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고래와 나>는 고래의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좇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는 드넓은 바다와 비밀처럼 은신한 고래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 그것이면 거대 규모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 충분했다. 사실 환경문제나 자연의 질서를 짚어내는 건 첫 기획 의도에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이끈 이큰별 감독은 고래의 나날을 들여다볼수록 해양 생명과 기후 위기, 환경문제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눈부신 풍경을 영영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이면 대양에 몸을 맡긴 플라스틱이 떠밀려와 누군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걸 목격했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계층인 고래는 이제 위험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화살표는 정확하게 인간까지 겨냥하고 있다. 총 4부작으로 나뉜 다큐멘터리는 110분의 영화로 재구성되어 커다란 스크린으로 재현된다. 8K 고화질 영상에 담긴 역동적인 생명력에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비애와 환희가 동시에 담겨 있다.
-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주제로 고래를 선택했다.= 교양PD라면 누구나 창사 특집을 꼭 한번 맡아보고 싶어 한다. 내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전에 시도한 적 없던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떠올린 게 고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명확한 이미지도 있었다. 망망대해, 아름다운 풍경과 커다란 고래들. 휘황찬란하고 스케일 큰 작품이 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시작하고 나서 그동안 아무도 안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웃음) 고래는 쉽게 찍을 수 없다. 인간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도 않고 바다에서 한달 내내 대기하더라도 방송으로는 10분 정도 나갈까 말까였다. 효율성면에서 제대로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의기투합했다. 모든 스태프가 전세계에 흩어져서 고래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들리면 무조건 그곳으로 향했다. 호주, 모리셔스, 미국의 동서부 등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오는 시간도 제각각이었다. 촬영하는 1년 동안 5~6년가량의 취재 밀도로 몰아붙였다.
- 거대한 규모만큼 예산 문제도 중요했을 것 같다.= 총 12억원이 소요됐다. 아주 저렴한 예산으로 엄청난 퀄리티를 완성했다고 자부한다. (웃음) 고래를 만나기 위해 한달 내내 배를 대여하면 대여비가 엄청나게 치솟는다. 무엇보다 <고래와 나>는 8K 카메라로 촬영했다. 일반 TV로 보는 화질보다 16배가량 화질이 좋다. 그런데 8K로 촬영하면 차지하는 데이터양이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모든 촬영을 끝냈을 때 300테라바이트가 사용되었다. 현장에서 백업하는 외장하드부터 이를 저장하고 보존하는 것까지 모든 게 비용이지만 꼭 8K로 찍고 싶었다. 그래야 고래의 장엄함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 영화로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진행했지만 진짜 영화로 나올 줄은 몰랐다.
- <고래와 나>에는 그간 보기 어려웠던 고래의 비밀이 공개된다. 먼저 어미고래가 새끼고래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 그리고 원래는 바다표범을 잡아먹는 북극곰이 오랜 굶주림 끝에 흰돌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이 그렇다.
=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이 많이 도와줬다. 100% 운이었다. 특히 새끼고래가 젖을 먹는 장면은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촬영됐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첫 번째는 제임스 캐머런 감독, 그리고 두 번째가 이큰별이다. (웃음) 세상에. 그 장면을 찍을 때 임완호, 김동식 촬영감독님은 산소통 소리가 고래의 경계심을 키울 수 있다면서 스쿠버 장비 없이 뛰어들었다. 그러한 노련한 기술과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 의지와 열의만으로 고래와 북극곰을 찾아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 국가마다 절차가 다르다.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 해군의 허가가 필요한 곳, 관광청의 도움이 필요한 곳 등 각기 상황이 다르다. 이 과정에 두달 정도가 걸렸는데, 원래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시기적으로 운이 좋았다. 이제 막 엔데믹에 접어든 많은 국가들이 관광객이 많아지길 바라는 상황에서 기획안을 제출했기 때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아프리카의 허가를 얻는 데 단 두달이라니. 정말 빠른 것이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다. 국가별로 각기 다른 기획안을 제출해서 기획안 버전이 30가지 정도 됐다.
- MBC의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SBS의 <최후의 툰드라> 등 대형 자연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버전으로 연결된 것은 드문 일이다.
= 사실 방송국이 처음부터 영화를 제작하는 건 구조적으로 어렵다. 그런데 <고래와 나>가 처음 방영되고 시청자 게시판이 폭발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밤 11시 편성이었는데 유자녀 시청자들이 아이들이 꼭 봤으면 좋겠다면서 재편성을 요구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영화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순전히 시청자가 만들어준 영화라 할 수 있다. 물론 TV 버전과 영화 버전은 차이가 있다. 총 4부작으로 나뉘었던 시리즈와 달리 영화는 110분 동안 한번에 매끄럽게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필수적이었다. 수족관에 갇혀 있는 고래 이야기를 빼고 바다에 서식하는 고래 이야기에 집중했다. 크고 넓은 스크린에서 관객들이 바다를 간접경험할 수 있도록 선택한 것이다. 해외영화제 출품도 고려하고 있다. 다른 것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외부적 수익 가능성을 확인한 이 경험이 다음 작업을 맡을 후배 PD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그것이 알고 싶다>의 경험이 드러나는 연출도 눈에 띈다. 원양어선의 실태를 폭로한 선원 한바다(가명)씨의 제보가 이어진다.
=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참치 회사에서 일했던 20대 친구가 그동안 목격한 것들을 기록한 영상을 제보해줬다. 그 안엔 엄청난 폭력과 실태가 담겨 있었다. 바다 위에서 급유하거나 기름 찌꺼기를 그대로 버리는 모습들이 드러났다. 그 아름다운 바다 위로 기름이 둥둥 떠다닌다. 배 안에서 이뤄지는 언어폭력, 신체폭력, 성폭력은 말도 못한다. 또 참치와 함께 혼획된 생명들을 유희로 죽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장면을 다큐멘터리에 충분히 활용할 수도 있었다. 짧게 편집해서 예고편에 넣어버리고 숏폼 콘텐츠로 돌려서 이목을 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극적인 것과 선정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아름다운 것에 집중해서 저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고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