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와 조한선의 공통분모는? 고집스레 꽉 다문 입술과 담백한 눈매 정도? 이번 가을, 맹렬하게 성장 중인 두 남자의 교집합은 어느 때보다 눈에 띈다. <비열한 거리> <아이스케키>의 연이은 도착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진구는 2006년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신작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개봉을 기다리는 상태. 애정에 굶주린 남녀의 사랑담인 <사랑따윈 필요없어>에서 진구는 김주혁이 연기하는 ‘넘버 원 호스트’의 추종자 미키를 향해 갑작스레 방향을 틀었다. “쬐끄만 기집애 하나 땜에 맛이 갔구나, 완전히. 아주 환장을 하셨어! 돌았어? 여기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씨발. 죽고 싶지 않으면 정신 좀 차려!” 사랑에 비틀거리는 줄리앙을 향해 울먹이는 미키는 또 어떤 감흥을 일으킬까?
복수에도, 연민에도 뜨겁게 반응하는 이 남자는 시트콤 <논스톱3>로 이름을 알린 쿨한 조한선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라고? 소녀의 주먹질에도 강제로 입을 맞추고 병든 연인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던 바람둥이 청년은, 그러나 이후 의외의 행보에 나섰다(진구 역시 젊은 배우들의 등용문 격인 <논스톱> 시리즈 중 <논스톱5>에 출연했다). <공공의 적> <실미도> <역도산>을 거침없이 통과한 설경구와 <열혈남아>에 출연, 생애 첫 조폭 연기에 도전한 것. “건들면 달려등께 건달 아닙니까?”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머금은 새끼 건달 치국은 “형님도 건달 이전에 사람 아닙니까?”라며 시퍼렇게 날이 선 재문(설경구)에게 겁없이 대든다.
내뱉는 말은 까칠해도 마음만은 따끈따끈한 두 남자. 위기에 빠진 인생 선배 아래서 똘마니 노릇을 하고 그들의 몰락으로 극심한 성장통을 앓는 두 남자. 아름다운 청춘으로 박제되기엔 피가 끓는 그들이 같지만 다른 표정을 품고 스크린에 돌아왔다. 매력적인 배우, 진구와 조한선의 이력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진구남자로 크기 위해 정글에서 살아남다
남자로 크기 위해 진구가 이겨낸 것은 바로 정글의 법칙이다. 형님의 품에 칼을 찔러넣던 서늘한 눈빛의 종수(<비열한 거리>)는 아비 없이 자랐으나 번듯한 인백(<아이스케키>)을 거쳐 선망의 대상인 호스트 선배를 애증하는 미키(<사랑따윈 필요없어>)로 탈바꿈했다. 아버지(혹은 형)를 죽이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동정하는 질긴 뫼비우스의 띠. 성공적으로 자기 둥지를 틀기 위해 진구는 머리 위에 올라선 누군가를 철저하게 모방하거나 과감하게 처치해야 했다. 특히 진구에게 ‘떠오르는 별’이라는 칭송을 안긴 종수라는 캐릭터는 드라마를 보며 눈물짓는 마음 여린 동생에서 완벽하게 상대를 배반하는 악당으로 성공적으로 가면을 바꿔 쓴다. 살인을 통해 되물림되는 잔인한 권력구조. 2인자 종수가 1인자로 격상되는 순간, “네, 형님!”이라는 대답과 함께 고개 숙이는 이 남자에게 어디 그런 욕망이 숨어 있었나 의심부터 떠오른다. 되씹을수록 먹먹한 그 진폭은 인백을 통해서도 우러났다. 공산당이라는 꼬리표를 안고 죽은 인백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 멍에를 넘겨줬다. 아이스케키 장수 겸 밀수업자 아래에서 일하는 인백은, 그래서 전라도 사투리처럼 거칠고 투박하지만 아빠를 그리는 영래에게만은 더없이 부드럽다. 키 작은 영래를 내려보는 인백의 눈길에는 오래도록 가둬놓았을 깊은 상실감과 측은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진구의 정글은 전라도 작은 도시에서 호스트의 세계로까지 뻗어간다. 조심스럽지만 과감한 방법으로 스크린 속 정글에서 살아남은 진구, 아니 미키는 줄리앙의 쇠락에 눈물 흘릴지언정 자신의 소망을 꺾지 않을 것이다.
이병헌의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하다
입술에 피멍이 가실 리 없어도 18살 인하는 자꾸만 싸움판에 뛰어든다(드라마 <올인>). 창녀, 건달들과 어울리며 일찍이 세상의 악의를 터득한 인하는 외삼촌과 함께 기차에 올라탄 뒤 우연히 수연과 만난다. 어머니와 닮은 수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인하의 끈질긴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건달패와의 싸움으로 감옥에 갇힌 인하는 어른이 돼 다시 수연의 곁으로 돌아온다. 어른 인하의 얼굴에 겹쳐지는 인물은 바로 이병헌이다. 진구의 얼굴 어디에 이병헌의 얼굴이 숨었을까 싶지만 두 배우는 사실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시선, 단정한 얼굴선,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를 동시에 가졌다. “선 굵은 연기에서 가볍고 귀여운 모습까지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병헌 선배가 가장 존경스럽다.” 두 번째 스크린 출연작 역시 ‘롤모델’이라 토로한 이병헌과 함께였다. 붉은 신호등 앞에서 위험을 선택하는 민기로 출연한 진구는 이병헌이 연기하는 위험에 처한 조직 선배 선우에게 간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달콤한 인생>). 이병헌과 말썽이 생긴 룸을 향해 말없이 걸어갈 때, 공사장에서 이병헌을 만나 물건을 넘겨줄 때 나란히 혹은 마주 선 진구는 어쩌면 이병헌의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이병헌을 따라잡는 게 목표다.” 호기 어린 선언이 언제쯤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지 기대되는 것은 허튼 말을 뱉지 않는 진구의 든든함을 믿기 때문이다.
사랑따윈 필요없어
소녀가 야무지게 뺨을 휘갈기지만 소년은 담담하다. 오히려 뺨을 어루만지며 보일 듯 말 듯 미소까지 머금는다. 사랑의 날카로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을 터득한 철든 인하는 한결같은 진구의 표정에서 실체를 얻었다. <올인>이 복수를 넘고, 범죄를 넘고, 나라를 넘은 뒤에도 존재하는 사랑을 그렸다면 그 뿌리는 소녀의 따귀에도 흔들리지 않던 진구의 단단함에 있다. <올인>을 제외하면, 그러나 진구의 출연작에서 사랑의 존재를 찾기는 어렵다. 여자 귀신과 자객의 작대기놀음으로 시작하는 <낭만자객>이 그나마 예외라고 할까. 각이라는 이름의 어리버리한 자객은 자신을 왜 선택했냐며 애교를 떠는 상대에게 “폭탄제거반인데요”라고 실토해 실소를 자아낸다. <달콤한 인생>의 민기나 <비열한 거리>의 종수처럼 조폭 역을 맡았을 적에도 진구는 여자들과 어울리기보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덩치들과 함께인 때가 많았다.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미키는 한발 더 나아가 사랑으로 휘청대는 줄리앙을 향해 “그 여자를 버리라” 차갑게 충고한다. 속의 것을 뜨겁게 뱉어내는 이 인물은, 그럼에도 누구보다 기쁘게 줄리앙의 해피엔딩을 축복할 것이다.
배우 이전에, 촬영감독 아버지의 아들
진구의 아버지는 <수탉>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계약 커플> <아찌 아빠> 등을 찍으며 녹록치 않은 충무로 경력을 쌓은 진영호 촬영감독이다. <비열한 거리>의 VIP 시사회에 참석, “조연이 그렇게 튀면 안 된다”는 칭찬이자 비판의 말을 남겼다는 일화에서도 느껴지건대 그는 필시 진구에게 자상하고도 엄한 조언자일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진구의 얘기를 아래에 담았다.
“아버지의 영향이 분명 있었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는 그 판에서 절대 못 버틴다고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올인>의 이병헌 선배 아역으로 데뷔는 수월하게 했지만 그 다음부터 4년 동안 정말이지 바닥이 안 보이는 오디션 탈락의 연속이었는데, 아버지 도움 없이 버틴 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서 아버지를 미워했어요. 또 시나리오를 보며 엄마가 홀로 아이 키우면서 겪는 심리적 고충이 찡하게 다가왔죠. 그래서 나중에 <아이스케키>를 보면서도 내가 나오는 장면보다 신애라씨가 지빈이를 때리거나 쓰다듬는 장면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사랑따윈 필요없어>의 미키
“차라리 도망을 가! 그 여자가 도대체 뭔데!”
회삿돈을 횡령해 돈을 갖다바친 여자 손님 때문에 철장 신세를 진 줄리앙(김주혁)은 산더미 같은 빚을 갚으려고 한 소녀에게 접근한다. 시각장애자인 류민(문근영)이라는 소녀는 근래 세상을 떠난 재력가의 딸로 거액을 상속받았다. 줄리앙의 운전사로 일하던 류진이 민의 친오빠였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거액을 손에 넣을 위치에 있었지만 교통사고로 이미 세상을 뜬 상태. 류진의 휴대폰을 지니고 있던 줄리앙은 그로 가장해 유산을 손에 넣을 궁리를 한다. 줄리앙의 똘마니 미키(진구)는 곁에서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보는 인물이다. 넘버 원 호스트를 꿈꾸는 미키는 줄리앙의 휘광이 부럽다. 냉담하고 침착한 줄리앙은 여자를 마법처럼 녹여놓고 미키는 그를 질투하는 한편 숭배한다. 빛을 잃은 민의 눈동자에, 그러나 줄리앙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잔인한 호스트인 줄리앙의 심장이 요동치고 모든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려는 찰나 미키는 감정을 폭발시킨다. “선 굵은 연기가 편하고 밝거나 가벼운 캐릭터는 아직 어색하다”는 진구의 고백처럼 미키는 선이 굵고 어두운 느낌이 강한 호스트 캐릭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