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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익사하기
2001-02-23

Djuna의 오!컬트 / <어비스>

이번 글은 밸런타인 데이 스페셜입니다. 카드와 캔디들이 우편 행낭 속에 묻혀 돌아다니는 시즌이 왔으니 저도 조금 거들어야죠. 오늘 고른 영화는 제가 제임스 카메론의 가장 로맨틱한 영화라고 생각하는 작품입니다. 아니, <타이타닉>은 아니에요. <타이타닉>은 너무 노골적인 연애담이어서 오히려 덜 로맨틱하게 보입니다. 진짜 로맨틱한 영화들은 그렇게까지 공식을 따르지 않는 법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티 하나없이 예쁜 선남선녀가 만나서 하는 연애담처럼 안 로맨틱한 것은 없답니다.

오늘 꺼낼 영화는 <어비스>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진짜 그랜드 로맨스는 <타이타닉>이 아니라 <어비스>입니다. <타이타닉>은 기껏해야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을 뿐이지만, <어비스>는 두종, 아니 두 세계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어비스>의 로맨스는 번개처럼 다가온 사랑으로 시작하는 단순하고 격렬한 러브스토리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외계인들은 모델이 되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에 나오는 외계인들과 조금 다릅니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외계인들은 유아 납치범과 협박범에서 서서히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로 변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어비스>의 외계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질 만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린지 브릭먼이 해저에서 처음으로 외계인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로미오가 줄리엣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단지 스케일이 더 크고 더 격렬할 뿐이죠. 이 아름다운 첫 만남 이후 린지 일행이 벌이는 모험담은 전형적인 연인들의 행동이고 영화는 완벽한 로맨스영화의 리듬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로맨틱한 느낌은 처음 개봉된 제작자판이 더 강합니다. 감독판은 노골적인 교훈 때문에 그런 느낌이 꽤 약화되었죠. 늘 생각하지만 카메론의 감독판들은 필요 이상으로 장황할 때가 많습니다. 아름다운 제3종 접근 목격을 제외하더라도, 이 영화에는 제가 아주 로맨틱하게 느끼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고장난 잠수정에서 린지와 버드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장면이죠. 산소는 모자라고 물은 계속 차옵니다. 그러자 린지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하나 제시합니다. 잠수복을 입은 버드가 린지를 끌고 나오는 거죠. 물론 이렇게 되면 린지는 저체온증과 익사로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적어도 살아남을 기회는 잡게 됩니다.

이 장면에 제가 쉽게 매료되는 이유는 이 모든 과정이 지극히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린지의 해결책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으로 괜히 남자 앞에 뛰어들어 대신 총 맞고 죽는 한심한 여자들의 감상적인 희생과는 거리가 멀죠. 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간결한 이성적 해결책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로맨틱한 긴장감이 발생합니다. 원래부터 감정만 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정말로 그 감정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그냥 자아도취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비스>의 관객은 린지와 버드의 두려움과 사랑의 감정을 확인할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투박한 엔지니어 부부의 연애담에 제가 늘 감동하는 이유도 그들의 감정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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