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살구>의 정서(나애진)는 많이 알수록 잘 모르겠는 여자다. 계약직 디자이너에서 벗어나 웹툰 작가로 살겠다는 꿈도,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고 계약금은 재혼한 아버지(안석환)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는 그의 현재 상황도 알고 있지만 가족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가 정서에게 물음표를 띄우게 한다. 배우 나애진에겐 캐릭터의 그런 알 수 없음이 입체적으로 다가와 좋았다. “그래서 정서가 아빠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나도 장만민 감독님에게 많이 여쭤봤었다. 그런데 고민할수록 어느 한쪽으로 결론내릴 수 없는 게 감정이고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빛살구>를 통해 처음으로 장편 주인공을 맡은 나애진은 작품 안에서 수많은 처음을 경험했다. 뱀파이어 시퀀스가 있어 입가에 피 분장을 하고 상대의 목덜미를 무는 연기를 했다. 횟집 딸내미인 정서가 회 뜨는 장면을 직접 소화하고 싶어 “고향의 아빠 친구 어부를 찾아가 손기술을 배워”왔고, 정서의 한때 취미가 보드라 “국내에서 제일가는 보드 선생님에게 보드를 조립하는 것부터” 배웠다. 영화작업을 통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걸 즐기는 나애진은 <은빛살구>를 하면서 수확한 게 많다. “정서를 통과하면서 내 안과 내 옆에 사랑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이제 더는 칭찬이나 박수처럼 눈에 보이거나 들리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 바깥의 사랑에 끌려가지 않으니까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게 됐다.”
나애진이 자기의 배우 자질을 발견한 건 중학생 때 희곡 발표 시간이었다. 친구들이 헤매는 가운데 나애진만이 정확하게 문장을 읊었다. “나중엔 신나서 애드리브도 던졌는데 너도나도 즐거운 분위기가 됐고 모두가 연결된 것만 같았다.” 그 경험이 ”짙고 깊게“ 남아서인지 연기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2016년부터 영화 출연작을 하나씩 늘려갔다. 결실이 있던 해는 바로 지난해,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은빛살구>로 한국경쟁 배우상을 받았고 여름엔 ‘나애진 배우전’이 열려 잊지 못할 한해를 보냈다. 재미와 별개로 보디 호러를 힘들어해 <미드소마>도 <서브스턴스>도 겨우 봤지만 만약 그같은 작품의 출연 제의가 온다면? “그건 오케이다. 보는 것과 하는 건 또 다르니까. (웃음) 끝까지 가서 인간의 민낯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TAR 타르> 같은 작품도.” 2025년 나애진의 목표는 “무모하게 살기”다. “올해만큼은 원래 내 속도와는 다른 타이밍에 움직여보고, 평소 나라면 두드리지 않을 문도 두드리면서 엇박자로 걸어가고 싶다. 어차피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말이다.”
FILMOGRAPHY
영화
2024 <은빛살구>
2021 <국물은 공짜가 아니다>
2020 <굿 마더>
2018 <기묘한 가족>
2017 <악녀>
2017 <용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