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6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나이 지긋한 사람들과 옛날 할리우드영화를 보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죠. “요새는 저런 영화는 못 만들어.” 이런 한탄조의 회상은 너무나도 진부해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어렸을 때 ‘추억의 영화’에 대한 한탄조의 멘트를 지독하게 자주 반복하던 모 영화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를 거의 증오하기까지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사실이기도 합니다. 당연하죠.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이 50년대 사람들처럼 영화를 만든다면 그게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니겠어요?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영화 <지지>도 절대로 2000년대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입니다. 왜? 클래식 할리우드의 그 예스럽고 풍요로운 느낌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내용이 ‘정치적으로 공정’한 요새 만들어지기엔 문제가 많답니다. <지지>의 내용을 기억하시는지요? 중년의 사교계 신사가 15살짜리 소녀와 놀다가 그만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지>는 뮤지컬 버전 <롤리타>는 아닙니다. 요새 나오는 틴에이저의 성을 노리개로 삼는 수많은 영화들에 비하면 얌전하고 로맨틱하며 품위있죠. 문제는 그동안 관객의 태도가 바뀌었고, 그 결과 영화의 그 태평스러운 어조가 아무래도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모리스 슈발리에가 그 감칠맛나는 불어 악센트로 부르는 첫 번째 노래를 기억하시는지요? “Thank Heaven for Little Girls….” 슈발리에의 캐릭터 오노레 드 라사이유에게 이 노래는 단순히 아름다운 인생 예찬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관객에게 그 노래는 망령이 도를 넘어선 음탕한 페도파일의 주제가로 들리죠. 궁금하시면 아무 검색 엔진에서 ‘Thank Heaven for Little Girls’를 찾아보세요. 어떤 사이트들이 나오나.
그러나 냉소주의는 여기서 그만 멈추기로 하죠. 그렇다고 <지지>가 정말로 그런 식으로만 기억되는 건 아니고, 오노레 영감도 벨 에포크 버전 험버트 험버트는 아니며, 영화 자체도 좋으니까요.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면 ‘정치적 공정성’은 살짝 뒤로 밀어놓고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와 빈센트 미넬리가 만들어낸 적당히 천박한 호사스러움을 즐기게 됩니다.
<지지>는 한때 번역된 콜레트의 소설들을 모조리 긁어모았던 자칭 콜레트 팬인 저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쩌다보니 전 원작인 중편소설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영화를 보았으니까요. 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죠. 아마 원작을 읽은 지 몇 주일 뒤에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해주었을 거예요. 원작의 뒤바뀐 스토리 라인이 맘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나는군요. 당시 제가 꽤 순수주의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그 결말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뮤지컬의 화려함에 지나치게 목을 매다보니 극적 구조가 이상해져버린 것이죠. 그러나 레슬리 캐론과 모리스 슈발리에, 이미 패션사의 고전이 된 귀여운 스코틀랜드 격자무늬 스커트, 알란 제이 라너와 프레데릭 로의 달콤한 가사와 음악, 영화 전체에 담뿍 묻어 있는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쾌락주의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토록 증오했던 그 영화음악 프로그램 담당자처럼 한숨을 폭폭 내쉬며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거죠. “요샌 이런 영화는 못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