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성영화제에서 제가 가장 기다렸던 영화는 레아 풀의 <상실의 시대>(Lost and Delirious)였습니다. 이 아줌마
영화를 극장 스크린으로 볼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 작품이 나중에 상영리스트에 추가되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어땠냐고요? 레아 풀의 전작들과는 달리 굉장히 통속적이고 단순한 영화였지만 여전히 재미있었답니다. 제가 억지로 끌고 간 사람들도 모두 이
영화의 용맹한 로맨티시즘에 푹 빠진 듯했습니다. 그중 한명은 어떻게든 이 영화를 감독의 경험과 연결하고 싶어하기까지 했습니다. 주인공 폴리를
영화 속에 그려진 것처럼 비극적인 어릿광대로 만들 정도로 격렬한 사랑을 저렇게 생생하게 그리려면 마땅히 비슷한 체험을 해야 한다나요?
그 추론은 보기만큼 그럴싸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 영화에는 수잔 스완이라는 캐나다 작가가 쓴 원작소설이 있고, 풀은 그런 비싼 사립학교를
다닐 만큼 부유한 집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실보다 감정에 대한 기억일 테니까요.
그러다 레아 풀의 전작인 <`Emporte-moi`>(미국 극장개봉 제목은 Set Me Free)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야말로
풀의 진짜 자서전적 영화였지요. ‘자서전적’일 뿐 정말로 ‘자서전’은 아니므로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걸 믿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유대인 아버지와 가톨릭 교도 엄마 사이에서 힘겹게 자라났던 이 틴에이저 소녀의 이야기에서 레아 풀의 어린 시절을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주인공 안나가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에 푹 빠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비브르 사 비>는 제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개인 취향이겠지만 사실 고다르의 영화 중 정이 가는
영화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1960년대 초 이 장래의 영화감독 아가씨가 스위스 어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흥분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객에게도 구체적인 사실보다는 감정이 더 중요한 것이니까요. 제가 <비브르 사 비>에 대해 무덤덤할지는
몰라도 안나가 그처럼 열심히 매달렸던 것처럼 한눈에 매료되었던 영화는 많습니다. 영화 속 안나처럼 안나 카리나를 닮은 선생님에게 반해 졸졸
따라다니거나 가출해서 매춘 전선에 뛰어들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거야 성격 차이겠죠.
<`Emporte-moi`>를 보면서 감동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이런 영화에 대한 열광이 꼬리를 물고 물면서 이어지는 그 과정이었습니다.
<잔다르크의 수난>에 나오는 마리아 팔코네티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는 안나 역의
카린 바네스를 보며 즐거워 하다보면 이미지로 가득 찬 끝없이 이어진 거울 터널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상실의 시대>의 직접 경험론을 주장했던 친구를 반박할 근거가 하나 더 생겼군요. 이처럼 이미지들의 터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런 감정에 대해 알기 위해 꼭 몸소 체험해볼 필요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