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이동진: “<데쓰프루프>는 텍스트 자체도 중요하지만 컨텍스트가 정말 중요한 영화죠.” 김혜리: “(오직)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관객의 심리적 욕구에 봉사하기 위한 내러티브에요.”
이쓰루 난데요님(이동진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닥치고 극장사수님(김혜리 [email protected])이 입장하셨습니다.
이쓰루 난데요님의 말(이하 난데요) : 오늘 이야기 나눌 영화 세편 맞죠?
닥치고 극장사수님의 말(이하 닥극사): 예.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알랭 레네의 뮤지컬 <입술은 안돼요>, 그리고 김소영 감독의 <방황의 날들>입니다.
난데요: 그런데 오늘 우리 대화명은 해설없으면 절대 모르겠네요. ^^ 닥극사가 뭔가요?
닥극사: <데쓰 프루프>와 <입술은 안돼요>를 보면서 이 영화들은 반드시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보아야만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고 절감했거든요. 그래서 “닥치고 극장사수“의 준말로 정했습니다.
난데요: 헉, 정신이 번쩍나네요. 저는 <입술은 안돼요>라는 영화가 알랭 레네 것인 줄 모르고 전화로 제목부터 들었는데 <이쓰루 난데요>라는 제목의 일본영화인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보청기가 필요한 처지임을 자각도 할 겸. T-T
닥극사: 그 말씀 들으니 지금도 이따금 클레르 몽페랑 영화제, 카를로 비바리 영화제라고 틀리게 끊어 읽는 저의 습관이 떠오르는군요. -_-
난데요: 카를로 비바리는 무슨 제주도에서 열리는 영화제 같군요. ^^
닥극사: <데쓰 프루프>는 자동차를 살인 무기로 써서 성적 쾌감을 얻는 남자(커트 러셀)의 죄와 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특히 서울이라면 드림시네마 같은 연륜 깊은 극장에서 사람들과 발구르고 “우우!”“ 와!” 하면서 봐야 제 맛입니다.
난데요: 제가 <데쓰 프루프>를 본 극장에는 의자에 필기받침대가 달려 있어서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런 극장에선 알랭 레네의 <미국인 삼촌>이나 장 뤽 고다르의 <중국여인> 같은 영화를 보면 어울리겠더군요.
닥극사: 필기하면서 봐야 할 <불편한 진실>도 어울리겠군요. *.* 타란티노는 영화를 만들 때 관객의 관람 풍경까지 상상하며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난데요: 그렇습니다. <데쓰 프루프>는 텍스트 자체도 중요하지만 컨텍스트가 정말 중요한 영화죠. 뭐 <영구와 땡칠이>에 버금가는 인터랙티브 영화랄까…. ^^
닥극사: <데쓰 프루프>는 원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와 묶어 1970년대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전용관 이름을 딴 <그라인드 하우스>라는 제목의 동시상영영화로 미국에서 상영됐죠. 재미있게도 <킬 빌> 때는 한 영화가 두편으로 세포분열을 했는데, 이번에는 두 영화를 하나로 묶었네요.
난데요: 미국과 달리 애초 기획된 형식 그대로 즐길 수 없다는 점이 무척 안타깝죠. 무엇보다 두편 사이에 끼어든 4개의 가짜 예고편을 못 보는 게 제일 아쉬워요.
닥극사: <뜨거운 녀석들>의 에드거 라이트 작품도 있었다죠?
난데요: 그걸 제일 보고 싶었죠. 그런데 흥행을 생각하면 분리해서 배급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은 저도 들어요. 이 영화의 기획을 보면서 타란티노가 참여한 옴니버스영화 <포 룸>도 떠올랐어요. 정말 재미있게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생긴 것부터가 무지하게 장난기 많게 생겼잖아요? 번들거리는 이마를 보면 탁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요. ^^
닥극사: <데쓰 프루프>는 마치 타란티노가 1970년대 극장 먼지구덩이에서 찾아낸 것 같죠. 일부러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고 아무 이유없는 점프 컷에 흑백 필름이 끼어들기도 하고. 요컨대, 가짜 골동품입니다.
난데요: 감독들에게는 본인이 과거에 열광했던 작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려내고 싶은 욕망이 있나봐요.
닥극사: 비슷한 예로 디지털애니메이션으로 30, 40년대 영화 분위기를 낸 <월드 오브 투모로우>가 생각나네요.
난데요: 저는 50년대 더글러스 서크 멜로드라마 스타일을 따른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과 구스 반 산트의 히치콕 리메이크 <싸이코>도 떠올랐어요.
닥극사 ; 아하!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를 쿠엔틴 타란티노가 열렬히 지지하더군요. 뭔가 통하는 게죠!
난데요: 문학으로 치면, 그대로 베껴 써보는 필사의 쾌감이랄까.
닥극사: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통제하고 역사적 맥락과 배우만 달라졌을 때 발생하는 영화적 효과에 대한 실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난데요: 실험치고는 상당히 값비싼 실험이죠.
닥극사: 그것이 <싸이코>가 실망을 넘어 일부 관객으로부터 분노를 일으킨 이유였고요.
난데요: 넵. 저도 영화적 낭비라고 봤어요.
닥극사: <데쓰 프루프>도 비슷한 악평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팔자죠. “제발 장난 좀 그만쳐!” “재능이 튀냐!” 등등. <데쓰 프루프>의 줄거리는 더이상 간단할 수가 없어요. 여덟자로 말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네자로 말하면 “인과응보”죠. -..- 왜 예전에 노래 억지로 시키는데 절대 하기 싫으면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이러고 자리에 앉았잖아요? 이 영화의 플롯을 보고 있자니 그 노래가 문득 생각나더라고요.^_^
난데요: 학교에서 그런 애들 꼭 있었죠, 대부분 왕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타란티노도 왕따였을 거예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친절한 금자씨> 비슷한 느낌도 있더라고요. 절대 악당을 상정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관객을 대신해 실현시켜주는 거죠. 다만 다루는 방식은 반대예요. 복수의 도덕적 딜레마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질주만 하니까요.
닥극사: 여성의 복수극이긴 <킬 빌>도 마찬가지였죠. <데쓰 프루프>의 차별점은, 악인이 설치는 전반부와 반격당하는 후반부가, 같은 악당이 나온다는 점 외에 고리가 없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데쓰 프루프>의 내러티브는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관객의 심리적 욕구에 봉사할 뿐, 어떤 극중인물의 심리적 인과관계와도 무관해요. 그래서 역전극이 펼쳐지는 격투기를 구경하는 기분이었어요. 어느 대목이 가장 재미나셨습니까?
난데요: 물론 마지막 20분이죠. ^^사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다에 가까운 대사들은 뭐, 그냥 그랬어요. <씨네21> 김도훈 기자 기사를 보니 타란티노가 스스로 프레스턴 스터지스에 비견되는 대사를 쓴다고 말했다면서요? 세상에나!
닥극사: 타란티노는 대사를 쓸 때 법정 서기처럼, 머릿속에 들려오는 대사를 그냥 받아치는 식이래요.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면 “세상이 이걸 빨리 보고 놀라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나서 좌불안석이랍니다. ^^
난데요: 하긴 그런 도취가 없으면 예술 못하죠. 타란티노는 데뷔작의 첫 장면도 갱들의 음담패설성 긴 수다로 시작했으니, 그 자체가 그 사람의 한 핵심이겠죠.
닥극사: <데쓰 프루프>는 전반과 후반으로 나뉘고 그 각각의 부분이 다시 여자들의 수다와 자동차 추격전으로 구성돼 있죠. 말씀하신 대로 여자들의 수다는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마돈나에 대한 잡담에 비하면 재미가 달려요. 어느 순간에는 여자들의 입을 빌려 남자들의 대화를 하는 것도 같죠.
난데요: 일단 너무 길고 난삽해요. 킴이 왜 총을 가지고 다니느냐에 대한 재담 같은 건 재밌었지만요. 전 이 영화의 여자들이 ‘음경없는 마초’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닥극사: 그렇다면 <킬 빌>의 우마 서먼이나 <재키 브라운>의 팸 그리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셨나요?
난데요: 두 영화에서는 이 정도 인상까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닥극사: 아무래도 <데쓰 프루프>는 캐릭터를 이해할 바탕이 부족하게 주어진 소품이니까요. 그나저나 여배우들의 면면도 별나더군요. 알란 래드의 딸도 있고 시드니 포이티어의 딸도 있고 <다이하드4.0>의 존 맥클레인 딸로 나온 배우도 있고요.
난데요: <킬 빌>에서 우마 서먼 대역을 한 스턴트우먼도 나오죠. ^^
닥극사: 저는 <데쓰 프루프>의 ‘1부’와 ‘2부’ 사이 비무장지대와 같은 병원 시퀀스에서 많이 웃었어요. 스턴트맨 마이크가 낸 끔찍한 사고를 조사하러 온 무지 게을러 보이는 두명의 텍사스 경찰이 심한 사투리로 “뭐 이치를 따져보니 저놈이 죽일 놈 같긴 한데 (귀찮으니까) 한번만 더 그러면 잡지 뭐”라고 대화하는 장면. 게다가 촬영도 아주 귀찮은 투로 했더라고요. ^0^
난데요: 바로 그런 대사들이 비슷한 모티브를 다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와 이 영화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죠. 자동차 충돌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상심리를 지닌 인물이 나오지만 그 심리의 근저를 파고드는 일 따위엔 전혀 관심없다는 것을 그 장면에서 선언하잖아요.
닥극사: 흠, 어쩌면 영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동차 자체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마이크 뺨에 난 길쭉한 흉터는 꼭 자동차 사고로 난 것이 아니라 참치캔을 잘못 따다 벤 것 같더군요. -_-
난데요: 하긴 나초를 무지 게걸스럽게 먹더군요. 먹는 걸 접사로 보여주는 그 장면은 사운드 효과까지 거들어서 그가 얼마나 변태적 인물인지 설명하죠.
닥극사: 커트 러셀 참 욕봤어요. <이스트윅의 악녀들>에서 잭 니콜슨이 톡톡히 당한 이래 이런 망신이 또 있었나 싶더군요. 딱하기도 했지만, 커트 러셀이 분한 마이크가 잠든 여자의 벗은 발바닥을 만지는 장면은 근래 드물게 몸서리쳐지는 장면이었어요. -.-
난데요: 정말 생생하고 기분 나쁜 장면이더라고요. 이 영화는 여자의 하체에 대해서 거의 틴토 브라스처럼 집요하게 집중하더군요. 옷을 벗기지 않을 뿐이죠. 앞모습에는 관심이 없고 집요하게 엉덩이와 다리 라인의 뒷선에만 관심을 두더이다.
닥극사: 더듬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도 노골적이에요. 그런가 하면 후반부의 여성 전사 이미지도 노골적으로 전형적이고요.
난데요: 마지막 장면에서 세 여자가 마이크에게 걸어갈 때조차 다리만 뒤에서 집요하게 찍던데요.
닥극사: 리처드 세러피안의 영화 <배니싱 포인트>를 비롯해 <데쓰 프루프>의 인용은 수도 없지만, 복수의 추격전을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 두 여자의 대화는 <델마와 루이스>와 같더군요. “너도 내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고 있니?” ^.~
난데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강변하는 장면을 영화 속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넣는 사람도 타란티노 빼곤 없을 거예요. 피트 타운센드가 가입할 뻔한 기상천외한 밴드 이름도 나오고 <배니싱 포인트>의 1970년식 흰색 닷지 챌린저까지 등장시키죠. 번호판까지 <불리트>의 차에서 따왔다면서요?
닥극사: 타란티노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선언은 자아의 선언과 다를 게 없는 듯.
난데요: <데쓰 프루프>의 1부와 2부를 각각 보면서 1부는 타란티노가 보고 싶은 것을, 2부는 타란티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닥극사: 타란티노는 그 두 가지가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_-#
난데요: 다르죠. 앞의 것은 타란티노가 스스로를 일종의 관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고 뒤의 것은 감독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거니까요, 1부와 2부는 연출방식도 약간 차이가 있어요. ‘그라인드 하우스’ 장르를 그대로 살려낸 느낌은 사실 1부에서 나죠. 그 1부 연출을 통해서 스크래치를 내고 화면을 끊어먹고 등등의 온갖 미세한 효과까지 곁들여서 완성해놓은 것은 바로 타란티노가 오래전 자신이 열광한 영화들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의 발로라고 느꼈어요. 하지만 2부는 좀 다르죠.
닥극사: 하긴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화면의 스크래치가 줄어들어서 당황했어요. 또 하나는 미국 밖 관객에겐 이 영화가 아우라를 불러내려는 원본 장르 자체가 생경하니까 더욱이 마지막 20분에 영화 관람의 쾌감이 집중될 듯해요.
난데요; 1부와 2부는 구조상 서로 대칭적으로 보여요. 게다가 내용을 끝까지 보면 2부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 1부의 장면들이 일종의 ‘명분쌓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전 그렇지 않다고 봐요.
닥극사: 그럼 1부를 만들고 싶어 그 명분을 얻기 위해 2부를 마련했다는 뜻?
난데요: 뭐, 그렇게까지야. ^^ 2부 마지막의 카타르시스가 물론 가장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1부의 ‘끈적한 쾌락’에도 상당히 무게를 싣고 있다는 거죠. 1부에서 거의 공포영화를 보는 듯한 사지절단 사고 장면을 여러 차례 거듭 보여주는 것과 랩댄스 장면이 대변하는 술집의 분위기를 살려낸 것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핵심이지 다른 것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 이 영화는 미국 상영에서처럼 좀더 짧은 분량으로 로드리게즈 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게 베스트인 것 같아요. 애초에 그렇게 보라고 만든 영화이기도 하고.
닥극사: 그리고 재개봉관에서요! 나초를 먹으며! 부모님 모시고! 에구, 이건 아니다. -..- 그리고 사족을 붙이자면 전 <데쓰 프루프>가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자들 상대로 상영한 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해요. 사실 영화제 출장간 기자들이란, 연일 수면 부족에 멍한 머리를 쥐어짜며 이름도 외기 힘든 감독의 걸작을 보느라 심각한 호흡곤란 상태잖아요. 그럴 때 이런 영화는 정말 가뭄에 단비가 되게 마련이죠. ^_^ 내심 다들 고마워한다고요. 예술영화에 대해 유쾌한 자조를 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난데요: 맞아요. 저도 베니스영화제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를 보는데, 정말 비슷한 쾌감을 느꼈어요. 그 영화도 마지막이 정말 폭발적인 오락영화였거든요. 아무튼 <데쓰 프루프>는 절대로 집에서 다운받아 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맛을 알 수 없어요.
김혜리: “<시카고> 같은 연출보다 <입술은 안되요>가 작품을 전체로서 즐기게 해주는 것 같아요. 공간을 잘 고안해서 사이즈 큰 숏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빠른 편집을 대신하죠” 이동진: “쇼트 사이즈에 눈이 가더라구요. 현대 영화로 올수록 점점 더 미디엄 쇼트가 타이트해는데 이 영화는 무릎에서 자르더라구요. 고전 영화처럼.”
닥극사: (만약 보려면) 닥치고 극장사수! <데쓰 프루프>에서 타란티노가 과거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를 자기가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입술은 안돼요>의 알랭 레네는 1920년대 오페레타와 뮤지컬영화에 대한 사랑 자체를 열어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마치 그 시대에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처럼요.
난데요: 확실히 그렇죠. 게다가 타란티노처럼 작심한 것 같은 느낌이 없잖아요. 그래서인지 재미는 좀 덜하긴 하더라고요. ^^ 뭔가 좀 악착스런 맛이 있어야 엔터테인먼트가 되나봐요.
닥극사: T-T 전 몹시 즐거웠는데요. 영화를 보고나서 행복해져서 발걸음이 가벼워졌어요. <밤과 안개><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사 책에 나오는 알랭 레네의 유명한 영화만 볼 수 있었던 관객에겐 (저를 포함해서) 이게 무슨 청국장 집에서 라타투이 나오는 사태인가 싶은 뮤지컬이지만 레네의 근작들을 꾸준히 보아온 사람들에겐 의외의 작품이 아니라죠?
난데요: 90년대 이후의 레네 영화는 확실히 좀 다르긴 하죠. 그런데 전 알랭 레네가 영화사상 가장 지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질 들뢰즈가 “레네와 함께 영화의 이미지는 공간의 문제에서 시간의 문제로 전환됐다”고 했는데 딱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시간과 기억이라는 테마에 관한 한, 레네가 최정점에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닥극사: 영화가 유독 갖고 있는 다층적인 표현 능력을 어떻게 쓸 수 있는지 그런 식으로 본을 보인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난데요: 근데 레네가 벌써 85살이더라고요. 최근에 안토니오니와 베리만의 부고를 듣다보니 잠시 걱정되기도 했어요. 이러다 영화의 손꼽히는 모더니스트들이 다 우리 곁을 떠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근데, 거장들의 마지막 작품을 보면 의외로 귀엽고 깜찍한 작품들이 많죠. 이마무라 쇼헤이의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그렇죠. 나이가 들고 죽음이 앞에 찾아오면 인간의 소박한 욕망이나 성정에 대해 훨씬 더 관대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닥극사: <입술은 안돼요>도 알랭 레네가 여든 넘어 만든 영화인데, 이런 활력과 영화적 쾌락에 대한 열광, 천진한 시선과 절묘한 형식적 균형감각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왠지 부끄러워졌어요. 고작 이 나이에 마친 다 산 양 말하고 행동하는 제가요.
난데요: 뭐, 이분도 젊은 시절엔 1초도 눈을 돌려선 안 될 것 같은 빡빡한 영화들을 만드셨는데요.^^
닥극사: 하지만 전 <입술은 안돼요>도 나름의 조밀하고 정련된 형식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레네 감독은 지난해였던가, <포지티프>와 인터뷰에서 미국 TV드라마에 대한 열광을 표한 적이 있거든요. <24>나 <X파일>이 연기, 촬영, 편집 면에서 대부분의 현대영화보다 탁월하다고 역설하면서요. 이 영화의 원작인 오페레타도 그렇지만 대중문화에 워낙 안테나를 세우고 사는 젊은 정신의 노장인 것 같습니다.
난데요: 전 이 영화에서 마지막 대사이자 노랫말인 부분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좋으셨다면 이제 우리와 함께 노래하지 않으실래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어요”인데 그게 영화에 관한 이야기처럼도 들리고 예술이나 인생 자체에 대한 이야기처럼도 들려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어요”라니요, 정말! ^^
닥극사: 우리가 그 나이에 이르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절레절레.
난데요: 일단 85살까지 살지를 못할 듯. 이놈의 마감 때문에. -.-
닥극사: 이 영화는 일곱명의 남녀가 나와서 결국 세쌍이, 맺어지거나 사랑을 다지는 이야기인데요. 3부 구성으로 3개의 세트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죠. 2층과 연결된 실내, 집안에 마련된 극중 연극무대와 객석, 그리고 두개의 밀실이 딸린 독신남의 아지트 등 효과적 공간 설정만으로도 요란한 편집없이 성공적인 연출을 했어요. 저는 <시카고> 같은 연출보다 이런 식의 뮤지컬영화가 작품을 전체로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공간을 잘 고안해서 사이즈 큰 숏과 카메라 움직임으로 빠른 편집을 대신하는 식이죠. 특히 여섯 남녀가 거울있는 기둥 사이를 오가며 합창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난데요: 그 장면 압권이죠. 예전부터 레네는 거울을 유독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닥극사: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방(무대)를 퇴장하면 비눗방울 꺼지듯 디졸브로 사라지는데요. 꼭 인물들이 유령처럼 보이더군요. 저들은 영혼이거나 꿈속의 존재가 아닐까 싶고, 영화의 복고적 스타일과도 묘하게 어울렸어요.
난데요: 말 그대로 아스라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죠.
닥극사: 또 알랭 레네는 가수가 아닌 배우를 캐스팅했잖아요? 그걸 보면서 깨달았는데 무대의 뮤지컬과 뮤지컬영화의 차이 중 하나는 배우에게 요구되는 노래 실력이 아닐까 싶었어요. 무대 뮤지컬은 배우의 노래가 약간이라도 불안하면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더라고요. 언젠가는 초조해서 끝까지 못 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영화 뮤지컬은 이미 촬영됐다는 사실을 관객이 알고 있으니, 배우가 적어도 감독의 의도에 맞는 정도로는 노래하고 있음을 믿을 수 있죠.
난데요: 노래 실력만으로 보면 주인공 질베르트의 여동생으로 분한 이사벨 낭티가 제일 훌륭하더군요. 그녀가 테라스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없었다면 키스 한번으로 모든 사태가 정리되는 결말이 이상해 보였을 겁니다.
닥극사: 저는 질베르트의 첫 남편인 미국 사업가 역을 맡은 랑베르 윌슨이 지금까지 어떤 출연작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랑스 배우가 어색한 불어와 똑 떨어지는 영어 억양으로 연기하는데, 노래를 하지 않을 때도 음악 같더군요.
난데요: 전 <입술은 안돼요>의 숏 사이즈에 눈이 가더라고요. 현대영화로 올수록 점점 더 미디엄숏이 타이트해지는 것 같은데 이 영화의 미디엄숏은 무릎에서 자르더라고요. 고전영화처럼.
닥극사: 사실 형식적으로는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영화에 가까워요. 결론적으로 <입술은 안돼요> 역시 극장 관람을 강추합니다! 악단이 악기를 튜닝하는 처음부터, 마지막의 커튼콜까지 흥겹게 동참하시려면 극장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난데요: 끝까지 대화명 세일즈하시는군요.^^ (집에) 이쓰문안데요….(나도 세일즈. -.-)
김혜리: “여자는 남자의 요구 앞에 태연한 척 해도 내심 그래서 내곁을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해요. <방황의 날들>은 그렇게 마음에 볕과 그늘이 드는 미세한 변화를 잘 잡아냈어요.” 이동진: “전 이 영화가 ‘예술영화’로는 너무 평범하다고 봤어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클로스업 위주의 화면이 얻어낸 미학적 성취도 불분명해 보이구요.”
닥극사: +_+ 헉, 언어의 대장장이이십니다(연금술사라고 하기엔 뭔가 걸려서). 세 번째 영화 <방황의 날들>은 북미의 아주 추운 도시로 이민간 10대 한국 소녀 에이미의 힘겨운 사춘기를 관찰한 영화입니다. 어찌 보면 비디오 다이어리 포맷이죠. 16mm로 촬영했으니 비유일 뿐이지만요. 가족을 떠난 아빠에게 속말을 거는 내레이션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영상편지 같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카메라가 줄곧 에이미를 바짝 따라다니는 영화인데요. 혹시 다르덴 형제 영화를 떠올리진 않으셨어요?
난데요: 스타일상으로야 그런 면이 있지만… 그래도 다르덴과는 다르데? ^^
닥극사: 여기엔 결정적인 모멘트가 없죠. 이 영화의 사건이라면, 에이미가 유일한 친구이자 남자친구인 소년 트랜과 밀고당기는 감정 줄다리기 정도입니다.
난데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말 그대로 작고도 작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러닝타임도 80분밖에 안 되는데다가 다루고 있는 것도 아주 작은 감정과 사건들이니까요.
닥극사: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그리긴 했지만, 엄마의 기대와 남자친구의 은근한 압력, 부재하는 아빠에 대한 환상은 꼭 이민을 간 경우가 아니라도 경험하는 사춘기 상황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방황의 날들>에서 제가 제일 재미있게 본 건 에이미와 트랜이 사귀는 과정이었어요.
난데요: 뭐, 내용 대부분이 그 이야기잖아요? ^^
닥극사: 서로 사귈 때 여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알아서 채워줌으로써 둘의 관계가 운명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길 바라거든요. 반면 남자는 (당연히) 여자가 말을 하지 않은 채 불만스런 얼굴을 하니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지치죠.
난데요: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요구하는 것은 늘 소년쪽이죠.
닥극사: 여자는 그런 요구 앞에서 태연한 척하지만 내심 그가 바라는 걸 주지 않으면 내 곁을 떠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요. 그런 식으로 마음에 볕이 들었다 그늘이 졌다 하는 미세한 변화를 <방황의 날들>은 잘 잡아냈어요.
난데요: 10대의 사랑은 속마음과 겉으로 표현하는 말이 종종 반대인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가 잘 표현했죠. 나이 들면서 자꾸 관계에 실패하다 보면 좀더 직설적으로 바뀌는데, 10대는 처음 찾아오는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잘 모르니까요.
닥극사: 그런데 영화의 에이미는 트랜을 제외하면 세상과 끈이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 특수해요. 엉뚱한 교훈이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남자친구가 유일한 친구라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점을 절감했습니다.
난데요: 전 이 영화가 ‘예술영화’로 너무 평범하다고 봤어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클로즈업 위주의 화면이 얻어낸 미학적 성취도 불분명해 보이고요.
닥극사: <방황의 날들>의 큰 약점은 에이미를 그토록 집요하게 주시하고 나서도 우리가 그녀를 더 잘 이해하거나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감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일 거예요. 선배는 본인의 사춘기를 영화로 찍는다면 어떤 형식으로 찍겠어요?
난데요: 글쎄,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꼬리를 물고 맞물리는 방식으로 찍으면 어떨까 싶네요. 성장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전 성장영화가 완료시제이면 약간의 저항감이 생겨요. 그러는 귀하는?
닥극사: 음, 저는 10대의 어느 날을 골라 저를 죽인 다음에 이후는 귀신영화로 만들래요. ^^ 무서운 귀신 말고 그저 귀신일 뿐인 귀신요. -_- 겉보기는 지금과 똑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