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0주년을 맞이한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는 50년간 서독제에서 상영된 모든 작품 중 총 100편의 독립영화를 선정했다. 영화 창작자, 연구자, 배급 관계자, 평론가 등 40명이 설문에 참여했으며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4명의 선정위원이 최종 100편을 리스트에 올렸다. ‘서울독립영화제 50주년, 독립영화 베스트 100선’(이하 독립영화 베스트 100선)은 이번 <씨네21> 지면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호명된 100개 영화와 해당 작품의 감독들은 시대별로 한국영화사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거나 현재까지도 주목해야 할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다. ‘독립영화 베스트 100선’은 서독제의 50년 역사를 훑을 기회이자 시기별 한국영화사의 변화를 일부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 감독들의 단편들
단편 50선, 장편 50선을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단편 50선에는19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폭넓게 영화들이 선정됐다. ‘한국인은 백의민족’이라는 말에 의문을 갖고 “아이들의 색동옷, 움직임과 놀이 속에서 한국적 색깔을 찾아본”(한옥희 감독) <색동>, 여성 무용수의 일상을 바탕으로 순종적 여성을 바라는 시대에 대한 저항을 담은 김의석 감독의 <뫼비우스의 딸>, 취업난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이정국 감독의 <백일몽> 등 당대 현실을 짚거나 실험적 시도가 돋보이는 단편들이 1970~80년대에 다수 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중후반 무렵부터 한국영화의 격변기가 시작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주제와 표현 방식에 관심을 기울인 연출자들이 앞서 존재한 덕일 것이다.
1990~2000년대에는 보다 익숙한 창작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성수 감독의 <비명도시>에는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범죄가 일어나는 뒷골목 등 당대의 시대적 징후가 상징적으로 담겼다. 류승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도 수록된 단편 <현대인>에선 조직폭력배와 경찰이 맞선다. 누아르에 특화됐으며 역사적 시류를 민감하게 읽어내는 김성수 감독, 상반된 캐릭터의 대치 상황 및 액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류승완 감독의 연출적 특징은 그들의 초기 단편에서부터 감지된 것이며 <서울의 봄> <아수라>(김성수), <짝패> <베테랑> 시리즈(류승완) 등으로 이어져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의 <지옥: 두개의 삶 Part1> <지옥: 두개의 삶 Part2>는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의 근간이 되는 작품으로 연상호의 작품 세계를 일찍이 접할 수 있던 애니메이션이다. 제62회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 3등을 차지했던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 2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 많은 이에게 호평받는 김종관 감독의 <폴라로이드 작동법>,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 이종필 감독의 <불을 지펴라> 등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나아가 시리즈까지 자기 영역을 확장해나간 감독들의 영화도 여러 편 리스트에 호명됐다.
앞으로 50년이 지나도 기억될
장편 50선에는 다큐멘터리들이 다수 자리한다.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 <경계도시2>는 한국 정부로부터 간첩 혐의를 받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귀국을 감행하고, 귀국한 이후의 사건을 6년의 시간차를 두고 살핀다. 비전향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된 전후 상황이 담긴 김동원 감독의 <송환>, 탈북 소년과 조선족 소년의 우정을 묘사한 장률 감독의 <두만강>에선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단절과 공존의 경험이 주제로 다뤄진다. 대다수 다큐멘터리들이 동시대 한국의 사회문제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한편 펑크 밴드들의 삶을 유쾌하게 그려낸 이동우 감독의 <노후 대책 없다> 또한 리스트에서 호명됐다. 2010년대 무렵부터는 여성감독들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018년에는 김보라 감독의 <벌새>, 이옥섭 감독의 <메기>가, 2019년에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나란히 상영되며 화제성을 견인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도 <휴가>의 이란희 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 <성적표의 김민영>의 이재은, 임지선 감독 등 주목해야 할 신인 여성감독들이 꾸준히 배출됐다. 이제는 특정 시기의 경향이라 한정지을 수 없을 정도로 여성 창작자들의 활약이 이어지는 추세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 오멸 감독의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감독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개봉 전 서독제 상영 때부터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들이다. 뒤이어 이들이 내놓을 차기작을 기대케 하는 단초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 밖에 장편 50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김곡, 조현철, 이옥섭, 이정홍 감독 등 단편·장편 리스트 양쪽에 모두 이름을 올린 창작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긴 호흡의 장편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단편을 완성해 관객에게 선보일 자리가 마련된 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요컨대 ‘독립영화 베스트 100선’은 주요한 독립영화의 이름을 기록하는 동시에 영화제가 창작자들이 가진 잠재력의 씨앗을 틔울 수 있는 소중한 장소임을 되새기는 작업이다. 국내 영화제 최초로 50회를 맞이한 서독제에서, 50년 이후로 새로이 기록될 한국영화의 역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