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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상영의 추억,엘 토포와 부천영화제

도통 비디오란 것과 친하지 않아, 보라고 빌려주는 것도 집에 그냥 굴러다닌다.남들은 DVD다 어쩐다 최첨단의 문명의 기기를 만끽할 때 난 어디서 버리려는 TV와 비디오를 주워서 방에 떡하니 가져다놓고는 리모컨까지 못 주운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TV를 그냥 ‘시계’처럼 틀어놓고, 비디오를 만화책을 두는 공간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영화들은 되도록이면 ‘극장’에서 보려고 한다. 이것은 굳이 주변기기 탓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찜통 같은 요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알렉산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를 드디어 봤다.

90년대 중반 <성스러운 피>를 극장에서 본 이후 이 전설의 영화를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멕시코영화제의 첫 상영작인 이 작품은 오후 3시부터 시작인데 내 마음은 한달음에 가버려 12시부터 가서 열지 않은 매표소 앞을 얼쩡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런 나같은 사람들이 몇명 그 시간부터 얼쩡 거린다. 무더운 날이라 심슨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진 목이 늘어져 낡아빠진 티셔츠를 입고 서성이는 나 못지않게, 아톰이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 원숭이가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 이 뭐란 말인가… 이 오타쿠들 같으니라고…. 또 모두 하나같이 혼자 와서 서성인다.

가끔 이런 데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보며 난 안심을 한다(왜 안심을 하지??). 그리곤 그 영화를 보았다. 몰입이라는 게 뭔지… 사람들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너무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난 극장에 오면 항상 뒤의 사이드 자리에 앉아서 보는데 (자칭 변태자리) 가끔은 진정한 변태마냥(?) 영화를 보는 관객의 뒤통수와 옆얼굴을 보곤 한다.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은 어떤 모습일까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똘똘 뭉쳐 스크린에 시선을 내리꽂고 있다. 입을 벌리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모두 몰입의 증거 아닌가…. 그리고 또 나는 다시 한번 안심한다(정말 안심을 왜 하지???).

이 영화 이렇게 모두의 얼을 빼버리고 말았다. 극악무도한 화면에 집단최면에 걸렸다가 모두 풀려난 기분이다. 그렇다. 집단최면. 이런 것에 걸리고 싶은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비디오를 보면서가 아니라 공공의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와 함께 공감대를 이루는 것 말이다. 깍듯한 인생을 사신 현자들의 인생을 설파하는 ‘종교’말고 뒤죽박죽 혼란투성이의 다양한 감독들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영화’에서 취향에 따라 집단무의식에 걸려들고픈 맘이다. 그리고 같이 안심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은 주성치 영화를 볼 때도 나타난다.

<희극지왕>을 동대문의 어느 극장에서 보는데 거기서 비슷비슷한 차림에 뭔가 음울해 보이는 소년소녀들 패거리, 영화관에서 보기 쉬운 발랄한 남녀 커플은 이상하게 없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와서는 킬킬거리며 보다가 나중엔 급기야 모두들 울고만 영화 <희극지왕>에서도 난 외로운 공감대를 관객과 느끼며 그리곤 예의 그 안심을 하며 비상구를 터덜터덜 내려왔었다.

해마다 여름에 서울 가까이에서 하는 부천영화제에서도 이런 집단무의식 같은 공감대를 극장에서 심야상영을 보며 느낄수 있다. 영화제라는 좀더 개방된 분위기 이므로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마음껏 환호도 하고 야유도 한다. 방석도 가져오고 긴옷도 가져온다. 맛난 음식을 싸오는 알뜰한 사람도 있고, 삼각김밥과 천하장사 소시지에 야참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이렇게 꼬박 환호하며 야유하며 괴이쩍은 영화와 함께 밤을 공유하고 나면 모두들 공범자 의식 같은 것이 있는지 친구라도 된 듯 담배도 빌려주고 음료수도 나눠준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쉬며 안심한다. 흐흐흐… ‘난 혼자가 아냐’ 그러며…. 하지만 심야상영 뒤 이른 새벽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낡은 티셔츠에 머리 긁적이며 혼자 지하철역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갈 것이다.

사족: 지지난해엔 심야상영 보는 동안 태풍이 몰아쳐서 새벽에 나와보니 가로수들이 모두 뽑혀 있었다. 이른 새벽에 넘어지거나 뽑힌 가로수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은 아주 판타스틱하다. 밤새 괴이쩍고 악몽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살았고 밖에 태풍이 몰아쳐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도 우린 살아남았다라는 의기양양함이라고나 할까…. 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