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읽었더라. 상대에게 옷을 선물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내비치는 일이라고 했다. 디자이너 정구호의 옷은 그 소망을 단호하게 전한다. 품은 넉넉하고 실루엣은 유유하지만, 입는 이가 어떻게 느끼고 움직이길 바란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한다. 정구호의 영화미술도 비슷한 이유에서 압도적이다. <정사> <텔미썸딩>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위해 정구호가 지은 영화 의상은, 과장하자면, 인물의 성격을 거의 ‘폭로’한다. 새로 제작하지 않고 구호(KUHO)의 기성복을 협찬한 경우에도 정구호의 옷은, 여배우를 특정한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관객을 부추긴다. 낭창거리는 바지와 셔츠를 입은 <사랑니>의 조인영은, 천방지축으로만 보였던 배우 김정은 속에 숨은 호리호리하고 나긋한 여인을 노출시켰다. 블라우스를 비단뱀처럼 감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은숙은, 배우 문소리가 가진 줄 몰랐던 싸늘한 광택을 뿌렸다. 6월 개봉을 앞둔 <황진이>는 정구호가 4년 만에 참여한 영화다. 송도 기생 명월도 어김없이 옷과 장신구를 선언처럼 걸친 여인이 될 터다.
정구호가 만든 옷은 좀, 고독해 보인다. 길쭉한 타원형 체경 앞에 홀로 서 있는 여자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다. 왁자한 모임에도 입을 수 있으나, 자리에 어우러지기보다 외따로 떨어져 주목을 끄는 옷. 디자이너 자신도 다른 브랜드의 옷과 뒤섞어 입기 용이하지는 않다고 긍정한다. 심지어 구호 컬렉션 쇼에서조차 피날레에 여러 모델이 한꺼번에 행진하면, 이게 아닌데 싶다. 흔히 미니멀리즘이라고 요약되는 정구호 스타일의 아름다움은 주의를 기울이고 시간을 들여 보지 않으면 간과하기 쉬운 부류다. 그런데 정구호는 문제의 주의와 시간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97년 부티크 구호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젠(Zen/禪) 유행에 시동을 걸었고 옷 외에도 인테리어, 문구, 식기, 공연 의상 등의 디자인, 설치미술 작업, 인사동 쌈짓길 프로젝트를 두루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정구호는 옷이 그의 활동의 정점임을 분명히 한다. 나머지는, 아이디어의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옷에 담긴 생각을 더 잘 이해시키는 작업이다. <정사> <순애보> <텔미썸딩> <하루> <쓰리>로 이어진 그의 영화 미술은, 디자이너가 눈치 보지 않고 뽐낼 수 있는 코스튬드라마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물을 만났다. 미국판 <보그> 편집장을 지낸 다이애나 브뤼랜드는 “디자이너란 사람들이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재주를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난 10년간 정구호는 거기에 근접하는 것처럼 보였다.
<GQ>의 이충걸 편집장에 따르면, 정구호는 세상의 아름답고 맛있는 것을 죄다 섭취하려고 애쓰는 탐식가다.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입고 싶은 건 다 입을 거야!”라고 아이처럼 외칠 수 있는. 문외한인 내가 잡지를 통해 엿보는 패션은, 오답은 있으나 정답은 없는- 그리고 가격은 미정인- 세계다. 그러나 디자이너 정구호는, 유사시에는 한 벌의 옷을 가리켜 “옳다”, “그르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법한 선명한 직관을 대화 갈피에 보여주었다. 그와 세편의 영화를 만든 이재용 감독은, 옷본의 선을 내리그을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과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절묘한 지점을 감지하는 아주 예민한 촉각이 정구호에게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뭇사람들이 ‘재능’이라 칭하는 힘의 정체는 결국 그 촉각이 아닐까? 정구호가 확인해주었다. “항상 그것이 문제예요. 언제 멈추고, 언제 나아갈 것인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그 지점을 생각해왔어요.”
-옷, 그릇, 문구, 인테리어 디자인, 영화미술, 요리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오래된 친구이자 영화를 같이 만든 이재용 감독님 표현으로는 힘이 더 들지언정 일한 자리가 분명히 표나는 쪽을 좋아하신다고요. 요즘은 어떤 일로 바쁘세요? =구호뿐 아니라 제일모직 10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맡고 나서 10배로 바빠졌어요. 저는 둘러보고 지시만 하기보다 영화현장으로 치면 팔 걷고 사다리 올라가 망치질하는 부류예요. 제가 이것저것하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 옷 하는 사람이야, 뭐야?” 하고 욕한 모 디자이너도 있었대요. 하지만 요새는 “저런 사람이구나”라고 인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실은 다른 일들을 같이 해서 오히려 제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옷 한 가지를 하는 데 열 시간을 일한다고 해도 열 시간 전부 실질적인 작업 시간은 아니잖아요? 유학기간에 저는 아르바이트를 스무 가지 넘게 해서 살았어요. 수업 끝나면 일하고 일 마치면 집으로 프로젝트하고 다시 일하러 가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고 조절하는 생활을 열여덟살 때부터 한 거죠. 그래서 일의 집중도가 높아요.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점도 잘 치신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 종교가 민속신앙이라서. (좌중 웃음) 나이가 들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아요. 30분만 말을 나눠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두번쯤 만나면 확실히 알겠고.
-성함을 그대로 브랜드명으로 쓴 경우인데요. 구호라는 이름에 원래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브랜드 이름이 된 뒤 뉘앙스가 더 붙었다고 생각하세요? =구 자는 돌림자고요. 오랫동안 이름 안 짓고 아명으로 버티다가 세 살 반 때 할아버지가 절 불러 “앞으로 이게 네 이름이다”라고 붓글씨로 써서 보여주셨어요. 구할 구 자에 하늘 호 자. 어렵죠. 하늘을 구하라니, 뭘 어쩌라는 건지. (웃음) 철학하는 분들도 이름이 너무 세다고 해요. 브랜드 이름도 많이 고민했는데 외국인들에게 물으니 발음 느낌이 옷과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뉴욕에서 공부를 마친 뒤 출판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셨는데 곧 그만두셨습니다. 평면 디자인이 주는 답답함이 컸나요? =책상에 가만히 앉아 하는 일을 잘 못해요. 그래픽 디자인을 하다보면 정해진 종이 규격, 화면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니 몹시 답답했어요. 졸업 뒤 2년쯤 그러다보니 뭔가 움직여서 만들고 지저분하게 일을 벌였다가 치우기도 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뉴욕에서 식당을 열었는데 관련된 일 중 디자인에 속하는 일은 전공이니 내가 하자 싶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을 제가 하게 됐죠. 구호의 브랜드 로고도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구호(KUHO)의 로고 글씨체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맨 인 블랙>의 자막 서체(파블로 페로)와 비슷해요. 구호 옷의 실루엣도 그러고 보니 세로로 기름하네요…. (웃음) =워낙 긴 실루엣을 좋아하고 컨덴스드 체(condensed: 옆으로 눌려서 세로가 긴 서체)를 좋아해요. 학창 시절 프로젝트에서도 그 서체만 고집했고 막판에는 아예 <컨덴스드>라는 책을 만들었더니 선생님들이 두손 들었죠.
초등학교 때 TV보고 박공예, 매듭공예 따라했죠
-어려서도 영화를 좋아하셨다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현실보다 서양영화를 보며 원체험을 한 경우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여섯살부터 <주말의 명화>의 단골손님이었죠. 가요보다 팝송, 외국영화를 더 친숙하게 섭취한 세대라서 그것이 더 깊이 흡수됐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는 고교 졸업 직후 유학을 떠나 80년대 대학가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죠. 이런 이야기, 친구들은 화내겠지만 방학 때 귀국해 신촌에 놀러가면 다들 막걸리집에서 인상 쓰고 담배를 피우며 슬퍼하고 있었어요. 내일 하늘이 무너질 표정으로. 저는 기쁘고 즐겁게 사는데 친구들에겐 삶이 역경이었죠. “너희는 왜 그렇게 슬프니?” 물었지만 이야기의 끝은 “넌 이해 못할 거야”였죠. “알았어. 난 이해 못한다. 그냥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할게.” 그랬어요. 저도 한국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보고 겪었다면 다르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 체험을 못하고 물질주의적 세계에서(웃음) 지낸 거죠.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런웨이>의 스타일리스트 나이젤(스탠리 투치)이 “친구들이 풋볼할 때 몰래 재봉을 독학했다”고 회고하죠. 선생님도 어려서 새 옷을 사면 스스로 수선해서 입고 동생의 인형 옷도 지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사실 저는 공예부터 했어요. 흙장난, 소꿉장난부터 종이접기까지 뭐든 손으로 하는 작업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부터 코바느질도 하고 TV에서 박공예니 매듭공예니 강의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보자마자 재료를 사서 이튿날 똑같이 따라했죠. 다른 아이들은 사탕을 사먹는데 전 사탕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 돈으로 재료를 샀고 하나를 완성해야 다른 작품에 착수했죠. 박공예를 해서 몇개 걸어놓고는 다음 프로그램 예고를 보며 “와, 이번엔 매듭이구나!”하고 또 매듭을 만들어서 걸어두고. 어머니는 그걸 떼내시기를 반복하는 그런 싸움을 고등학교 때까지 했어요.
-록음악 하겠다는 아들 기타를 아버지가 부쉈다는 이야기의 박공예 버전이네요. (웃음) =아버지는 제가 만든 물건을 말없이 가져다 버리셨어요. 그러다가 홍익대 교수인 어머니 친구분이 소질이 있으니 가르치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미대를 지망하게 됐죠. <캔디> <올훼스의 창> 같은 만화를, 트레이싱 페이퍼에 베끼지 않고 대번에 아크릴로 채색해 그리기도 했어요. 이웃 금란여고 학생들에게 인기 짱이었죠. (웃음)
-어려서 어머니의 스커트에 매혹된 추억을 쓰신 글을 봤어요. 구호의 옷을 살펴보아도 여성의 치마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평소 어머니는 아주 짧은 커트머리에 ‘당꼬바지’라고 하는 시가렛 팬츠(통 좁은 바지)를 주로 입으셨어요. 제가 치마를 입으라고 늘 졸랐죠. 처음 부티크(디자이너가 직접 운영하는 작은 매장)로 구호를 시작할 무렵엔 스커트를 훨씬 많이 만들었어요. 스커트는 여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스커트와 다리의 밸런스와 컴비네이션을 굉장히 좋아해요 샤넬라인보다는 길고 예전 미디스커트보다는 짧은, 무릎과 발목 중간의 길이가 제가 사랑하는 스커트 기장인데, 매장에서 다리가 짧아 보이는 길이라고 불평이 들어와도 우겨서 만들었어요. 트임이 적은 스커트도 좋아하는데 어떤 손님이 제 치마 때문에 출근길에 버스 타려 뛰다가 넘어졌다며 “뛰지 말고 걸으라는 정구호 선생 뜻이구나” 싶었대요.
-다리와 치마의 조형적인 조화 말고도 스커트를 입었을 때 따라오는 몸의 움직임을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요? =스커트는 몸 전체를 길어보이게 해요. 바지를 입으면 서 있을 때 길어보일지 몰라도 걷기 시작하면 달라요. 스커트는 걸을 때도 면(面)으로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길어 보이죠. 또, 스커트에는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섹시함이 있어요. 여성들이 중요한 결정과 모임을 하는 날은 꼭 스커트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체형이 어떻든 스커트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없어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웃음) 제가 여성복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남자라 옷을 직접 못 입어보고 만드는 거예요. 입다보면 옷을 달리 느낄 수 있거든요.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졸업 뒤 기성복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아서 옷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출판사에 입사하셨다고 읽었습니다. 출발부터 아예 독자적인 부티크로 시작하겠다는 건 대단한 자신감 아닌가요? 또 한 가지, 부티크를 차릴 자본을 모으기 위해 귀국 뒤에도 레스토랑을 계획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레스토랑을 해서 거꾸로 빚을 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돈이란 내가 기획해서 추진하면 벌 수 있다는 굉장한 낙관과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 신기합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제가 지닌 재주 중에 가장 현금화하기 좋은 것을 생각해보니 요리였죠. 음식은 대여섯살부터 익혀서 자신있었어요. 다들 제 음식이 맛있다고 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퓨전 음식점을 하려고 했는데 정통 프랑스 요리를 제대로 하는 집도 드문 상황이라 제대로 배우자 싶어 요리유학을 간 거고요. 그런데 결국 레스토랑을 차리지 않고 바로 구호 부티크를 열었어요. 젊고 부양가족도 없는데, 간절히 하고 싶은 일부터 하자, 언제든 망하면 난 음식을 하면 된다고 마음먹은 거죠. 처음 기성복 회사에 취직 안 한 것은 패션 전공자도 아니고 경험도 없으니 그 부담을 안고 저를 채용해줄 사람도 드물 것이고 저도 그런 리스크를 남의 회사에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구호는 매장도 없는 상태에서 이태원의 레스토랑을 빌려 쇼부터 하는 특이한 출발을 했는데요. =광고비도 없었고 숍을 여는 것보다 신뢰를 얻기 위해선 제가 어떤 디자이너고 뭘 할 수 있는지 알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선배 디자이너들께 일일이 찾아가 인사하고 행사를 알렸고 기자들에게도 편지를 보냈어요. 카탈로그와 포트폴리오도 보냈고요. 쇼도 모델라인에 찾아가 그냥 모델만 달라고 청해서 혼자 기획하고 음악 넣고, 이재용 감독을 포함한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죠. 지금 생각하면 겁이 없었죠. 다시 하라면…, 그래도 하고 싶네요. (웃음) 영화미술을 시작한 동기도 돈이었어요. (웃음) <정사>의 의상을 부탁받았는데 미술까지 담당하면 받는 돈도 커지니 목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라고 여겼죠.
-1990년대 말 청담동 레스토랑 실내장식을 담당하고 부티크 구호를 열면서, 젠 스타일 유행의 한복판에 계셨어요. 패션잡지 편집장들께 여쭤보니 트렌드와 정구호의 고유한 개성이 맞아떨어졌다는 의견도 있고 젠 스타일 바람을 형성한 주체라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젠을 굳이 염두에 뒀다기보다 원래 제 취향이 장식보다 기본 구조, 기본색에 충실하게 접근하는 쪽이니까요. 저는 자연은 자연대로 가만히 두되 그 위치만 바꿔놓자는 생각으로 모던한 실내에 돌절구와 잔디만 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보여드린 것뿐이죠.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저로 인해 동요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2003년 제일모직에 스카우트되기 전에도, 부티크 구호를 내셔널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FNF라는 기업과 제휴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기업과 결합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일찍 판단하셨나요? =외국 같으면 디자이너에게 아틀리에를 지키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유통구조가 그러기 어려워요. 매니지먼트, 재정, 작게는 천의 직조나 염색도 일정 규모 이상이 돼야 원하는 원단을 얻을 수 있어요. 후배들을 직접 지원 못해도 바람직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07년 봄/여름 시즌 쇼에서 엘스워스 켈리, 프랭크 스텔라 등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미니멀리즘에 한결같이 끌리십니까? =다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그 늘어놓은 것을 정리할 수 있는 자가 정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제가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무엇을 덜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더 해서 걸러낸 상태예요. 남들이 대여섯개 디테일을 쓴다면 저는 거기서 소거해가는 것이죠. 한편 완벽하게 장식적인 것은 미니멀한 것과 상통해요. 건축도 아주 고전적인 공간은 극히 모던한 공간과 어울릴 수 있고요.
라벨을 떼어내도 브랜드를 알 수 있어야 해요
-구호의 옷은 재단 방식에 큰 무게를 두기 때문에 건축하듯 옷 짓는 디자이너라는 평도 많이 들으셨죠. =구호의 기본 컨셉 중 하나가 뉴 커팅입니다. 일반적 양장 재단 패턴이 아니라, 그 옷이 보여주려는 실루엣에 따라, 표현하려는 체형에 따라 재단법을 바꾸는 거죠. 초기에는 어깨선이 없는 옷도 만들었는데 사이즈 분류를 위해 공장에 보냈더니 이런 옷은 처음 봤다고, 못하겠다고 도로 보내왔더라고요.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니까 어떤 사람이 입으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이 입으면 다른 식으로 옷이 떨어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 체형과 상관없이 입는 옷들이 있어서 부티크 시절에는 임신 사실을 공개하기 전인 연예인들이 많이 오기도 했어요. (웃음) 6개월까지 커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좌중 웃음) 저는 맞춤옷에는 재능이 없는 디자이너 같아요. 팔뚝이 굵으니 소매길이는 반드시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거나 고정관념이 있는 분들을 안 좋아하거든요. 어쩌면 그것이 부티크를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르죠.
-매장을 구경해보니 지퍼를 쓴 옷이 드물어요. 여밈 방식도 고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퍼보다는 단추, 단추보다는 후크(걸고리), 후크보다는 스트링(끈)으로 여미는 옷을 좋아합니다.
-여성의 몸에서 옷과 만났을 때 표현력이 가장 풍부한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목을 좋아해요. 목선이 쇄골을 딱 가리는 크루넥(crew neck)과 어깨선을 보여주는 스퀘어넥 라인을 특히 선호해요. 어깨는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목선만큼은 크루넥을 쓸 때도 있어요. 얼굴 주변을 단순하고 고전적으로 처리하면,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제가 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반면 허리선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죠? 몸의 곡선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옷인데 이른바 ‘여성적’라고 말하는 조형적 요소는 뭘까요? =여성스러움의 실루엣은 억지로 만들어진 곡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 드러나는 선이라고 봐요. 종이 봉지 속에 사과가 들었을 때, 둥근 형태감은 있지만 정확한 모양은 구분가지 않는 상태처럼. 난 허리가 23이다, 26이다 보여주기보다 상상하게 만드는 편이 좋아요. 가만히 서 있을 때보다 움직일 때 옷이 주름지고 자락이 쏠리는 실루엣 변화가 좋아서 자꾸 그런 장난을 칩니다.
-옷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디자인을 강조해오셨죠. 못마땅한 옷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브랜드마다 고유 실루엣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똑같은 블라우스, 원피스가 색상만 바뀌어 들어가 있는 것은, 옷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결과예요. 옷은 라벨을 떼내도 색깔과 소재에 상관없이 실루엣과 옷이 입혀지는 방법으로 어느 브랜드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출발할 때 목표도 라벨을 떼어내도 구호라고 알아볼 수 있는 옷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1년에 몇벌의 옷을 지으세요? =900개의 스타일을 만들어요. 스타일마다 색채와 소재를 변주하니까 옷의 가짓수는 더 많죠. 미국 경우 연간 400개 스타일이 최대치라고 해요. 미국보다 한국이 매장에 걸리는 옷의 회전 주기가 3배가량 빨라요.
-그건 버려지는 옷이 많다는 뜻도 되나요? =맞아요. 아까운 옷이 많습니다. 극장에 걸렸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영화가 많듯이.
-한국 여성들이 유행에 순응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비슷한 옷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해에 새 옷을 사면 원하건 원치 않건 유행을 타게 되는 면도 있어요. =저는 통이 넓은 바지를 좋아하는데 언젠가 새 옷을 사러갔더니 가게마다 시가렛 팬츠만 걸려 있어서 못 산 적이 있어요. 유행은 패션에서 무척 중요한 요소지만 개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입을 수 있게 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해요. 어렸을 때는 동네 가게에도 사과가 국광, 홍옥, 인도, 골덴, 스타킹 등 20, 30종이었는데 지금은 부사밖에 없어요. 잘되는 건 너도나도 하고 안 되는 건 무조건 없애버리는 문화는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옷도 마찬가지죠. 덜 팔리는 몇 가지 옷이 바로 그 브랜드를 유지하는 옷일 수 있어요.
-구호는 고가 브랜드입니다. 매장 직원 말씀이 단골손님들이 이 옷은 구호의 몇년도 스타일이 돌아온 거라고 거꾸로 가르쳐주는 일도 있다고 하더군요. 친숙한 고객에게 패션 이외의 조언을 할 때도 있습니까? =소비자 의견을 듣는 작업은 계속하려고 해요. 반영 여부는 제 자유지만요. 반면 저도 소비자들의 견해를 납득할 수 없다면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옷을 잘 입는 유일한 길은 많이 입어보는 거예요.
-많이 입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양의 멋은 어떻게 살았느냐에 영향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에게 큰 행복을 주거나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키는 물건이 있다면 다른 것을 포기해서 살 수 있다고 봐요. 진짜 자기가 원한다면 다른 소비를 포기하고 오페라 시즌 티켓을 사는 게 여유라고 생각해요. 학생 시절 저는 옷 10벌을 살 시간을 참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요지 야마모토의 와이셔츠 하나를 사 입었어요. 졸업 때까지 침대없이 살면서 입으로 불어 쓰는 에어 매트리스에서 잤어요. 진짜 원하는 침대는 살 처지가 아니었고, 그 침대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어디서 자든 상관이 없었어요. 뱅앤올룹슨(덴마크 오디오 브랜드)를 마련하기까지 오랫동안 19달러짜리 스테레오로 버텼어요. 사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디자이너니까 다른 걸 포기하고 최상의 디자인을 가진 물건에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향에 민감한 사람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진공관에 돈을 쓰겠죠.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경우 촬영현장에서 손수 전골을 끓이고 구석구석 정성을 기울이셨죠.그러나 아무래도 편집에 들어가면 주로 음식이나 소품을 보여주는 숏부터 잘려나가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웃음) =분노가, 생기죠. 엉엉. <스캔들…>은 심해요. 다 잘렸어요! 하지만 영화의 주체는 감독이니까 할 수 있나요. 해서 딱 한편 영화를 감독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미술이 아주 잘 보이는 영화로 말이죠!
--<스캔들…> 이후 방송, 영화계에서 사극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대사를 다룬 작품은 고증보다 상상이 앞선 의상도 선보였고요. 관심 갖고 보셨나요? =변형 자체가 금기시됐던 과거와 달리 <스캔들…> 이후 전통의상을 응용하는 범위가 크게 늘어난 것은 잘됐다고 봐요. 하지만 일정한 규칙은 있어야 해요.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룰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보여줄 의상의 한계, 범위와 뿌리에 관한 창작자 자신의 규칙이죠. 그 범위가 보이지 않으면 깊이가 사라져요. 디자이너가 어깨선을 올리겠다고 말하면 저는 꼭 이유를 요구해요. 그냥 예뻐 보여서라고 답하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유있게 어깨선을 올리는 것과 그냥 올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가 흘러가는 중에 의상이 변한 이유가 분명히 보일 때 남과의 차별성이 생겨요. 단순히 이것 예쁘니 가져다 쓰자는 것과 작품에 맞게 해석하고 변형하는 건 달라요.
-미술을 맡은 <텔미썸딩>에서 심은하씨의 캐릭터는 내내 싱글 버튼 H라인 의상을 입었는데요. 스릴러는 너무 정성을 기울이다 보면 옷이 스포일러가 되지 않나요? =맞아요. 보통 미스터리영화는 관능미를 강조하고 화려한 색을 쓰는데 저는 스릴러라고 세련미가 떨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또한 심은하씨 캐릭터가 치밀한 성격이 아니고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죠.
-<순애보>를 보면, 우인(이정재)이 매형과 집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마른멸치를 접시에 둥글게 담고 깨, 참기름, 고추장을 찍어먹는 종지 세개를 놓더라구요. 내심 웃었어요. =그 멸치는 저보다 이재용 감독 취향이에요. (웃음) 우인이 감독을 많이 닮았어요.
-<스캔들…>이 전작이다보니 <황진이>의 미술 의뢰를 수락하기까지 오래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스캔들…> 이후 사극을 여러 차례 의뢰받았지만 사양했어요. <황진이>를 하기로 결심한 건, <스캔들…> 이후 나온 사극들이 잘했지만 의상을 해석하는 범위나 틀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어요. <스캔들…>이 고증에 제 생각을 약간 더한 영화라면 이번에는 고증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변화를 한번 시도해보려고 했어요.
-고증 대 상상의 양극단으로 대비하셨는데 <황진이>는 어떤 범위에서 두 가지를 결합한 건가요? 홍석중 작가의 원작에는 옷차림과 살림살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이 꽤 많은데요. =원작의 묘사는 개의치 않았어요. 실제 황진이의 시대와 무관한 일제 강점 직전 조선 말기 기생들의 자료를 봤습니다. 신윤복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고리 위로 치마를 완전히 뒤로 끌어당겨 둘러서 일자형 셰이프가 나오더군요. 미술이 기존 <황진이> 이미지를 깨지 못하면, 차별화의 부담을 연출과 연기가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데 그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는 그 부분을 돕는다고 생각해 파격을 제안했어요.
-물에 둘러싸인 명월(황진이)의 집과 명월의 옷을 사진으로 보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성공한다면 <황진이> 스타일의 응용이 유행할지도 모르지만, 영화가 만족스럽지 않은 관객의 눈에는 위험할 수 있는 모험이예요. 우스꽝스러워지는 것과 혁신은 종이 한장 차이니까요. =영화를 보면 더 놀랄 거예요. 모험하지 않고 애매해지면 이 영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기본 컨셉은 제가 잡고 진행은 김진철 미술감독이 하셨죠. 명월 집만 제가 신경을 많이 썼고요. 안채를 둘러싼 중원을 연못처럼 물로 채워서 징검다리로 직접 건너거나 누마루를 통해 갈 수 있도록 했어요. 기생의 집은 밤에 화려한 공간이고 그 화려함을 물의 반영이 증폭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죠. 그 추운 날씨에 땅을 파고 물을 채우느라 난리를 쳤는데 영화에 덜 보여 아쉽죠. 그리고 <황진이>는 붉은색이 없는 영화예요. 오방색(청, 황, 적, 백,흑)을 놓고 정리를 해보니 빨강을 빼지 않으면 색 조합이 달라지지 않더군요. 붉은 기가 빠지면서 영화가 차가워졌지요.
-붉은색을 쓰지 않고 화려함을 구현한다는 목표네요. <스캔들…> 개봉 당시 마음에 드는 빨강을 얻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빨강의 까다로움은 무엇인가요? =까닥하면 천해 보이고 잘하면 고급스러운, 천의 얼굴을 가진 색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지는 위험한 색입니다. <스캔들…>은 그 위험에 대한 도전이었죠. 요즘 사극들이 붉은색을 남발하고 붉은색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이번에는 “아니다, 그렇게 센 빨강을 빼고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개된 사진을 본 사람들이 빨강을 쓰지 않은 것보다 검정에 먼저 강하게 반응해요. =우리나라 실내색은 주로 나무와 창호지, 노란 장판인데 <황진이>는 까맣게 갔죠. 일본스러우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있었는데 안 그럴 거라고 설득했어요. 바닥은 검정 화문석으로, 거문고도 까맣게 칠했죠. 병풍은 빼고 장롱으로 채웠어요. 조선 후기 기생들은 남자들에게 선물받은 가구를 쌓아올려 세를 과시했대요. 북한에서 들어오는 골동품을 사서 장식을 뜯어내고 검게 칠해 리폼하고 백동 장식이 많이 붙은 개성장을 재현했어요.
-색채도 색채지만 한복 소재가 인상적이었어요. 검은 크로셰(손뜨개) 레이스도 쓰인 것 같은데요, 엉뚱하게 고야의 여인 초상화가 떠올랐습니다. =한복 소재는 통상 자가드나 실크인데 그보다 로코코 소재를 응용해보고 싶었어요. 오간자(얇고 빳빳한 실크)에 레이스를 덧대고 은박도 썼어요. 기존 한복과 가장 다르게 느껴질 점을 간추리면, 소재, 색채의 조합 그리고 액세서리예요. 액세서리는 다 새로 제작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머리꽂이를 만들고 바닥까지 끌리는 1m 넘는 노리개도 제작했어요.
디자이너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
-구호의 옷은 미인이라고 무조건 어울리는 옷이 아닌 듯합니다. 예를 들어 2006년 1월에 바비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행사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어색한 느낌이었어요. =홍보의 일환이지만 제 개인 취향은 아니죠. 사람을 좀 타는 옷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당장은 어색해도 그 어색함을 딛고 나아가면 인이 박힐 수 있는 옷이라고. 공간도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장소가 나중엔 더 오래 친숙해질 수 있는 곳일 때가 많아요. 사람도 까다로운 사람이 접근하긴 어렵지만 한번 친해지면 오래 가는 이치와 마찬가지예요.
-무작정 첫눈에 사람을 풀어지게 하는 편한 집보다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게 해 주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하죠. =몸에 밀착하는 옷의 재단이 제일 쉬워요. 옷은 사람 몸에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만들기 힘들어요. 옷이란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몸과 옷 사이에는 일정한 공기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상의 입체공간, 적당한 공기층을 생각하면서 옷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숨쉬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옷을 직접 입었을 때 디자이너의 힘을 강렬하게 느낀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앤트워프 출신 마틴 마르지엘라 같은 전위적 디자이너 옷에 반해 옷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티셔츠 하나에도 다른 느낌이 있는데 그걸 알고 나면 그렇지 못한 ‘상업적인’ 옷을 입기 힘들죠. 저는 구치나 돌체 앤드 가바나 같은 브랜드도 상업적인 옷이라고 생각해요. 사람한테 반짝이 가루를 확 뿌려서 금세 반짝거리게 만들어주잖아요? 그런데 1년이 지나면 그 옷을 다시 못 입고 다른 반짝이를 뿌려야 해요. 예술이나 패션이나 구획화(zoning)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격대보다도 옷의 분위기와 속성, 연출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뜻이죠. 영역 구분 없이 아무나 어디서나 통하는 건, 모두 똑같은 위치에 소파, 텔레비전을 놓고 사는 우리 아파트 문화와 같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구호는 청담동 ‘규수’들의 옷이라는 이미지가 셌습니다. 그동안 요가, 생활용품 등 라인을 확대하셨는데 상대적으로 중저가 라인을 만들어 구호 특유의 세심한 재단과 좋은 구조가 있는 옷의 맛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는 없으신가요?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호의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호의 느낌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어요.
-맛과 아름다움에 예민한 만큼 추한 사물과 현상에도 민감하시죠?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재능이 있어요. 민속신앙인데가 운명론적인 사람이라, 예쁘고 세련된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정의하고 생활하세요?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해요. 누구나 태어나 살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잖아요. 저는 능력이 많아 자선사업을 크게 할 것도 아니고, 학식이 높아 학생을 가르칠 수도 없으니 다만 가진 감성으로 노력해 새로운 발상을 시각적으로 보여드리고 사람들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할 뿐이죠. 더이상 영향을 줄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하거나 조그만 장소에서 만들고 싶은 물건만 만들면서 지내겠죠. 그 둘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