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 사람의 아들을 도와야 나의 아들을 도울 수 있다.’ 일본인 아버지와 중국인 아버지는 각자 자신의 아들들에게 ‘죄’를 지었다. 이들이 다시 아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상대방 부자의 화해를 도와야 한다. 이것은 장이모와 후루하타 야스오가 공동 감독한 <천리주단기>의 기본 설정이다. 잘 만들어진 멜로드라마인 이 영화는 애틋한 부정(父精)의 선과 동북아시아의 정치문제라는 굵직한 선을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원래 ‘천리주단기’라는 말은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는 뜻으로, 조조에게 생포된 관우가 한나라를 탈출하여 유비를 만나러 가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흥미롭게도 ‘천리주단기’는 영화 속 경극의 제목임과 동시에 그 경극을 찍으러 천릿길 중국 여행을 떠나는 일본 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칠순이 넘은 다카타(다카쿠라 겐)는 오랫동안 어촌에서 떨어져 살다가 간암 말기의 아들(목소리 연기 나카이 기이치)을 보기 위해서 도쿄로 상경한다. 그러나 아들은 배신감에 문병을 거절한다.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며느리(데라지마 시노부)는 다카타에게 비디오테이프를 건넨다. 그것은 경극을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직접 중국으로 원정 가서 공연을 촬영한 기록물이었다. 더불어 테이프에는 다음해에 경극 <천리주단기>를 찍으러 오겠다고 아들이 경극 배우 리쟈밍에게 약속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의사소통의 차단을 이어주는 역할을 영상 기록물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다카타가 아들의 못다한 소원을 대신하여 중국으로 떠나는 목적과 떠나게 된 계기 모두가 비디오 촬영물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그가 중국으로 가서 부딪힌 난관들을 해결하는 데 사진과 비디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 난관이란 경극 주연배우 리쟈밍이 폭행 사건으로 수인 신세가 돼버린 상황이다. 중국 법무부 관료는 외국인의 감옥 내부 촬영을 거부한다. 또한 겨우 성사된 감옥 안에서의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리쟈밍은 ‘일본 관광객의 아들을 위해 공연을 하기에는 자신의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일본 전후 세대간 단절의 문제는 여기서 어느새 동북아시아의 정치문제와 중국 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로 발전한다. 일본인은 자신의 아들에게 참회하려면 중국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참회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든다. “죄를 속죄한다!”는 구호를 연발하면서 제식 훈련을 하는 수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일차적으로 중국사회의 폐쇄적인 전체주의 규율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회적으로 일본인의 과거사 반성에 대한 촉구의 메아리로도 들린다. 여하튼 다카타는 영상물을 찍고 보여줌으로써 중국 관료와 리쟈밍의 마음을 움직인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천리주단기’는 무협적인 무용담을 주축으로 했다. 반면 그 현대적 버전인 이 영화에서 중심축은 ‘세대간에, 국가간에, 공권력의 안팎에서 막혀버린 말의 소통을 대신하는 영상 이미지의 무용담’으로 옮겨졌다.
‘언어의 행패’에 ‘빛의 소통’을 대치시키는 것은 사실 장이모의 일관된 작품 세계이기도 하다.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에서 그는 노동과 성의 에너지가 충만한 빛의 공간을 각각, ‘일본 제국’, ‘종법’, ‘가풍’이라는 ‘말의 체계’에 대항시켰다. 하지만 5세대 운동의 저항성이 살아 있었던 초기 작품에서조차 언어의 네트워크에 대한 자포자기와 허무주의의 냄새가 풍겼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중국을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로 가공함으로써 서방 세계를 향해 상품화하는 전략이었다. <천리주단기>에서 소개되는 빼어난 절경의 윈난성 풍경이라든가 촌락 사람들의 정이 넘치는 인심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 관광객의 시선에 포착된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다카타가 리쟈밍의 아들인 양양(양젠보)을 면회시켜주려고 감옥으로 데리고 오다가 윈난성의 미로 같은 계곡 안에 갇혀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중국은 도시인이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삶을 반성하고 거기서 얻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 순례하는 신비스러운 공간이 된다. 일본인 아버지는 중국인 아들의 뒤를 정처없이 따라가지만 아들이 어디를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위험한 산책으로 그들은 길을 잃는 대신, 서로에 대한 애정을 얻는다. 이것은 확실히 수행 혹은 순례의 은유다.
다카타가 영화 초반부에 일본에서 아들의 면회를 시도하는 장면은 후루하타 야스오가 감독했다. 그는 국민배우인 다카쿠라 겐과 함께 <철도원>(1999), <호타루>(2001)를 감독한 것으로도 우리에게 낯익다. <호타루>는 <천리주단기>의 전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영화 사이에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거기서 다카쿠라 겐은 역시 어촌에 살면서 가족(아내)의 병을 계기로 과거를 되짚는다. 태평양 전쟁 당시 가미카제로 ‘산화’한 한국인 소위의 유품을 전달하기 위해서 주인공 노부부가 안동의 하회마을을 방문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군국주의에 대한 참회의 여정이라기보다는 인생의 회한을 강조함으로써 은연중에 일본도 같은 피해자라는 느낌을 풍긴다. 물론 <천리주단기>는 <호타루>에 비해 훨씬 비정치적이고 따스한 멜로물이지만 다카쿠라 겐이 과거의 제국을 돌아다니며 한국과 중국의 ‘원시적 열정’에 경탄하고 자신의 쓸쓸함을 곱씹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장이모 감독과 다카쿠라 겐의 우정은 각별해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장이모 감독은 그와의 신뢰를 관우와 유비의 관계에 비유할 정도였다. <바이브레이터>에서 주목받은 데라지마 시노부가 부자간의 화해를 이끌어내려는 며느리 역으로 출연했으며 시골 소년 양양 역은 7만명 중에 뽑힌 양젠보가 연기했다. 이 밖에 이전 영화들처럼 대부분 비전문 배우인 중국 현지인들이 직접 연기했다. 촬영지 윈난성 일대는 초원과 호수, 설산 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일년에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는 명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