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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배우는 미국 현대사 [1] - 입문편
오정연 2006-03-15

역사와 영화의 공통점. 첫째, 대부분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진다. 둘째, 어느 한쪽의 말만 듣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강한 만큼 잔인한 나라 미국의 역사, 그리고 미국영화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역사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쳐왔고, 미국영화는 전세계인들이 보아왔다. 당신이 알아야 할 미국 역사의 모든 것…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것들이 이미 영화에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영화 속, 우리가 미처 주의깊게 살펴보지 못했던 미국 현대사의 다양한 빛과 그늘이 그곳에 있다. 배우 조지 클루니가 감독으로서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굿 나잇 앤 굿 럭>도 자국의 뒤틀린 역사를 냉정하게 들쑤신다. 알면 알수록 재수없게 느껴진다고? 그래도 아는 게 힘이다.

입문편: 다음 영화들과 미국의 특정시대를 연결해보자.

어떤 식으로든, 영화는 사회를 반영한다. 대개 미국의 현재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보여주는 다음의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이란 곳은 날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반드시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진실은 사실보다는 상상력을 통할 때 더욱 분명해지게 마련이다.

학살 혹은 약탈

미국의 기원 19세기 중반/ <갱스 오브 뉴욕> <천국의 문>

<갱스 오브 뉴욕>

<천국의 문>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이후. 겉보기에는 평등 이념을 실천한 전쟁을 끝내고 서부 개척을 완성한 이 시기는 진정한 의미의 미국이 탄생한 시기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가. 치사하고 추하다. 아니, 지금처럼 고상한 이념으로 치장할 줄도 몰랐던 탓에 더욱 적나라하다. 19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두편의 영화는 미국 동부의 대명사인 뉴욕의 탄생과 미국 서부개척사를 다룬다. <갱스 오브 뉴욕>은 원주민(인디언이 아니라, 일찌감치 유럽에서 건너온 이들)과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갈등을 그렸고,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저주받은 걸작 <천국의 문>은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가난한 이민농부들과 이들을 철저히 이용하는 대목장주들의 충돌을 다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학살과 약탈의 역사는 동부든 서부든 매한가지였음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때부터 위험한 꿈이고, 프런티어 정신은 사기를 감추기 위한 말장난임을 확인시켜준다.

속이거나 훔치거나

금주법의 20년대, 대공황의 30년대/ <시카고> <언터처블> <모던 타임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모던 타임즈>

<언터쳐블>

법적으로 술을 금지한 시대가 있었다. 조선시대 얘기가 아니다. 1920년대 미국이 그랬다. 금주법은 1차 대전의 전범인 독일인에 대한 증오와 전시 식량 통제의 결과 발효됐고, 대공황이 시작되는 1929년까지 미국의 10년을 지배했다. 덕분에 술을 밀수하는 마피아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많은 영화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법에게 감사하는 중이다. 이 시대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마피아 알 카포네는 수많은 영화에 직접 등장하거나 영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언터처블>은 알 카포네와 그 일당을 소탕하기 위해 결성된 특수수사대를 주인공으로 한다. 이 시기 시카고에는 이른바 황색 저널리즘이 기승을 부렸는데, 이 대목은 살인을 저지른 두 코러스걸이 미디어와 법정을 쥐락펴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시카고>를 참고하면 된다. 광란을 잠재운 것은 또 다른 광란, 바로 대공황이다. 대량생산 시스템, 대량 실업, 노동운동, 뉴딜정책 등등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는 이 시대 속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밀려다닌 찰리의 모험 <모던 타임스>는 위대한 풍자보다는 리얼한 관찰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 모든 것이 부족하다보니, 부자의 돈을 훔치는 것만으로도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30년대에 실존했던 남녀 2인조 갱의 활약과 최후를 다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반항의 60년대, 반혁명의 70년대/ <졸업> <이지라이더> <아이스 스톰> <컨페션>

<아이스 스톰>

<컨페션>

반전, 인권, 페미니즘, 히피, 음악과 마약, 기성세대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과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상상력 등이 60년대에 태어났다. 그 시기는 심지어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까지 그리워하는 시대로 남았다. <졸업>은 대학 졸업 직후의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유혹과 사랑을 다룬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는 딸의 남자친구를 유혹하고, 무능력한 부모는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인간관계에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다. 당시 젊은이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69년에 만들어진 <이지라이더>는 점점 멀어져가는 60년대를 향한 마지막 사랑을 고백한다. 마약밀매로 돈을 챙겨 오토바이 여행길에 오른 두명의 젊은이들은 자조를 거듭한다. 그들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집단 습격을 받아 결국 숨을 거둔다. 1973년 미국 코네티컷을 배경으로 중산층 가족이 콩가루 가족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린 <아이스 스톰>은 제목만큼이나 싸한 정조를 지녔다. <아이스 스톰>이 너무 우울하다면, 70년대를 풍미했던 TV 제작자 겸 진행자가 실은 CIA의 비밀요원이었음을 고백하는 블랙코미디 <컨페션>의 발랄한 어투를 음미해보자. 타락을 조장하던 당시의 대중문화와 이에 기꺼이 뛰어들던 대중들, 이들의 광대짓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냉전 상황 등 당시 미국 사회 전체를 유머의 대상으로 가볍게 버무린다.

화려한 자신감

확신과 과장의 80년대/ <자유의 댄스> <플래시 댄스> <백 투 더 퓨처>

<플래시댄스>

바야흐로 신자유주의의 화려한 탄생기. 50년대 이후 경제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계속되는 냉전에 레드컴플렉스도 여전했지만, 적어도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했던 모양이다. 사회를 반영하는 데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당시 대중문화의 첫째 목적. 그것은 대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회의보다는 확신이, 반성보다는 과장이 스타일로 자리잡은 이 시대의 단면은 당시의 패션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화려한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댄스영화가 한 시대를 풍미했고, 댄서를 꿈꾸는 용접공 소녀의 신데렐라 스토리 <플래시 댄스>는 이러한 댄스영화의 시초다. 또 이 시기는 과거와 미래를 종횡무진하는 <백 투 더 퓨처>, 보물을 찾아 전세계를 누비는 <인디아나 존스> 등 현실을 잊게 해주는 흥미진진한 모험물의 시대이기도 하다.

범죄의 사회사

실제 범죄를 소재로 한 영화들

1950년대를 풍미했던 연쇄살인범 에드 게인은 할리우드 호러, 범죄물에 가장 많은 영감을 제공한 장본인 중 한명이다. 기독교 광신도인 어머니 밑에서 억압적인 유년기를 보낸 게인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른다. 2003년에 매끈하게 리메이크되기도 한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게인의 엽기행각을 거의 그대로 다루면서 미국 남부에 팽배한 가부장적인 마초의식까지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밖에도 게인의 형제는 많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게인과 그 어머니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싸이코>를 만들었고, 스티븐 킹은 <캐리>를 썼으며, 가죽을 뒤집어쓴 살인마는 <양들의 침묵>에서 되살아난다.

<몬스터>

사회의 밑바닥에서 남몰래 썩어가던 집단적 무의식이 범죄로 드러난다. 아픈 과거를 간직한 소수자, 여성이나 동성애자와 관계된 범죄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여섯명을 살해한 뒤 전기의자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몬스터>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아일린 워노스와 그가 사랑한 셸비의 처절한 애정과 범죄행각을 다룬다. <몬스터>가 실존인물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면, 남장소녀의 생생한 일상과 비극적 최후를 다룬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신문의 단신으로 잊혀질 뻔했던 주인공을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묘사한다. 장난삼아 시작한 남장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평범한 주인공은 성폭행 끝에 살해당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결국, 범죄가 아닌 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편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