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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지로의 여름>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1)
2002-08-07

˝나는 일본영화의 암, 에이즈, 인플루엔자˝

도쿄=남동철 [email protected]

당신의 눈앞에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거장이 영구 같은 바보 분장에 색동저고리를 입고 <개그콘서트>의

꽃봉오리 예술단처럼 쿵짝쿵짝거리며 노래부르는 장면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예술가가

갑자기 어릿광대로 돌변해 “한국에서 온 기자분들, 실망하는 표정들 보세요. 좀전까지 날 대단한 감독으로 여겼을 텐데 지금 내가 진행하는 최악의

쇼를 보면서 경악하고 있네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면을.

지금도 매주 5개 TV쇼에서 시청자를 만나는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 그를 모르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인터뷰를 위해 일본을 찾은 한국 취재진에 기타노 다케시(55)가 보여준 그모습은 타국의 기자들에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충격이었지만 일본의 시청자에겐 지난 20년 이상 TV에 나오던 모습 그대로다. 도쿄 시부야의 한 방송 스튜디오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TV쇼 녹화현장을 공개하며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를 소개했다. 얼굴 어디서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소나티네>의 야쿠자

보스 무라카와나 <하나-비>의 냉정한 형사 니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그것은 놀라운 장면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것이 진짜 기타노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요건 몰랐지”라며 취재진을 놀리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기타노는 지금 물밑에 엄청난 빙산을 감춘 얼음조각을 내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언젠가 “잘하는 게 있을까 싶어서 계속 다른 걸 해보려고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담에서 시작해 연기, 연출, 미술, 글쓰기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할 때는 그냥 겸손한 척하는 표현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TV쇼를 보고나면 그것은

진심 같다. 아니라면 어떻게 현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대가가 이토록 자신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TV쇼를 태연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엔터테인먼트의

신’으로 불린 기타노의 세계는 영화감독 기타노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복잡한 미궁이다. 취재진은 기타노의 답변이 미궁의 출구를 향한 실타래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질문을 시작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하는데 잠은 언제 자는지 궁금하다.

늦게 자는 편이다. 새벽 4시쯤 자는데 영화촬영이 있을 때는 6시에 깨야 하니까 2∼3시간 자고 버티기도 한다. 하지만 남들 안 볼 때 난 늘 어딘가에서 자고 있다.

이번 월드컵 때 일본팀의 승부욕이 부족하다며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신문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월드컵은 재미있게 봤나.

미디어에서 훌리건에 대한 염려를 많이 했는데 훌리건은 전혀 없었다. 아시아가 제대로 인지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고 그건 한국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6강에 오른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한 일이다. 한편으론 사람들이 늘 세계평화를 외치면서 월드컵 때만 되면 왜 다들 내셔널리즘에 빠지는지 잘 모르겠다. 일본에서도 한국인들의 응원열기는 대단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 사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술먹자고 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나오던 친구였다. 월드컵 때 처음 술먹자는 제안을 거절당했는데 응원나온 한국 사람이 워낙 많아서 빠져나갈 수가 없더라고 했다. 정말 대단했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고하토>에서 맡은 배역을 보면 일본영화의 증인 같은 위치이다. 스스로 그런 자의식이 있는지.

나는 일본영화의 암, 에이즈, 인플루엔자 같은 위치라고 생각한다. (웃음) 최근 들어 감독이라는 말을 들었지 그전까진 늘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였다.

여전히 TV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거장이라는 말을 듣는 지금, 다른 일은 그만두고 영화만 찍겠다고 할 법도 한데.

영화라는 게 문학, 미술, 음악, 연기 등 여러 가지 예술이 상호복합적으로 얽혀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만 해야지 하면 영화가 더 안 좋아질 것 같다. 누군지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어떤 일본 감독이 영화만 집중하겠다고 하고나서 막상 사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고생한 적이 있다.

코미디언으로, 감독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는데 앞으로 이것만은 해보겠다, 하는 분야가 있나.

이때까지 해본 것 중에 가장 안 된 것이 음악이다. 피아노도 배워보고 기타도 쳐봤는데 안 됐고 노래도 잘 못해서 포기했다. 왜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집어넣는데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는 어떤 생각에서 시작했나.

그림을 제대로 그려야지, 하고 마음먹은 적은 없다. 대학교 다닐 때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의사가 사고 후유증으로 머리에 장애가 올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사고로 갑자기 없던 재능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고흐의 <해바라기>를 따라 그렸다. 다 그려놓고 보니까 역시 난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빨리 가서 좋다. 병원에 있을 때 그림을 그리면 금방 시간이 갔다. 이번에 찍은 영화 <도루>는 그림을 먼저 그려서 이미지를 잡고 그걸 영화로 만들었다.

언제나 편집을 직접 하는데.

내가 하는 일에는 나의 냄새가 나야 한다. 편집을 다른 사람이 하면 나의 냄새가 안 난다. 나의 냄새가 나는 영화를 찍고 싶기 때문에 늘 직접 편집을 한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 장면마다 잠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정적인 느낌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찍다가 생각이 안 나서 멈춰놓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웃음)

당신의 영화엔 늘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들을 찍은 수평 트랙킹 장면이 있다. 어떤 경우 이런 장면이 필요하다고 느끼나.

스크립터가 이대로 계속 찍으면 러닝타임이 모자란다고 말할 경우에 그렇다. (웃음) 첫 영화 <그 남자 흉포하다>를 찍을 때 러닝타임이 1시간쯤 모자랄 것 같아서 그때부터 찍기 시작했다.

기타노는 성실하고 진지하게 질문에 답하면서도 농담으로 빠져나갈 타이밍은 정확히 알고 있다. 스크린에서

본 것보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몸을 가진 이 사내는 그러면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치 조금씩 밀려드는 파도가 어느새 해변을 삼키는

것 같다.

이번 인터뷰가 성사된 것은 그의 99년작 <키쿠지로의 여름>이 8월 말 국내에서 개봉하기 때문이다.

99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됐던 <키쿠지로의 여름>은 9살 소년 마사오가 사진으로만 알았던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에 52살인 아저씨가

동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마사오를 돌봐주라고 준 돈을 경륜을 해서 날려버리는 대책없는 아저씨로 등장한다.

관객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아저씨의 이름을 알게 되는데 그가 바로 ‘키쿠지로’다. 그러니까 <키쿠지로의 여름>은 소년의 동심을

찾아주는 과정에서 어린 날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어른의 이야기다. <소나타네>의 무라카와 일당이 오키나와 해변에서 아이들처럼 노는 장면을

연상하면 그게 얼마나 심각한 코미디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목이 <키쿠지로의 여름>인데 처음엔 다른 제목이었나.

이제까지 만든 영화 중에 미리 제목을 붙여놓고 시작한 영화는 <소나티네>밖에 없다. 영화를 만들어놓고 프로듀서랑 상의해서 제목을 정하곤 한다. 영화를 찍을 때는 그냥 다케시 영화 넘버 원, 넘버 투 식으로 제목을 붙인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다케시 영화 넘버 에잇이었다. 영화를 다 찍어놓고 제목을 뭘로 할까 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키쿠지로’라고 이름을 밝히는 대목이 있어서 <키쿠지로의 여름>으로 제목을 정했다. 키쿠지로는 내 아버지의 이름이고 나도 이제 아버지 나이가 됐기 때문에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키쿠지로의 여름>을 만들 때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같은 고전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찍었다고 하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다.

영화에는 여러 가지 장르가 있고 스타일이 있다. 멜로영화, 액션영화, 전쟁영화, 로드무비 등등. 내가 이때까지 안 해 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남녀의 연애를 다룬 영화와 부모 자식간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였고 그래서 부모 자식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찍게 됐다. 영화를 만들어놓고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원래는 마사오가 엄마를 일찍 만나고 어른들과 노는 걸 설정했는데 찍다보니까 지금 영화처럼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아이에게 동심을 찾아주는 과정이지만 실은 어른에게 동심을 찾아주는 이야기 아닌가.

아이에게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여름방학을 선사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른에게도 마찬가지다. 마사오나 키쿠지로나 다들 현실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여름방학을 경험한다.

<키쿠지로의 여름>은 야쿠자가 나오는 당신의 다른 영화들처럼 폭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코미디는 상당히 가학적이다. 남을 물에 빠트리거나 골탕먹이면서 즐거워한다. 코미디도 폭력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인가.

그것은 관점의 문제다. 객관적인 시점에서 보는가, 주관적인 시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람이 있다. 넘어진 당사자에겐 비극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에게 웃기는 일이다. 그걸 폭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는 시점에 따라 코미디가 된다. 넘어진 사람이 우쭐대며 잘난 척하던 사람이라면 웃음의 강도는 더 커질 것이고 늘 불쌍해 보이던 사람이라면 슬퍼질 것이다. 웃음이란 것은 어떤 현상에 악마처럼 붙어다니는 것이다. 가장 슬픈 순간에도 웃음이라는 악마는 물러설 줄 모른다. 장례식장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얼마나 악마적이고 폭력적인가? 웃음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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