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에어로빅 쇼에서 수(마거릿 퀄리)가 어떤 춤을 췄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카메라의 관심 자체가 수의 춤이 아니라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 등을 잘게 잘라서 남성을 위한 식탁에 올려놓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서브스턴스>의 에어로빅 쇼에는 여성 육체를 선정적으로 전시할 때 사용하는 클리셰적인 숏으로 가득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원한다. 엘리자베스(데미 무어)가 늙었다는 이유로 한참은 더 늙어 보이는 하비(데니스 퀘이드)로부터 해고 통보받는 사건이 증명하듯,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새로운 여성의 육체를 아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배설하고, 또 먹잇감을 찾는다. 여성에게 늙는다는 것은 남성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규정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향한 <서브스턴스>의 시선은 아주 노골적이다.
폐쇄적 서사와 예정된 파국
<서브스턴스>의 에어로빅 쇼는 의도적으로 아주 올드하고 촌스러운 방식으로 연출된 탓에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몇십년 전의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대변하는 하비를 묘사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탐욕스럽고 징그럽고 성적으로 편향된 중년 남성의 클리셰 그 자체다. 코랄리 파르자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그 종사자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속의 여성 육체를 시각적으로 유린해온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근본적인 욕망과 비가시적 폭력성의 원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더 세련되고 매끈한 형식으로 관음증적 시선을 은닉한 쇼로 진화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이 원형의 등골에서 추출한 ‘척수-여성의 육체’에 의존해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만큼 원형과 분열체가 이상적으로 공존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내 관심은 엔터테인먼트 산업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여성이 맺는 관계에 대한 <서브스턴스>의 영화적 태도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정보는 극도로 제한적이다.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를 오로지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만 생존하는 존재로 그리면서 타인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의 징표인 타인의 시선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에게 홀로 남겨진 시간,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그 시간은 형벌에 가깝다. 엘리자베스의 무의미한 일주일은 수의 활기찬 하루만도 못하다.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잔혹한 장면은 영화의 종반부에 펼쳐지는 20여분의 피의 난장 장면이 아니라, 데이트를 앞둔 엘리자베스가 창밖으로 보이는 광고판의 수를 발견한 후 화장을 고치는 장면이다. 엘리자베스는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화장을 고치고, 또 화장을 고치다 그만 얼굴을 쥐어뜯는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자학적 태도는, 그녀가 여성의 육체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잣대를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욕망은 엘리자베스의 외부에서 내부로 그 자리를 옮긴다. 엘리자베스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요구에 스스로를 옭아맨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욕망을 내재화하여 기꺼이 그 먹잇감이 되어주는 인물의 원형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강요받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서브스턴스를 몸에 투여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리고 그 행위를 중단하지 않은 채 지속하는 것도, 자신의 육체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품으로 제공하는 것도 그들이 선택한 결과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자유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양산한 자동기계처럼 ‘예정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남성 중심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외부’가 지워진 탓에, 인물이 그 외부의 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산업을 폭발시킬 수 없다면, 순응하다가 폐기처분되거나 싸우다 파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가능성이 없다. 이러한 폐쇄성은<서브스턴스>가 꽤 인상적이고 극단적인 파멸의 엔딩으로 치닫게 해주는 힘이지만, 한편으로는 ‘예정된 실패담’ 외의 다른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폭력의 미러링
<서브스턴스>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욕망을 온몸에 각인한 여성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대립은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하나의 몸을 두 자아가 공유하는 분열의 서사가 아닌, 하나의 자아가 두몸으로 분리되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마련한 하나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서사. 그러니까 여성의 안타고니스트로서의 여성. 그 갈등의 해소는 그들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수의 몸에서 탄생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푸른 원피스를 두르고 귀걸이로 치장한다. 이때 판타지영화에서 한 여성이 아름답게 변화할 때나 나올 법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괴물의 탄생(시각)과 아름다운 공주의 탄생(청각)의 부조화는 전통적인 여성 판타지를 뒤튼다. 기괴한 모습의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스태프와 관객들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대의 미소를 보인다. 물론 이 환대는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환상임이 금세 드러나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이 환상이 엘리자베스와 수가 하나로 합쳐진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시점숏으로 재현된다는 점이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진짜 하나가 된다. 육체적으로도, 욕망적으로도.
물론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관객의 환대가 경악으로 바뀌고, 공연장은 피의 난장판으로 변한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시선으로 자신을 유린했던 자들에게, 그 폭력적 시선의 담지자에게 피와 내장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 피의 난장은 일종의 미러링(mirroring)처럼 보이기도 한다. 젊어지고자 하는 욕망,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욕망이 수를 탄생시킨 원동력이라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에게 가하는 가시적, 비가시적 폭력의 결과물이 몬스트로 엘리자수다. 피의 난장이 펼쳐질 때,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여성에게 향한 수많은 폭력적 표현들을 환청으로 듣는다. 그리고 그 폭력을 폭력으로 되돌려준다. 숏으로 잘게 난도질한 여성의 육체를 즐기던 남성적 시선에게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기괴한 육체를 파편화하여 들이미는 것으로 모자라 카메라(그것을 즐기던 관객의 시선)를 향해 피를 난사한다. 물론 가장 끔찍한 장면은 유방을 출산하는 장면이다. 에어로빅 쇼의 새로운 진행자를 뽑는 오디션장에서 남성 스태프가 내뱉은 ‘저 코 자리에 가슴이 달리는 게 더 낫겠어’라는 말을 구현이라도 하겠다는 듯,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엉뚱한 곳에서 유방을 뽑아낸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키운 스타로 자라날 때, 그 이면에는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함께 자란다. 기억하라. 셋은 하나다.
하지만 그 난장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시 도돌이표를 그린다.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모든 육체적인 것들(또는 물질적인 것들)이 다 박살나고 남은 것은 희미하게 얼굴의 형체가 남은 물질 덩어리다. ‘그것’이 기어 다다른 곳은 할리우드의 상징인 명예의 거리다. 전성기 시절의 엘리자베스가 별로 새겨진 곳. ‘그것’은 금색별이 새겨진 곳에서 하늘을 행복한 미소로 바라본다. 내게 그 물질은 ‘충동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모든 형체가 박살난다 해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그 무엇, 이를 두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충동이라 부른다. ‘그것’은 오로지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선다. 어쩌면 바로 그 충동 덩어리가 엘리자베스의 전부이자, 엘리자베스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엘리자베스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출산한 가장 이상적인 존재다. 끝까지 그 품을 떠나지 못하니 말이다. 꽤 애잔하고 슬픈 정서가 흐르는 인상적인 엔딩이지만, 피의 난장 끝에 도달한 것치고는 꽤 허무한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