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 모두가 아는 대로 대한민국에 외환위기가 닥친다. 파산한 근태(김종수)는 가족을 이끌고 콜롬비아의 보고타로 향한다. 근태는 10대 아들 국희(송중기)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콜롬비아는 아메리칸드림으로 향하기 직전의 톨게이트고, 자기만 믿으면 가족 모두 미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국희가 보기에 가족의 미국 진출 가능성은 대한민국과 콜롬비아만큼 멀고, 자리를 잡는 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뿐이다. 근태는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전우 박 병장(권해효)을 찾는다. 보고타에서 의류 소매업으로 자리를 잡은 박 병장 눈에는 근태보다 근성 있는 국희가 훨씬 미덥다. 국희는 박 병장이 돈을 벌 수 있었던 비결인 의류 밀수를 돕는다. 콜롬비아 세관에 밀수 현장을 발각당해 감옥 신세를 질 뻔한 상황에도 국희는 악착같이 박 병장의 물건을 지켜내고, 국희의 소문은 한인 상인회의 또 다른 큰손인 통관 브로커 수영(이희준)의 귀에도 들어간다. 박 병장과 수영은 매일 국희가 얼마나 자기편에서 충성을 다할지 시험한다. 한편 선배 상인들이 보고타에서 누리는 삶을 지켜보는 국희 역시 점점 큰 야심을 품는다. 더이상 국희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국희는 수영의 심복인 재웅(조현철)의 질투를 받거나 작은 박 사장(박지환)의 지청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고 야망을 뻗어간다. 그 과정에서 설령 남을 해하는 사고가 생기더라도, 국희는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중남미를 배경으로 하는 일련의 범죄물과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야심이 분명한 영화다. 마약 카르텔의 조직적 범죄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현지인들과의 세력 싸움 역시 예상보다 분량이 적다. 대신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의 서스펜스를 채우는 건 한인 커뮤니티의 이전투구다. 국희의 가족보다 보고타에서 훨씬 오래 산 이민자들은 국희에게 “여긴 한국이 아니야. 여긴 보고타야”라고 경고하지만 사실 보고타에 사는 한인들은 그 어디에서보다 (안 좋은 의미에서의) ‘한국적’인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 이민자 사회 특유의 폐쇄성이나 생존을 위해 서로를 등쳐먹는 경쟁의식 등 이민자들이 낯선 국가에서 끝끝내 살아남는 방식이 대규모 범죄극이나 조직의 치킨 게임보다 훨씬 영화적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감독과 작가의 선택으로 보인다. 영화는 10대 말부터 30대까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국희의 일대기를 속도 높은 편집으로 선보인다. 배우 송중기의 1인칭 시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국희라는 한 남자의 일생에만 집중하는 이야기는 곁가지 플롯에 한눈을 팔 새가 없다는 점에선 높은 밀도를 자랑하지만 이 전략으로 인해 국희를 제외한 다수의 조연들이 성격과 열망을 지닌 캐릭터로서 살아 숨 쉬지 못해 영화의 입체성에 지장을 준다. 실제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대부분 촬영된 영화는 현지에 세트를 짓기보다 실제 보고타 사람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삶의 현장에서 다수의 신을 촬영했다. 로케이션의 생생함 덕분에 한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 풍광이 러닝타임 내내 펼쳐지는 가운데 배우들은 배역과 이야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에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꺼내 보이는 등 열연을 이어간다. 크고 작은 아쉬운 점을 상쇄시킬 만한 연기가 돋보이는, 배우의 영화다.
close-up
한국인에게도 친근한 멕시코의 민중가요 <La Cucaracha>가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의 정념을 채우는 주요한 음악으로 등장한다. 이 노래가 박 병장의 입에서 불릴 때와 국희의 입에서 불릴 때, 단순한 멜로디와 재밌는 언어 배열로 이루어진 노래가 사실 어떤 의미를 담은 노래인지가 자연히 겹쳐지며 묘한 서늘함을 자아낸다. 내내 뜨거운 영화가 갑자기 서늘해지는 몇 안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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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 감독 김희진, 2024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빈센조> <로기완>에 이은 배우 송중기의 이민 3부작에 편입돼도 좋지 않을까. 두 작품 중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아무래도 <로기완>과 좀더 가깝다. 낯선 땅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투쟁하는 송중기의 얼굴과 기존의 한국영화와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 연출의 고민이 만나 엄혹한 세상 속 외로운 영혼을 공들여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