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지만, 화면 속의 소품 하나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기억되는 영화장면은 사실상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풀 메탈 자켓>의 그 유명한 `화장실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얗고 깨끗하게 닦여 있는 변기, 너무나도 줄이 잘 맞아 보이는 새하얀 타일의 벽면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튀는 새빨간 핏덩이들. 이미지에 관해서는 일종의 강박증환자라고도 불리는 거장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답게 <풀 메탈 자켓>은 이런 장면들을 정말 냉정하게 잡아냈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다보면 군대에 관한 화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주변에 온통 군대를 갈 사람, 군대에 가 있는 사람,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 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내는 내무반 이야기, 기합 이야기를 질리도록 듣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들의 군대 이야기에서 피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강의실에서, 혹은 술자리에서 그들의 군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풀 메탈 자켓>의 화장실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 때문인지, 최근까지 나는 전쟁영화를 의식적으로 꺼려왔다.
이런 강박증에서 풀려나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풀 메탈 자켓>이 DVD로 출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약간 망설이다가 마침내 봐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각인되다시피 기억하고 있는 그 `화장실 장면`의 충격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DVD를 통해 전달된 그 피의 느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억으로 남아 있던 것만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았다. 따지고보면 아무리 DVD라 할지라도 제작된 지 15년이 다 돼가는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돋보이게 해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DVD로 출시된 <풀 메탈 자켓>이 이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전달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로 복원해서 그런가, 저게 어딜 봐서 10년이 훨씬 넘은 영화의 화질이야`하는 감탄을 자아내며 정신없이 봐버리게 된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를 상징하는 `화장실 장면`의 피 외에도, 화면을 생생하게 채우는 역동적인 핏줄기가 돋보이는 영화 후반부의 몇몇 전투장면은 여전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문제는 이런 <풀 메탈 자켓>의 DVD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 눈에 가장 띄는 것은 화면비율이 와이드 스크린 혹은 레터 박스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다. DVD를 보는 재미 중 하나가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좌우로 길쭉한 화면으로 영화의 전체 장면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아쉽게도 <풀 메탈 자켓>은 화면으르 빈틈없이 가득 채우는 풀스크린 타입을 채택하고 있는 것. 또 한 가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명성과 작업 스타일로 인해 잔뜩 기대했던 제작과정에 대한 서플먼트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
쉽지 않은 주제를 까다롭게 전달하기로 유명하기에 내심 기대를 걸고 있었던 감독과의 인터뷰는 물론이거니와, 초라영현장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제작과정도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좀처럼 보기 힘든 영화의 예고편이 제공되고 있는 사실을 다행이라 할 수밖에 없다.
김소연 / 미디어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