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무척 사랑했었지. 꿈속에서….” - 송유
이 대사를 읊는 주윤발의 나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아찔했다. 미스터리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게 된 임청하 앞에서 양미간을 찌푸리며 과거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주윤발의 표정을 다시 보기 위해 비디오를 수없이 리와인드했다. 그러나 내 꿈속에서 주윤발은 항상 한국말로 대사를 친다. “예전에는 무척 사랑했었지.” 성우 신성호 아저씨의 목소리로 말이다.
관금붕이나 허안화 영화들의 프로덕션디자이너로 알려졌던 감독 구정평의 <몽중인>은 1989년 피카소극장에서 조용히 개봉했었다. 원래는 1986년 작품이었으나, 1987년 신드롬을 일으킨 <영웅본색> 이후 시점이었다.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터프한 주윤발은 어디 가고, 두 연인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눈물 흘리는 주윤발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대스타였던 주윤발이 아니라 임청하를 안다고 뻐기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성룡의 <폴리스스토리>에서 커트 머리, 반바지 차림으로 나오는 아름다운 그녀를 점찍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뜨고 말 거야”라는 나의 예언을 2년이나 유예시킨 채 1990년 들어서야 <동방불패> <백발마녀전>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2천년 전, 꿈속의 연인인 임청하와 주윤발은 꿈속에서, 거울 속에서, 각자의 집에서, 복잡한 거리에서 서로를 보는 환영에 시달리다가 진시황 유물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밤을 함께 보내고, 한날한시에 태어난 사실을 알게 된다. 전생의 못 이룬 사랑이 현재에 환생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주윤발의 곁에는 8년이나 함께한 애인, 아리가 있었으니….
당시 난 임청하냐 아리냐를 두고 아끼는 후배와 논쟁을 했었다. 현실적이고 똑똑했던 후배는 2천년의 사랑이나 8년의 사랑이나 깊이는 같다는 아리의 대사를 반복하며 꿈속의 과거는 그저 하나의 기억일 뿐이라고 했다. 나에게 선택은 꿈속의 여인, 유에흥과 현실의 여인, 아리가 아니라, 임청하와 양설의였다. 그리고 대답은 역시나 보일락 말락 미소짓는 서늘하게 아름다운 임청하였다. 아리와의 이별을 어렵게 결심한 주윤발이 짐을 싸는 동안, 임청하는 그녀를 만나러 온 아리를 마주하고서는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어찌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오묘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 이후 혼자서 얼마나 그녀의 미소를 연습했던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도, 짝사랑이 실패로 끝났을 때도, 할 일을 앞두고 졸음을 쫓을 때도, <동방불패>를 오십번이나 본 선배의 기록을 깨기 위해서도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돌려봤다. 그럴 때마다 테라코타, 주황색, 암회색, 붉은색이 주는 마력에 사로잡혔고 빗속 이별의 키스와 함께 흐르는 임청하의 노래에 호흡을 멈추었다.
이야기와 색채와 배우들이 주는 매혹 외에도 이 영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의 순환, 정신과 육체의 가치문제, 기억과 잊혀짐 사이의 공간, 서구문화와 동양전통의 복합과 충돌, 이미지로 되돌아온 과거에 대한 판타지와 그 실제 등등. 세월과 인생의 두께를 더해가면서 배우가 아니라 이제는 의미로 더 깊이 다가온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일과 맞닥뜨렸을 때, 영겁의 인연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나중에 선연으로 남을 것인가를 <몽중인>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