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앓으셨던 옆집 용이네 아줌마가 오늘은 봄볕을 한몸에 받으며 감자를 심고 계신다. 초등학교 문턱도 안 밟아보셨지만 살아 있는 식물도감으로 지난봄 무지하기 짝이 없는 나를 진정한 나물의 세계로 인도해주신 분. 내가 진심으로 우러나서 “교수님”으로 모시는 분이다. 아욱나물, 박보재나물까지 안다고 잘난 체할 수 있는 것이 다 이분 덕이다. 엄동설한에 몇번이고 병원 신세를 진 교수님에게 봄기운 실컷 드시라고 엊그제 냉이랑 지칭개를 캐다드렸더니 그렇게나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원추리도 좀 끊어다드리고 뽕나무 새순이 올라오면 연한 뽕잎도 한 봉지 따다드려야지. 나물 중에 뽕잎나물처럼 맛이 순하고 고소한 것도 드물다.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다.” 흔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 흔한 것이 귀한 것이라면 귀한 것은 구하기 쉬운 곳에 있을 것이다. 바로 진리(truth)처럼 말이다. 멀더나 스컬리 요원은 진실이 저 너머에 있다고 믿을지 몰라도, 사실 진실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닫기가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다”고 말씀하신 거다. 눈을 떠도 보지 못하고 귀를 달고 있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는 개뿔, 하고 시니컬해지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호소하신 거다.
지상에서 1만4천년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는 한 젊은이에 대한 영화를 보셨는지 모르겠다. <Man from Earth>라는 제목의 이 영화를 윗말 사는 목수한테 보라고 권했더니, 뒷날 놀러와서 엄지를 치켜세우며, ‘쵝오’를 연발했다. 우리보다 1년 먼저 이곳에 터잡았다고 제법 고참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젊은 목수 부부는, 1년 농사 매출의 절반을 투자한 중고 프로젝터를 비좁은 방 벽에 걸어놓고 난 뒤부터 고작 컴퓨터 화면으로 영화를 보는 우리를 늘 가여운 눈으로 본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많은 이 영화에 윗말 목수가 꽂힌 이유는 엉뚱하게도, 기독교를 까뭉갰다는 것이다(주인공의 대사 속에 그렇게 해석할 만한 대목이 나오긴 한다). 깡마른 털보 목수가 다큐 <Zeitgeist>에 열광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1편 도입부가 바로 “교회, 니들은 왜 그렇게 돈을 밝히는데?”라는 의문을 현란한 편집술로 강조한 탓이다. NGO에서 환경생태운동을 하던 이들은 철저하게 ‘반종교적’이다. 맛있게 술을 마시다가도 내가 흥이 올라서 진리니 뭐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만 하면 바로 인상을 찌푸린다. 종교는 사기닷! 하고 주장하고 싶어 미치겠는 표정으로 말이다.
나의 경우, 종교라면 치를 떨던 시절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같은 구절들을 들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출렁이곤 했었다. 그 구절들이 다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목수 같은 젊은이들에게 진리는 종교가 아니라고, 종교라는 건 그냥 공허한 단어에 불과할 뿐이라고, 성인들의 후광을 파는 다단계 비즈니스가 존재할 뿐이라고, 예수님은 교회에 없고 부처님은 절에 없으며, 그분들이 계실 만한 곳은 오로지 우리 마음속일 뿐이라고 한두번 떠들어봤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볕은 너무 따사롭고, 나물들은 씩씩하게 올라오고 있으니 할렐루야,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