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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홈런 없이도, 힘껏, 두 사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서 상영되어 독불장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박송열, 원향라가 연인으로 등장하는 <가끔 구름>(2018), 부부로 나오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2021)에 이어 ‘박송열, 원향라 커플 연작’으로 불릴 만하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두 작품의 흔적이 뒤섞여 일렁이면서도 전작들에 온기를 불어넣던 엉뚱하고 다정한 태도 대신, 한층 싸늘하고 모호해진 시선에 둘러싸인다. 전자가 두 사람이 세상을 버티는 자세였다면, 후자는 이들 자신을 향한 응시에 가깝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그 면모가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를 냉정하고 분열적인, 그리하여 좀더 아린 질문으로 만드는 것 같다. 아직 극장에서 개봉하기 전이지만, 올해를 마무리하는 글로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가 안긴 감흥과 생각을 전해보려 한다.

희미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영화가 열리면, 눈 덮인 겨울 풍경 위로 부동산 자율화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깔린다. 장면은 어두워진 밤, 천변 산책로를 걸어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으로 이어지는데, 얼마 뒤, 그 길에 다시 여자 혼자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한동안 멈춰선 채, 돌아온 길을 쳐다보더니, 걸음을 옮겨 화면 밖으로 빠져나간다. 남자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여자는 어디로 향하는가. 여자의 얼굴이 음울함으로 무겁게 젖어 있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의 도입부는 여러 면에서 이상하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속 부부가 부엌에서 도란도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전셋값 걱정을 하던 첫 장면과는 확연히 다른 출발점이다. 무엇을 시도하더라도 도입부의 한기와 피로를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리라, 이 영화는 시작부터 그리 되뇌는 것일까. 집 바깥을 헤매는 도입부는 어쩐지 모종의 사건이 휩쓸고 간 후의 광경처럼 다가온다. 아니, 이 장면의 시제는 정확히 어디라고 해야 할까. 여자가 사라진 화면 위로 제목이 뜨면 어디선가 뜬금없이 감탄사가 들려온다.

감탄사와 함께 등장한 다음 장면에서 가족들은 영태(박송열)와 미주(원향라) 부부의 집을 구경하는 중이다. 도입부에 드리워진 침통함의 그림자가 완전히 제거된 새집 내부는 모델하우스처럼 반들반들하고 정갈하기만 하다. 집 안을 둘러보는 가족들과 이를 바라보는 부부의 과장된 반응과 표정,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실내, 말하자면 다소 과하게 환함을 가장한 새집 장면은 첫 장면의 어둠을 상쇄하기보다는 또 다른 알쏭달쏭한 물음으로 이끈다. 어느 쪽이 꿈일까. 이 집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초반부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부부의 잠을 깨운 전화 속 가족들은 자신들이 선물로 사준 “어컨이”와 “조기”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니까 이 집에는, 새 에어컨과 건조기가 있다. 현관 벽에는 중고로 샀다지만, 근사한 자전거도 떡하니 걸려 인물들이 집에서 나서거나 들어올 때마다 시야에 잡힌다(부부가 그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혹은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영태와 미주의 공간에 투영된 소시민의 욕망을 간결하게 전시한다. 신용불량자 영태의 통장에는 300만원뿐이지만, 부부의 터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빈곤한 처지에 비해 윤기가 난다. 그러니 이런 집을 운용하면서 가난 운운하는 부부에게 누군가는 살짝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부의 반짝반짝한 새집이 범상하지 않다는 점을 먼저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있을 건 다 있어 보이는 이 집에 부족한 건, 물건이 아니라, 어떤 광경이다. 영태와 미주의 집은 정작 부부가 한 프레임에 평안히 공존하는 광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태가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간 뒤, 이곳에서 미주는 줄곧 덩그러니 혼자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마주 보며 밥을 먹고, 나란히 서거나 앉아 어딘가를 쳐다보며 대화하고,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고, 무엇보다 술을 마시며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침울하게 함께 흐트러지던 부부의 모습은 드물거나 없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그런 순간들은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장면에 그치지 않고 앙상한 삶의 조건을 희극적으로 다시 일으키는 관계의 튼튼한 형상이다. 요컨대 화면 양쪽에 선 영태(박송열)와 정희(원향라)의 악수는 이들이 놓인 초라한 프레임을 오직 두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균형 맞춰 바로 세우는 행위처럼 보인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의 깨끗한 집에는 ‘부부’의 시간, 관계의 잔상이 잘 맺히지 않는다. 상호작용하는 부부의 에너지보다 부부 각자가 감내하는 물리적, 심리적 웅덩이가 이 집에 파인다. 영태는 집에 몰래 숨어든 사람처럼 거지꼴로 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김치 하나로 밥을 욱여넣는다. 미주는 초췌한 몰골로 침대에 누워 허공을 향해 “잘 자”라고 말하며 눈물을 또르르 흘린다.

무엇보다 이 집에는 유령이 산다. 부부의 집 거실에 출몰하며 미주에게만 보이는 그것은 사채업자의 환영이다. 영화 초반, 영태와 미주는 은행 대출을 잘 갚자고 다짐하다가 문득 “그 사채업자는 왜 이자를 없던 걸로 해줬을까”라고 자문한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이자 없이 원금만 회수하겠다고 정희 엄마를 찾아간 사채업자 장면을 염두에 둔 말일까. 그 장면 속 사채업자가 이번에는 미주와 영태의 집 거실에, 마치 자기 거처인 양 빛이 잘 드는 창가에 평온하게 앉아 있다. 빚진 돈이 없음에도, 미주가 자꾸 대면하는 그 망령은 일차적으로는 부부의 미래와 새집에 잠재된 불안일 것이다. 그 불안은 현실이 되어, 영화 후반 영태를 따라온 사채업자들이 현관 문턱에 발을 턱 걸쳐놓는 장면을 낳는다. 그러나 사채업자의 환영은 엄밀히 말해, 부부를 덮친 게 아니라, 부부의 무의식이 불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부부의 초상은 사채업자에 시달리는 시스템의 가련한 피해자와는 좀 달라 보인다. 요컨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비밀리에 사채업자를 만나 차 안 뒷좌석에 앉아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던 정희의 안쓰러운 모습 같은 건 여기 없다. 영태가 “이대로는 안되겠어. 돈 벌어올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라는 어리둥절한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간 후 그의 목소리는 간간이 전화로만 전해지고, 미주도 남편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영화는 그가 집을 떠나 노동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태가 갈망하는 바가 그의 육체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욕망이기 때문일까. 영태와 미주가 기다리는 ‘홈런’은 뜬구름처럼 영화를 부유할 뿐, 구체적인 노동 과정과 결부되지 않는다. 영태가 사채업자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후에야 부동산 투자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전해진다. 이 영화에서 ‘홈런’은 사채를 동원해서라도 ‘노동’으로부터 탈피하려는 환상이다.

노동.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에서 그것은 멈출 수 없는 곡괭이질 같은 것이다. 미주의 꿈에 등장해서 땅을 파던 영태에게 프레임 밖 누군가가 짜증 섞인 말투로 지시한다. “더 파, 왜 자꾸 물어봐. 계속 파,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영태와 미주의 노동력을 산 이들은 하나같이 화면 바깥의 음성으로만 출현한다. 영태의 시간과 노동을 영악하게 착취하려는 이들에게서 개별적인 얼굴을 삭제함으로써 영화는 그 음성의 주체를 희화화하지만, 동시에 그 목소리를 소시민 노동자가 벗어날 수 없고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처럼 들리게도 한다. 영태가 대리운전으로 돈을 버는 장면은 깜깜한 밤에 갇힌 채, 돌아올 수 없는 행로를 가듯, 그의 말대로라면 ‘완전히 낚여서’ 탈출할 방법이 요원한 길처럼 그려진다. 그러니 영태가 부부의 일상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간은 그 길에서의 이탈을 무모하게 시도해본 시간일 것이다.

출구 없는 노동의 덫에서 이탈하기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채를 써야 하는 아이러니. 영태는 그 아이러니를 겁 없이 무릅쓴다. 결과는 참담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염려, 두려움, 후회, 수치심의 얼룩이 별반 묻어나지 않는다. 돈은 48회를 더 갚으면 될 일이다. 채무인을 찾아오는 사채업자들의 행위는 불법이므로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그가 미주에게 당당히, 기계적으로 전하는 장면은 충돌 없이 너무 매끄럽게 마무리된다. 이 또한 영태의 환상인가. 그는 정말 영혼을 잃은 걸까. “갚으면 아무 일 없어요!” 미주가 사채업자로부터 남동생을 구해내는 장면에서 끈질기게 울리던 사채업자의 친절하고도 무서운 메아리를 영태의 삶은 이미 무감하게 내면화한다.

영태는 거울 앞에서 지난 과오를 돌이키며 삭발을 감행하려다가 머리를 깎음으로써 생기는 득과 실 중 득이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머리를 깎는 걸 중단함으로써 실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토록 해괴한 논리, 우스꽝스러운 합리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자기 위안이 냄새나는 몸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더 많은 빚을 안고 돌아온 영태의 생존 전략인가. <가끔 구름> 속 명훈(박송열)과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속 영태의 어리석음은 연인, 혹은 아내와 나눠짐으로써 종종 친밀함과 귀여움으로 도약할 기회를 얻지만, <키케는 홈런을 칠거야> 속 영태의 우둔함은 미주 없이 일어나 협의 없이 실행되고 일방적으로 정리됨으로써 염치없는, 그리하여 더러 우습지만 외로운 자위에 머문다.

이 영화에서 사채업자와 부동산 자율화 뉴스는 부부를 위협하거나 소외시키는 외부의 힘이기보다는 이들의 복잡한 욕망에 더 가까이 있다. 임신한 미주의 꿈에 나타난 사채업자는 거실 의자에 앉아 미주를 내려다보며 돈은 일한 만큼 버는 법이라고 일갈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내뱉는다. “넌 운이 좋았어.” 전작을 떠올린다면,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됐으니, 엄마가 원금을 갚아줬으니, 그리하여 새집을 구할 수 있었으니 운이 좋았다는 뜻일까. 그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미주의 무력한 얼굴에 이어 같은 거실에 같은 구도로 미주와 동생이 마주 앉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주가 사채업자의 의자에, 동생은 미주의 위치에 놓인다. 미주의 위상, 동생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화법은 직전 장면에서 미주를 힐난하던 사채업자와 닮아 보인다. 미주는 앞서 사채업자에게 돈은 형식일 뿐이라고 반발이라도 했으나, 여기서 동생은 사람들을 괴롭혀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연속하는 두 장면은 미주의 모순된 욕망, 불안, 죄의식, 자괴감으로 얽히고 겹친다. 두 장면 모두 미주의 꿈이라면, 어느 쪽이 더 나쁜 꿈일까. 과연 어느 쪽을 더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서 풍족하지 않은 부부의 삶을 떠받치는 건,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지 않는 도덕성, 그 도덕성을 수용하는 부부의 자세다. 영태가 선배에게 돈 일부를 돌려주고, 결말에서 그의 차를 훼손하지 않고 돌아서는 장면이 감동적이라면, 그것이 대단한 이타심의 발현이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마음에서 끝내 저버리지 않는 예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태와 정희의 세상에는 고된 현실에서도 지켜내려는 저항선 같은 것이 존재한다.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가 전작들보다 쓰라리다면, 이 세계에서는 ‘지켜내려는 저항선’보다 ‘상실한 것’을 먼저 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회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태와 미주는 아기를 잃는다. 아니, 미주가 아기를 잃는다. 미주는 영태가 집을 비운 사이, 엄마가 끓여준 두번의 미역국을 먹는다.

이 영화에서 임신과 유산에 관련된 장면들은 모호하다. 영태가 잠시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난 밤, 미주는 그의 뒤를 몰래 쫓는데, 영태는 그 짧은 순간 어디론가 증발하듯 사라진 상태다. 텅 빈 도로 한가운데에 홀로 남아 두리번대는 미주의 얼굴은 영화의 도입부를 부유하던 낯설고 막막한 풍경을 상기한다. 미주는 무엇을 놓친 것일까. 무엇을 찾는 것일까.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간략하고 강렬한 표현으로 미주의 임신을 전한다. 사진을 손에 들고 걸어가던 미주를 한 여자가 지나치며 마치 주술사처럼 불쑥, “아기집이네”라고 내뱉는다. 그 순간, 기이한 희열이 화면에 퍼진다. 그러나 이 대목은 사채업자가 미주의 꿈과 현실에 번갈아 나타나는 장면을 지나 이 영화에서 가장 화창한 빛 아래, 섬뜩하고 슬픈 예지몽을 담은 장면에 이른다. 미주가 아이와 모래놀이를 하며 “엄마처럼”이라고 말하자, 갑자기 화면 밖에서 한 여자가 아이를 데려가버린다. 미주는 덤덤하게 “꿈이잖아. 눈 떠”라고 중얼거리는데, 침대에서 눈을 뜬 미주의 형상이 목석 같다. 안개에 둘러싸인 겨울 산을 올려다보는 미주의 핏기 없는 모습 위로 태아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영화에서 미주가 자신의 몫으로 혼자 견딘 시간, 괴상한 앵글에 담긴 그의 귀기 어린 얼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잠에 빠진 몸은 결국 이 순간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미주가 영태에게 유산 사실을 전하는 장면은 따로 나오지 않는다. 전작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한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에서 임신과 유산 모두 미주의 꿈이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에 드리운 상실의 그림자가 옅어지는 건 아니다. 미주의 삶에 찾아왔다 사라진 아이만큼이나, 미주의 상상에서조차 온전히 머물지 못한 아이의 빈자리도 아프긴 마찬가지다. 사채업자들은 영태와 미주의 집을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제 집 드나들듯 하는데, 사채업자들로 꽉 막힌 이곳에, 부부가 바라는 아이는 정작 들어설 문을 찾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이 상황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임신 전, 학교에서 해고된 미주가 차선으로 선택한 노동은 하필이면 베이비시터 일이다. 그가 AI 면접을 보며 아이의 눈높이로 친구 같은 사이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에서 정말 미주와 한 아이가 즐겁게 노는 장면이 끼어든다. 사실, 이것은 난데없는 장면이 아니라, <가끔 구름> 속 선희(원향라)가 돈 때문에 명훈과 표독스럽게 다투는 꿈에서 깨어나, 꿈에서와는 상반되는 표정으로 조카와 천진하게 노는 장면이다.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연인들의 현재가 그려낸 미래의 어떤 날에 대한 소망이라고, 그 순간을 너그러이 허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가 그 장면을 베이비시터 면접 과정에 새삼 불러들일 때, <가끔 구름>에 어렴풋하게나마 잠재하던 가능성, 미래를 향한 수줍은 기대는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혹은 미주는 그 장면을 이룰 수 없는 한때의 꿈처럼, 노동과 고용의 맥락에서 상기한다. <가끔 구름>의 결말에서 명훈은 선희를 껴안으며 가난할지라도 “우리 사랑 좀 하자”라고 호소하지만,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에서 ‘사랑하자’는 미주가 면접을 보는 베이비시터 업체 이름이 된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사랑은 낭만을 바라볼 힘이 없다.

당장은 낭만도, 돈도, 아이도 바라기 어려운 부부의 새집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여전히 생기로울까. 눈 내리는 오후, 오랜만에 재회한 부부가 모양은 뭉개졌어도 “영혼은 지킨” 뜨거운 타코야키를 한가득 입에 넣고 즐거워하던 장면의 온기, 장난처럼 시작한 부부의 눈놀이가 어느새 격렬한 눈싸움으로 변하던 장면의 결기, 철없는 남편의 등을 힘줘 때리는 아내의 손동작이 실은 그의 외투를 터는 동작임을 드러내는 장면의 유머. 부부를 내리친 폭풍우에도 그런 순간의 활기는 휩쓸리지 않았으니 안도해도 될 것인가.

영화의 결말, 침대에는 상의를 탈의한 채 고요히 눈 감은 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영태가 미주를 끌어안으며 둘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 영태와 미주의 섹스 장면은 두 사람이 바닥에 벗어둔 속옷과 맨몸으로 인형을 안고 미주와 마주하는 영태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재치 넘치는 섹스의 기호에는 새로운 사업과 새 생명에 대한 부부의 부푼 기대가 담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을 채우는 노골적이고 솔직한 육체성은 그와 다르다. 이 육체성은 어떤 의미를 전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미주와 영태는 그 어느 때보다 함께 있다, 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해야 할까. 영태의 몸짓에 요동 없이 눈을 뜨지 않는 미주의 얼굴, 그럼에도 영태의 어깨를 안은 손짓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

영화 말미, 부부의 세계에 찾아온 괴이한 꿈 한편을 우리는 기억한다. 앤티크 가구와 식기들로 가득한 저택에서 미주는 가사도우미로, 영태는 인부로 일한다. 둘은 빈약한 반찬 몇 가지로 식사를 하고, 미주는 영태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다. 시계추 움직이는 소리만 유달리 크게 울려 퍼진다. 사람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고급스러운 실내에 둘의 계급적 정체성만이 명징하게 새겨진다. 주인은 보이지 않지만, 이들이 이 집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은 연인조차 아니다. 이 꿈의 생생한 이물감, 날카로운 선명함은 미주와 영태의 밝은 새집이, 그들의 현실이 외면하는 진실일까. 하지만 그 꿈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영화가 힘껏 도달한 부부의 침실 장면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부부가 몸을 포갠 마지막 장면이 닫히면, 적막한 검은 화면 위로 이들의 작은 숨소리가 지속된다. 많은 사연을 지나, 부부는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러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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