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소녀배우 시대를 맞이한 일본에서 비롯됐다. 나라마다 정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본영화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8590세대 즉, 소녀배우들의 힘이 컸다. 아오이 유우가 없었다면 <훌라걸스>의 훌라춤이 그렇게 황홀할 수 있었을까? <나나>를 기분좋게 볼 수 있었던 데는 분명 미야자키 아오이의 ‘초가와이’한 매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한국과 미국의 소녀배우들도 한번 짚어보고 싶다는 얄팍한 욕심으로 번졌다. 나이는 비슷해도 재능도 매력도 제각각인 이들. 소녀에서 여인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3개국 청춘스타들을 여기 소개한다. 혹여 제외된 배우들이 있다 해도 너무 노여워마시라. 그저 이들의 눈부신 이팔청춘과 가능성에 한표 던지며,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시길(일본 소녀배우들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이 곳 참고).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때까지
황보라 (1983~)
<좋지 아니한가>에서 아버지 창수(천호진)는 딸 용선(황보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얼굴이 못생겨서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영화상의 설정이라지만 이게 무슨 위화감 조장하는 소리? 아무리 영화에서 늘어진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차림이라지만, 아무리 박해일이 황보라를 보자마자 “너 참 특이하게 생겼다”고 말했다지만, 황보라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컵라면의 브랜드 가치를 엄청나게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큰 눈에 도톰한 입술, 카메라 각도를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얼굴선. 변화무쌍하고 화사한 이미지가 유난히 교복에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의외로 황보라는 올해 25살의 과년(?)한 처자다. 미술의 꿈을 잠시 보류하고 S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뒤, CF와 시트콤 <레인보우 로망스>, 드라마 <변호사들> <마이걸> 등에서 활동했는데, 연기자로서 본격적인 출발은 <좋지 아니한가>다. 시트콤에서 보여준 과장된 연기를 벗어던지고, 예쁘게 보이지 않도록, 덤덤하게 영화에 녹아든 황보라. 그가 품은 물음표에 관객이 느낌표로 화답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떨리는 가슴
고아성 (1992~)
1천만 관객 영화 <괴물>은 또 하나의 ‘국민 여동생’을 낳았다. 아직은 누군가의 여자친구라기보다 누군가의 딸이고 조카이며 동생 같은 고아성. 그러나 “아~, 귀엽다” 하고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코 다칠지 모른다. 이제 겨우 16살이지만 고아성은 웬만한 어른보다 더 성숙하고 확고한 세계관을 구축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이 소녀, 표현력도 예사롭지 않다. “연기가 좋은 건 거짓말이라서요. 왜 좋은지 알면 질릴 것 같아요. 가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대화할 때 학교, 나이, 친구 이런 거 묻잖아요. 재미없잖아요. 있는 상태로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럴 때 살짝 거짓말하고 싶어요. 나이 몇살이니 그러면, 서른여덟이오, 이렇게요. (웃음)”(<씨네21> 594호 인터뷰 중) 이미지 광고와 뮤지컬, 어린이드라마 등에서 일찌감치 활동해왔으나 고아성의 진가를 알린 계기는 MBC 드라마 <떨리는 가슴>. 이것이 인연이 되어 <괴물>에까지 이른 고아성은, 가족의 울타리에 속한 동시에 독립된 존재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여줬다. 그리고 지금은 마음의 템포를 약간 늦춘 채, 신작 <즐거운 인생>에서 정진영의 딸을 연기할 채비를 마쳤다. 여전히, 떨리는 가슴을 품고.
문근영 (1987~) 김주혁과 함께 출연한 <사랑따윈 필요없어>는 마치 “난 이제 소녀가 아니에요”라고 선언하는 듯한 영화다. 통통한 젖살이 빠지고 소녀에서 여인으로 가는, 한창 그 과도기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는데, 누가 뭐래도 문근영은 역시 ‘국민 여동생’이다. 드라마에서, CF에서, 영화에서 국민들의 비타민 구실을 했던 그. 지금은 대학생 문근영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지만, <장화, 홍련> 같은 문제작으로 다시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이연희 (1988~) 15살 때 우연히 SM엔터테인먼트 주최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 지원한 게 계기였다. 이후 몇몇 CF와 <해신> <부활> 등의 드라마를 거쳐, 차세대 퀸으로 만들어준 <백만장자의 첫사랑>에서, 이연희는 딱 그 나이 때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노련하진 않지만 신선한 무정형의 이미지. 그는 지금 이명세 감독의 <M>에서 유령처럼 돌아온 신비로운 여인으로 분해, 고유의 색깔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박민지 (1989~) 15살의 모성? <제니, 주노>를 보면서 뭐 저런 당돌한 아이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후 그 아이의 출연작들을 보니, 마냥 철없고 예쁜 여동생 같았던 그 아이가 배우 박민지로, 또 인간 박민지로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것이 보인다. 조창호 감독의 <피터팬의 공식>에서 성장통을 앓는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 이후, 최근에는 KBS 드라마 <최강! 울엄마>에서 과격하고 터프한 10대 소녀로 출연한 박민지. 아직은 신나게 성장보고서를 쓸 때다.
고아라 (1989~) 문근영이 국민 여동생으로 인기를 떨치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고아라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2003년 KBS 성장드라마 <반올림#>을 통해 한동안 ‘옥림이’로 불렸던 그. 이후 3년 만에 SBS드라마 <눈꽃>으로 성인 연기자로서 신고식을 마쳤다. 김희애를 상대로 전혀 꿀리지 않는 모습은 그가 단지 예쁘장한 하이틴 스타가 아닌, 가능성 풍부한 배우임을 증명했다. 최근에는 일본-몽골 합작영화 <푸른 늑대>에 출연해 연기의 무대를 넓혔다.
박신혜 (1990~) 시작은 소녀가 아니라 여인에 가까웠다. TV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어린 시절을 거쳐 <천국의 나무>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앳된 얼굴에 비해 그가 품은 슬픔은 지나치게 조숙했다. 그러나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나 최근 출연 중인 <궁s>의 도도한 이미지에 이르러 비로소 제 나이를 찾은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올 여름 개봉 예정인 호러영화 <전설의 고향: 쌍둥이자매비사>는 박신혜의 연기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