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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줍는다는 것, <배심원 #2>

물건이 바닥에 떨어진다. 영화의 초반부, 차에서 내리던 검사 페이스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린다. 때마침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될 저스틴이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 건넨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을 기록하는 평범한 장면이지만, 이 순간의 의식적인 제스처를 거치지 않고 <배심원 #2>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나 사건의 진행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물건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바닥에서 주워 손으로 돌려주는 몸짓을 부드럽고 특징적인 숏의 연쇄로 묘사한다. 약간 과장하자면 이 영화를 말한다는 것은 떨어뜨리고, 줍고, 되돌려주는 행위를 말한다는 뜻이다. 그 행위는 거대한 불신과 자기 회의로 어긋나는 두 사람을 소박한 우연과 신뢰의 손짓으로 연결한다. 언젠가 이스트우드는 <미드나잇 가든>을 남부 도시의 작은 사회에 모인 사람들의 의례적 절차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영화라고 말하며 “나는 이따금 세밀한 면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의 견해에 빗대어 말하면 <배심원 #2>은 오직 법정에 모이는 사람들의 세밀한 동작에 관심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이다.

떨어뜨린다는 것

떨어지는 것은 다른 곳에도 있다. 배심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살인사건의 전모가 뺑소니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말할 때, 저스틴은 탁자에 올려둔 컵을 떨어뜨린다. 그의 과민한 반응은 살인 용의자로 법정에 기소된 제임스가 술집에서 여자친구 켄달과 다투던 순간에 술잔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가 내리는 밤. 서로 알지 못했지만 저스틴은 두 연인이 싸우고 있던 술집에 있었고, 다음 날 켄달은 강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제임스의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저스틴은 그날 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무언가와 부딪쳤던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의심이 생겨난다. 어쩌면 내가 켄달을 강 아래로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스트우드는 어떤 긴장이나 흥분도 없이 제임스의 재판이 진행되는 표층적 과정과 저스틴의 의심이 심화되는 내면적 과정을 나란히 겹쳐두고 지켜본다.

법이 규정하는 진실은 취약하다. 법정은 순식간에 제임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범죄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나 도구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는 손짓이 진실을 감싸는 민감한 자국으로 화면에 남는다. 저스틴의 손은 계속해서 사물을 붙잡지 못하고 떨어뜨린다. 그는 배심원으로 참여한 전직 형사 해롤드가 조사한 서류를 떨어뜨린다. 증인으로 나온 노인이 자신이 목격한 범인을 지목할 때 동전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의 차 안에서 (페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핸드폰을 떨어뜨린다. 이 사건의 진실은 법정에서 진행되는 절차와는 무관하게 물건을 떨어뜨리는 몸짓을 매개로 저스틴에게 물리적으로 다가온다.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배심원 가운데 한 명은 저스틴에게 묻는다. “바닥에 떨어뜨렸잖아요. 모두가 봤어요.”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본다. <배심원 #2>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치 불가피한 의식을 집행하듯이 반복해서 물건을 떨어뜨리고, 떨어지는 사물을 매개로 그것을 지켜보는 시선을 화면에 퍼트린다. 이 행위는 영화가 건네는 서사와 완벽할 정도로 투명하게 결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 바깥에서 생각지 못한 효과를 자아낸다. 영화 속의 배심원들은 화면 밖으로 이탈하는 사물의 운동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이 마주한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프레임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손은 물건을 놓칠 것이다. 바닥으로 낙하하는 물체의 수직운동은 영화에 담긴 세계를 불안정하게 뒤튼다. 영화는 추락하는 운명에 귀속되어 있다. 이 영화는 진실을 둘러싸고 판단을 내리는 배심원들의 논리적인 설득 과정을 비추는 대신 물건을 떨어뜨리는 공통의 행위를 남겨둔다. 떨어지는 물건은 <배심원 #2>이 들려주는 복화술의 목소리다. 이스트우드의 복화술은 그 자체로 의미를 결정하는 단일한 음성이 아니라 하나의 촉각적 이미지에 깃드는 복수형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그것은 떨어지는 물건을 지켜보는 시선의 공동체 모두에게 열린 창구가 된다.

떨어지는 물건의 운명은 영화 후반부에 강조된 한 장면과 연결된다. 오랜 토론과 논의에도 판결을 내리지 못한 배심원들은 시신이 발견된 현장을 찾는다. 제임스의 유죄를 고수하던 한 배심원은 자신의 어린 동생이 제임스와 같은 갱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조직의 영역 보복 탓에 죽었다는 사연을 말해준다. 사건 현장에서 그는 저스틴에게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들고 말한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정확히 알까요? 아니죠. 근데 당신도 모르잖아요. 제임스가 무죄라는 당신의 주장은 그 사람이 유죄라는 내 주장만큼 확실하지 않아요.” 그가 다가왔을 때 저스틴은 한 손에 든 동전을 떨어뜨리고 다시 주웠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남자와 아이를 유산하고 알코올중독으로 고통받은 남자에게는 과거의 어둠이 있다. 영화는 그들이 간직한 어둠을 세세하게 소묘하지 않는다. 단지 동전을 떨어뜨리고, 돌멩이를 줍는 행위의 공유로 하나의 임시적 집단을 형성할 뿐이다. 이 집단의 규칙 아래서 범죄자와 배심원의 구분은 희미하다.

운명적 비애의 자리

떨어지는 물건과 그것을 줍는 동작에 왜 주목해야 하는가?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것은 ‘나’의 의지에 귀속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의도치 않게 물건을 떨어뜨리듯이, 인간은 불가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배심원 #2>에서 인간과 행위가 맺고 있는 관계의 진실이다. 하지만 법적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검사와 변호사는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제임스를 두고 각각 “악한 사람”과 “무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악한 사람도, 무결한 사람도 아니다. 이스트우드의 관점에서 그는 연인과 다툼 끝에 술잔을 떨어뜨린 사람일 뿐이다.

이 영화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법적 판단의 장소에 불려 나간 자들을 감싸는 운명적인 비애와 멜랑콜리가 있다. 하지만 그 우울한 정서는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그들의 신체나 표정에 귀속되지 않는다. 우울은 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장소와 사물, 각기 다른 증언자들의 기억과 기록에 모두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배심원 #2>이라는 영화의 거역할 수 없는 대기를 만들어낸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진실은 너무 멀고 어두운 대기에 감춰져 있다. 번쩍이는 번개와 빗줄기 속에 숨어 있다. 이 영화에서 법정에 선 인간들의 말과 행동은 대개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옳은 것과 나쁜 것을 판별하는 근거는 어둠 속에 있다. 이스트우드가 주시하는 것은 배심원으로 선택된 평범한 인간의 운명적인 불안과 고독이다. 불가피한 위협이 찾아온 자리에서 한 작은 남자가 실천하는 것은 얼굴을 감추고 고개를 숙여 물건을 줍는 것이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저스틴은 떨어진 것을 줍는 남자다. 그리고 <배심원 #2>에서 인간은 단지 물건을 떨어뜨리는 존재다. 고독하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그가 유일하게 실행하는 행동이 있다면, 이는 바닥에 떨어진 사물을 줍는 일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연신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떠는 한 남자를 때로는 억압하고 때로는 위로하면서 그가 수행하는 모든 동작을 기록한다. 그는 떨어지는 물건을 줍는 몸짓으로 영화가 창조한 세계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링컨과 저스틴

오래 미뤄두었지만 결국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배심원 #2>은 미국영화를 지탱하는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인 법정영화의 믿음을 심문하는 영화다. 그 믿음의 원형은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에 있다.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가 연기한 링컨은 한 가지 특별한 손짓을 심어둔다. 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줍는 동작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링컨은 연인 앤과 대화를 마치고 난 뒤 돌멩이를 주워 강에 던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같은 자리에 만들어진 앤의 무덤 앞에서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법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한다. 이 작은 손짓은 뜻밖의 자리에서 되돌아온다. 살인혐의를 뒤집어쓴 가난한 두 형제의 변호를 맡은 링컨은 형제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자신의 죽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는 형제의 어머니가 마차를 타고 떠나가는 순간에 고개를 숙여 돌멩이를 줍는다.

떨어진 사물을 줍는 링컨의 동작은 법적 믿음과 도덕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물리적 기반이다. 태그 갤러거의 분석을 빌리면 이 영화에서 “법은 자연이고 나무이고 강이고 대기이다. 법은 아름답고 그것은 영혼에 가닿는다.” <젊은 날의 링컨>에게 있어 법은 대기이며 아름다움이고 영혼이자 마침내 기적이다. 포드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줍는 소박한 행위를 느닷없이 반복함으로써 기적을 솟아오르게 한다. 줄곧 두 다리를 난간에 올려둔 채로 나오는 헨리 폰다의 링컨에게 지면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다는 것은 자세를 옮기는 일이고 타인과 연결되는 일이며 이상적인 도덕과 세계의 불확실한 실체를 결합하는 일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약속 위에서 “모든 가능한 균열”(태그 갤러거)을 안고 있는 존 포드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법을 매개로 진실이 정의를 대변한다는 믿음은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소실되어 있다. 이스트우드는 옳고 그름을 확신하는 링컨의 위대한 승리담을 비틀어 의심하는 자들(배심원, 검사)의 불투명한 패배의 이야기로 뒤바꾼다. 그들은 법적으로 승리하지만 어떤 도덕적 성취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떨어진 물건을 줍고 되돌려주는 행위가 남아 있다. 포드의 링컨이 한 발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속도를 맞춰 춤을 출 수 없는 인물이라면, 이스트우드의 배심원은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해 몸을 숙여 떨어진 것을 확인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확한 타이밍에 그 자리에 있다는 인물의 특징은 저스틴이 교통사고를 일으킨 원인이기도 하다. 저스틴의 비극은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는 데서 생겨난다. 저스틴은 문신처럼 새겨진 비극의 원체험을 되돌리기 위해, 사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 몸을 숙여 줍는 같은 동작을 끝없이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행위는 진실을 둘러싸고 있는 영화적 공간을 이중화한다. 재판의 진행과 법적 판단이 실행되는 법정 공간에 떨어지는 물건을 통해 사물의 진실을 프레임에 새기는 허구의 공간이 담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영화는 작은 몸짓과 제스처로 세계의 규율과 질서 체계를 흐트러트린다.

닫힌 문이 열릴 때까지

<배심원 #2>은 문턱을 넘어서는 발걸음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저스틴은 임신한 아내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곧 태어날 아기의 방으로 안내한다. 그는 아내의 안대를 풀고 함께 문턱을 넘어선다. 문은 구역을 나눈다.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을 나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아이 방의 문은 일찌감치 열려 있다. 두 사람은 눈을 뜨고 그 안으로 진입한다. 문을 열어두는 것은 미래로 향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리킨다. 열린 문과 안대를 벗은 눈. 실체와 은유의 두 가지 차원에서 열린 두 개의 문이 영화의 시작을 담당한다.

<배심원 #2>에서 문은 차례로 닫힌다. 법정과 회의실의 문, 집과 구치소의 문이 닫히면서 진실은 차단되고 모호하게 흐트러진다. 마침내 법정에서 제임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며 마지막 문이 닫힌다. 법은 하나의 진실을 선고한다. 제임스는 연인인 켄달을 살해한 범죄자다. 아무도 그 진실을 의심하지 않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를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스트우드의 카메라는 선고된 진실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마지막까지 응시한다. 영화는 다른 문을 열어야 한다. 저스틴이 죽은 켄달의 묘비 앞에서 떨어진 물건을 줍는 대신 애도의 꽃을 내려놓을 때, 영화는 다른 국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무덤 앞에 선 남자는 결심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첫 장면과 대칭을 이룬다. 저스틴의 아이가 태어났고 그는 첫 장면이 약속한 행복한 미래에 도착해 있다. 하지만 다시 누군가 문턱을 넘는다. 도입부의 저스틴과 아내가 눈을 뜨고 불투명한 미래에 발을 디딘 것처럼, 페이스가 그들의 문을 두드린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말에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지를 벗어나 타인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 문을 넘어 타인과 만나는 것은 해결되지 않는 불안정함으로 내면을 이끌지만, 결국 법과 제도가 강제하는 공간의 규칙을 넘어서는 해방의 몸짓을 선사한다. 페이스는 문턱 앞에 서서 저스틴을 바라본다. 그녀는 문턱을 넘는다. 페이스의 시선은 그녀가 고수하던 법적 믿음을 무너뜨리고 진실 너머의 진실을 보려고 한다. 이 순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워서 건네던 몸짓의 교환이 서로 다른 진실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먼 시선을 접속하기 위한 매개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교환의 이미지

<배심원 #2>은 교환과 이행의 영화다. 누군가 일으킨 우발적 사고는 다른 사람의 범죄와 교환되고, 은폐된 진실은 법적 정의로 이행한다. 불투명한 지각은 확고한 판단으로 이행한다. 보잘것없는 현실은 그럴듯한 허구로 교환된다. 손쉽게 벌어지는 교환과 이행은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공통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또 하나의 교환과 이행을 남겨둔다. 그것이 떨어뜨린 물건을 손으로 줍는 몸짓의 교환, 혹은 이행이다. 저스턴과 페이스가 물건을 떨어뜨리고 줍는 과정에서 교환되는 두 사람의 행위는 법정이 밝혀낸 표면적 진실 아래 감춰진 다른 차원의 진실로 두 사람을 향하게 한다. 이스트우드가 가리키는 교환과 이행의 영화적 이미지들은 스크린의 표면에 진실을 확보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진실을 하나의 이미지로 결정하는 대신 끝없이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두 얼굴을 나란히 비춘다. 이 영화가 지시하는 ‘정의’는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는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 정의를 둘러싸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검토하는 무수한 탐문을 통해 도래한다. 문턱을 경계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의 얼굴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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