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명망있는 경극 가문에서 태어난 매란방(여명). 외모, 목소리, 몸짓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그는 경극계의 천재로서 스타로 성장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극을 향한 그의 욕심은 전통을 고수하는 스승과의 예기치 않은 갈등을 낳는다. 결국 시대와 재능이 탄생시킨 스타 매란방은 스승을 제치고 경극계의 일인자로 군림한다. 그러던 중 남장 전문배우 맹소동(장쯔이)을 만나면서 매란방은 경극에만 전념했던 배우로서의 자신이 아닌 사랑에 빠진 한 남자로서의 욕망을 깨닫는다. 그러나 경극을 위해 운명지워진 배우의 숙명 앞에서 그는 평범한 행복을 희생해야만 한다.
매란방은 중국 국민에게 스타나 배우 하나로 간단히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인물이 아니다. 중국 전통 예술 경극은 격랑의 세월을 함께해온 중국의 혼이고, 경극계의 일인자인 매란방은 그 혼을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패왕별희>로 중국 경극의 예술성을 알린 첸카이거는 그 세계의 중심축에 있는 ‘데이’를 뚝 떼어내 실제 인물인 매란방을 조명한다. <패왕별희>가 화려한 무대를 주축으로 한 ‘경극’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번엔 그 무대를 등지고 분장실, 혹은 더 깊숙한 뒤까지 뚫고 들어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이제 배우 궁극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한 남자에게로 옮아간다.
첸카이거가 소품과 같은 드라마 <투게더>를 연출했을 때 의아함이 들었고, 블록버스터 대작 <무극>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걸 목격해야 했을 때 일순 당혹감이 들었다면 <매란방>은 최근 그의 작품 중에서 그가 가장 ‘선택할 만한’ 작품임에 이견이 없어 보인다. 자신을 알린 <패왕별희>의 소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엉성한 CG로 점철된 <무극> 같은 모험작이 아닌 무대와 배경이 주는 고전적인 규모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지극히 안전하고 탄탄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적인’ 매란방을 보여주려는 그의 욕심은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감정의 작은 미동 하나도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패왕별희>의 ‘매란방’이 생생히 살아 있는 캐릭터였다면 무대 밖 여명의 ‘매란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로 존재하지 못한다. 모두에게 추앙받는 배우로서의 고뇌,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 인간적인 고뇌, 그 사이에서 여명의 매란방은 그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는다. 멜로배우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십분 차용한 여명의 매란방이 겪는 고뇌는 맥없이 흐르는 물줄기같이 나른하다. 물론 그런 수동적인 자세가 매란방의 삶이었다고 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폭풍같이 지나간 그의 사랑마저 애절한 감흥을 주지 못한 것은 이 영화의 드라마를 지지할 갈등요소가 그만큼 빠져 있다는 걸 입증한다. 화려한 명성에 견주어볼 때 첸카이거가 다시 스크린에 불러온 경극은 딱 그만큼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