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오페라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페라보다 더 만들기 어려운 영화가 바로 발레영화입니다.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음악 중심이니까 아무리 음악과 각본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감독은 상당한 시각적 자유를 허용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레는 그게 힘들어요. 물론 훌륭한 발레영화도 있습니다.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분홍신>이 대표작이죠. 하지만 <분홍신>의 발레는 영화를 위해 특별히 따로 안무한 것입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실제로 무대에서는 연출이 불가능한 작품이죠.
<분홍신>과는 반대로, 기존 발레들은 전적으로 무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각의 평면이라는 무대 안에 갇혀 있는 것이죠. 마크 분처럼 용감한 안무가들은 시대 배경을 바꾸고 동성애와 같은 요소를 첨가하면서 고전을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그 역시 무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4막 발레인 건 마찬가지예요.
오늘 이야기하려는 폴 친너의 발레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런 무대의 함정 안에 갇혀버린 영화였습니다. 폴 친너가 누구고, 그 사람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또 무슨 영화였냐고요? 대부분 친너의 이름만으로는 그 영화가 무슨 작품인지 모를 겁니다. 하지만 마고트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라는 이름이 덧붙여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네, 친너의 영화는 이제 둘 다 고인이 된 이 전설적인 콤비의 공연을 기록한 희귀한 영상물입니다. 발레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번씩 보신 적 있을 겁니다.
문제는 친너의 작품이 ‘영화’라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35mm 필름으로 찍힌 극장용 영화입니다. 그리고 일단 영화라는 카테고리 안에 떨어진 이상 이 작품은 전설적인 두 무용수의 영상 기록이라는 것 이상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친너의 영화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닙니다. 종종 삽입되는 클로즈업은 특히 짜증납니다. 클로즈업으로 마고트 폰테인의 중년의 얼굴이 드러나는 건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떡칠한 메이크업으로 커버된 나이든 얼굴이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걸요. 하지만 종종 한몸처럼 붙어 있어야 할 무용수들이 거친 편집으로 갈라지고 우연하게 하나로 연결되어야 할 동작들이 찢겨나갈 때는 신음소리가 튀어나오죠.
그래도 전 여전히 이 영화에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발레라는 것을 보기 힘들었었고 볼 수 있었던 것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백조의 호수>뿐이었던 당시 저에게 오데트 공주도 지그프리트도 나오지 않는 발레를 보여주었던 영화니까요. 요새야 눈이 높아져서 영화적 테크닉이 어쩌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AFKN`> 낮시간에 소리없이 방영되었던 이 영화가 주었던 예술적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요.
하긴 요즘이라고 제가 영상물 결핍증에 시달리지 않는 건 아닙니다. LD가 죽고 DVD가 느릿느릿 클래식 영상물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는 더욱 더 그래요. 특히 집에 방치된 고장난 LDP와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놓여 있는 NDT LD들을 보면 화만 납니다. 언제나 저것들이 DVD로 업그레이드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