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Db(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서 ‘기차’로 키워드 검색을 해보니, 관련 영화가 무려 1802개가 뜬다. 어디 이뿐일까. 지하철과 관련한 온갖 영화까지 포함하면, 더이상 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열차(기차와 지하철 모두 포함)는 시민의 발이 돼줄 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요긴한 로케이션으로 작용한다. 이곳에서 등장인물들은 만나고 소통하고 사랑에 빠지며, 때론 환상과 저주에 시달리기도 한다. 5월10일 개봉하는 박흥식 감독의 <경의선>은, 제목에서도 알려주듯 열차가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영화. 주인공 한나(손태영)와 만수(김강우)는 경의선 열차에서 갈등하고 혼란에 빠지며, 결국 이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경의선> 외에도 인상적인 열차 신을 남긴 영화들이 많다. 그래서 엄선해봤다. 열차 로케이션 영화 베스트5!
5위 <아파트> - 공포와 원한의 공간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도 괴롭지만, 인적이 드문 스산한 지하철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4인용 식탁>의 정원(박신양)이나 <올드보이>의 미도(강혜정)는 열차 안에서 환상을 보았으며, 일본영화 <유실물>의 고딩들은 쓸데없는 호기심 발동했다가 변을 당한 전적이 있다. <아파트>는 엘리베이터와 계단, 복도 등 아파트 구석구석 긴머리 귀신을 배치했지만, 지하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늦은 밤, 주인공 세진(고소영)은 지하철 플랫폼에서 한 여인이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피라도 말라붙은 양 시뻘건 옷에, 드라큘라라도 환생한 듯 짙은 스모키 화장(정말 섬뜩했다!). 살려줄까, 말까. 세진은 처음에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만, 무서운 속도로 열차가 들어오는 탓에 그녀를 놓고 만다. 그 뒤로 계속 세진을 따라붙는 자살녀의 환영! 아이고, 질긴 것!
4위 <스파이더 맨2> - 아드레날린 액션
달리는 열차 위에서 싸워도 멀쩡한 사람은 영화 주인공들뿐이다. <미션 임파서블>의 무적 요원 이단 헌트(톰 크루즈)라면 모를까. 아니면, 초인적인 괴력을 지닌 슈퍼히어로 스파이더 맨(토비 맥과이어) 정도? 뉴욕 곳곳을 누비며 고공 줄타기를 일삼던 스파이더 맨은, 2편에서 지하철 승객들을 살려야 할 처지에 놓인다. 기계촉수를 지닌 닥터 옥토퍼스(앨프리드 몰리나)의 계략으로 까딱하면 열차가 산산조각날 판국. 끊어진 선로로 질주하는 지하철 속도 늦추랴, 틈틈이 괴롭히는 옥토퍼스 물리치랴, 스파이더 맨은 유니폼이 찢어지도록 괴력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에서 스파이더 맨의 정체가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공개된다는 사실. 우락부락한 덩치를 상상했던 승객들은, 의외로 어린 스파이더 맨의 정체에 놀라움과 박수를 동시에 보낸다.3위 <엽기적인 그녀> - 지하철엔 취객이 산다
지하철 막차를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열차 안을 가득 메운 열기와 형용할 수 없는 취객들의 냄새를! 그러다 누군가 질펀하게 한 바가지 쏟아내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달아나는 게 보통이지만, <엽기적인 그녀>의 예의바른 청년 견우(차태현)는 달랐다. 아니, 이미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의 주시하던 그 처자, 입을 실룩거리다 결국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리얼하게 쏟아낸 그 처자. 바로 엽기적인 그녀(전지현)가 술김에 견우를 연인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견우의 선택은 없다. 입고 있던 스웨터 벗어 만신창이가 된 할아버지 가발 닦아드리고, 그녀를 들쳐업고 냉큼 지하철에서 내리는 것뿐. 이것이 견우와 엽기적인 그녀의 첫 만남이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견우는 더러움을 견딘 끝에 어여쁜 여자친구를 얻을 수 있었다.2위 <해리 포터> 시리즈 - 판타지 여행의 시작 철이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안드로메다로 떠났고, <폴라 익스프레스>의 착한 소년은 산타가 안내한 특급열차에 몸을 싣고 북극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의 해리 포터는? 매년 런던의 킹스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호그와트로 향한다. 어엿한 마법사답게 ‘플루가루 네트워크’로 순간이동할 수도 있지만, 어디 열차만큼 설레고 낭만적인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 게다가 멍청한 머글 친척들에게 시달린 해리 포터로선, 이 열차여행이 고대하던 마법계 생활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이 열차에는 삶은 달걀이나 초코파이는 없지만 각종 젤리와 신기한 장난감들이 구비돼 있고, 단짝친구들한테서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해리 포터의 명성 덕분에 킹스크로스역은 명물이 됐다는데, 사실은 그저 거대한 기차역일 뿐이라는 사실!
1위 <비포 선라이즈> - 유럽여행의 로망
인생은 우연의 연속!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그 나라에서, 하필 그 두 사람이 같은 기차, 같은 칸에 타고 있었고, 하필 그때 독일인 부부가 시끄럽게 다투는 바람에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는 것. 전세계 배낭여행객들에게 낭만과 헛꿈을 키워준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오스트리아 철도청에서 감사패를 줘도 아깝지 않을 작품이다. 하지만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여대생 셀린느(줄리 델피)의 첫 만남 장소로, 이 유로열차는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이국적인 유럽 풍경과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커피 한잔, 그리고 지적인 대화와 묘하게 피어오르는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화학작용을 만들어냈고, 두 사람은 결국 빈에서 함께 내린다. 굳이 로맨스가 끼어들지 않아도 좋다. 국경을 넘나드는 유로열차는 그 자체로 여행객들의 로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