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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오해, 불가능한 이해
2001-01-05

김봉석의 오! 컬트

애초의 약속은 비디오 출시작만 쓰기로 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니 슬쩍 어기기로 했다. 어차피 약속이란 언젠가 깨어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강고한, 진심으로 다진 약속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속세에서 ‘영원’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약속도 그랬다. 힐러리와 재키. 힐러리 클린턴과 재클린 케네디의 이야기가 아니다. 힐러리와 재클린 듀 프레. 요절한 첼리스트 재클린 듀 프레의 삶을 언니 힐러리가 회상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힐러리와 재키>다. 98년에 만들어진 <힐러리와 재키>는 국내에 수입되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결국 개봉을 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나는 이 영화를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보았다. 열몇 시간 동안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비디오 아니면 책밖에 오락이 없는 상황이지만, 영화에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감동하기도 하지만. <힐러리와 재키>는 보는 순간 꼼짝 못하고, 연달아 세번을 봤다. 그리고 매번 눈물을 펑펑 흘렸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힐러리와 재키>가 상영 프로그램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힐러리와 재키는 너무나 다정한 자매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만으로 맞출 정도로, 그들은 통했다. 서로의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하나였다. 먼저 음악을 시작한 것은 힐러리였다. 질투심 강한 재키는 자기도 하겠다고 나선다. 무섭게 열중하는 재키는 마침내 힐러리를 따라잡는다. ‘천재적’이라는 평을 들으며 일약 스타가 되고 전세계 순회공연을 다닌다. 그러면서 자매는 조금씩 멀어진다. <힐러리와 재키>는 그 ‘멀어짐’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처음에는 힐러리의 관점에서. 재키가 화려한 순회공연을 다닐 때, 힐러리는 작고 소박한 자신의 생활을 꾸려간다. 가끔씩 들르는 재키는 여전히 제멋대로다. 힐러리를 질투하고, 그녀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재키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홀로 공연을 다니며, 그녀는 처절하게 외로웠다. 첼로를 추운 베란다에 내놓아, 공연을 망치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겨우 짬을 내 돌아와보니, 그토록 그리워했던 힐러리는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힐러리와 재키의 사이는 조금씩 벌어져 간다. 그리고 재키는 병에 걸리고, 죽어간다.

지음이라 했던가. 보는 것만으로, 듣는 것만으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던 그들은 그렇게 이별을 고한다. 완벽한 이해란, 결국 불가능한 일일까. 뒤늦게 힐러리는, 과거의 행복한 시절을 떠올린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만했던, 그 순수했던 시절을. 그러나 서로의 ‘생활’이 지속되면서, 그들은 자기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한다. 하지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게 멀어지던 시절에, 마음을 다잡는다고 서로를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의 믿음은, 순수한 이상이다.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상을 가지고, 현실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려 애쓸 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슬프지만. 그럴 때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그 어딘가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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