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감독의 데뷔작 <그대안의 블루>를 촬영할 때였다. 나는 ‘프로듀서’의 자격으로 그 작품에 참여했는데, 말이 그렇지 감독과 시나리오만으로 강수연, 안성기라는 당대의 톱스타가 캐스팅되고 제작사가 나선 케이스여서, 별반 영향력이나 기여도 없이 무늬만 프로듀서인 초보 시절이었다. 거기에다 현재 영화세상의 대표인 안동규씨가 이현승 감독과 먼저 결합하여 진행되었던 영화여서, 다시 말하면 나는 무임승차한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어쨌든, 신발 밑창이 닳을 만큼 촬영현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강수연씨가 식장에서 뛰쳐나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를 잡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옆에 서서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그날따라 웬일인지 강수연씨의 웨딩드레스 안에 받쳐입는 페티코트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한껏 부풀려진 페티코트를 안고 서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안성기씨가 ‘내려놓지 힘들게 왜 들고 있냐’고 예의 그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나는 평소 흠모하던 선생님 앞에서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창피했다. 살가운 말 한마디가 고맙기도 했지만 제작과정에서, 또 제작현장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헤매던 초보의 헤맴을 들킨 것 같아 오버하며 부끄러웠던 것이다.
안성기씨와는 그런 고맙고 겸언쩍은 기억이 몇개 더 있다.
직접 통화를 못하고 집에 놓여 있는 자동응답기에 시간과 장소를 알려놓았는데 어김없이 부탁한 시사회에, 정확히 시간을 맞춰 찾아온다든지, 캐스팅 제안을 했는데, 출연하기 어렵겠다는 의사를 직접 만나서 전한다든지… 등등등. 배우 안성기에 대한 감동과 칭찬의 글들은 차고 넘쳐서 구구절절 얘기해봤자 새로울 것이 없겠다 싶지만서도.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지 않을 만큼의 정중함, 좌중을 편안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유머, 거의 ‘신의 경지’라고 여겨질 만큼 놀라운 시간 약속, 나설 때 나설 줄 아는 대외활동이나 사회적 목소리, 그가 갖는 인간적 풍모는 요즘의 막 가는 세태와는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인격이 훌륭한 배우가, 배우로서도 훌륭하다는 등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급호텔 객실을 작살내는 행패를 부렸던, 파파라치를 보기좋게 때려눕혔던, 인터뷰를 청했던 여기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그래서 가십난에 심심찮게 이름을 올린 바 있는 세계적 배우들의 면면은 그리 고상한 인격체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러나 개판인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스크린 안에선 놀라운 연기를 펼쳐보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에 대해, 영화에 대해, 연기에 대해, 치열하게 맞장을 뜨느냐에 있다. 적어도 배우 안성기는 맞장뜨는 과격함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것 같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최근 안성기씨가 주연한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 관한 리뷰나 비평들을 찾아보니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럭저럭이거나, 별반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 안성기의 연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 대목 때문에 극장에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근래에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안성기라는 배우의 매력이 돋보였던 작품으로는 개인적으로 <무사>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였는데, 다시 한번 새로운 영화에서 인격 아닌 ‘연기’로 진하게 감동받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