영화 속에 묘사된 상황을 현재의 삶과 환유적으로 묶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조성희의 상상력과 정반대로 대치되는 수용방식일 것이다. 어떤 기표로 가두고 싶은 수용자의 바람을 자꾸 미끄러져 빠져나가면서 조성희는 순수한 결정체에 가까운 원초적 감정의 덩어리로 영화 전체를 제시한다. 모진 상황을 겪고 난 뒤 영화 속의 남매는 성숙했다기보다는 확실히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어른스럽게 굴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다 실패한 오빠는 부엌에서 칼로 도마질을 할 때 훨씬 잔인해진 듯한 기질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잔혹한 상처를 입으면 인간은 성장한다기보다는 망가진다는 잔인한 가설을 제시하면서 <남매의 집>은 현재도, 미래도 아닌 애매한 시제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절대적인 공포감을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하고 있다.

거듭 영화를 생각해보면 궁극에는 이 영화 속에 재현된 모든 것이 일종의 꿈과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데 영화 초반에 나온 아빠와의 통화도 남매의 환청이나 환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명절이 지났는데도 한복을 입고 있는 여동생이나 이미 푼 보습교재를 되풀이해서 풀고 있는 오빠의 모습, 또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며 다시 풀고 있는 괴한의 모습이 일종의 악몽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초현실적인 부조리로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으면서 기표의 억압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출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조성희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짐승의 끝>이라는 장편영화를 찍고 있으며 지인을 통해 구해본 그 영화의 시나리오는 <남매의 집>에서 보여준 상상력의 단초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마 올해 나올 영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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