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되는 연습을 하고 싶을 때 여자아이들이 비밀스레 찾아오는 소녀 ‘나’의 이야기를 담은 안담 작가의 소설 <소녀는 따로 자란다>에 인쇄된 작가의 사인 문구는 이렇다. “음란하고 불온한 소녀들에게.” 잘 말해지지 않은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이 소설은 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 역대 조회수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출간된 대화집 <엄살원> 역시 작가 안담을 말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활동가들을 한명씩 초대해 비건식을 대접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작업을 한유리, 곽예인과 함께한 그에게 글쓰기는 고독의 예술보다는 팀 작업에 가깝다.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글쓰기와 말하기를 하는 안담 작가를 만났다.
-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연극인, 무늬글방의 글방지기, 메일링 서비스 운영자, 에세이와 소설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말하는 텍스트와 글로 읽힐 텍스트를 다룰 때 차이점이 있나.
= 공연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다르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웃기면 장땡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농담을 구성했어도 무대에서 반응이 나오지 않을 땐 관객을 기준으로 수정한다. 반응이 좋은 쪽이 무조건 가치가 높은 텍스트인 셈이다. 결과물이 고정된 상태로 발표되는 다른 원고와의 차이점이다. 이건 좀 딴 차원인데, 글보다는 말이 창피와 더 큰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글방은 글쓰기만큼이나 말하기도 훈련하는 공간이다. 자기 글을 잘 읽히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의 글을 정성스럽게 읽고 말해야 한다. 나는 글방지기로서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다 보니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수치심에 잠식당할 때도 많다. 그럴 때는 아주 오래 읽거나 쓰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진다.
-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감각을 수치심이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소녀는 따로 자란다>에서도 여러 감정에 정확한 이름이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을 그린 소설인데도 그때 느꼈던 어떤 감정들을 내가 생애 전반에 걸쳐서 반복해서 겪고 있다는 것을 감정들에 붙은 이름으로 알게 되는 식이다.
= 부끄러움에 큰 관심이 있다. 가장 수시로 느끼는 감정이라서 그런 것 같다. 자기 작업을 발표하는 창작자들은 아마 다 이런 내적 갈등에 시달릴 것이다. 더 공부하고 나서, 더 쌓고 나서 보여주자. 아니야, 지금 당장 시작하자. 무늬글방 열기 전에 가장 많이 싸웠던 마음이기도 하다. 자격에 대한 생각. 내가 가짜라는 것이 탄로날 것 같고 내가 흉내내고 있다는 걸 누군가가 지적할 것 같다는 감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끼게 되는 때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 내 글을 쓰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은 계속 같이 가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동안은 그런 불안을 좀 잠재울 수 있다.
- 내게 자격이 있는가 하는 감각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외부적인 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학위 따기, 등단 절차 같은 것들. 그런데 안담 작가는 누군가가 만든 기획에 들어가서, 그러니까 청탁을 받아서 일을 하는 대신 직접 기획해서 일을 만들어왔다.
= 그런 외부적인 인정 역시 작업을 지속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인 승인을 거부하고 비등단 영역에서 활동하겠다는 포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글을 처음 배우던 10대 내내 그런 구분 이전의 글쓰기를 했던 것 같다. 내가 작가인지 아닌지, 내가 쓰는 게 소설인지 에세인지와 같은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글은 그냥 글이었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동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고 있을 때, 이슬아 작가가 일간 이슬아에 실을 글을 청탁해왔다. 또 하미나, 하은빈 작가와의 마감모임이 없었다면 자발적으로 계속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뭘 시도할 때마다 먼저 해본 친구들이 조언을 주고, 환호해주고, 보살펴주었다. 마치 과거의 자기한테 잘해주는 느낌으로.
- 글방을 운영하면서 여러 사람의 여러 글을 접했을 텐데 웃기는 글과 슬픈 글을 다루는 방법의 차이가 있나.
= 한 반에서 나온 글 중에 엄청 웃긴 글이 있고 엄청 슬픈 글이 있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같은 글이다. 물론 전혀 우습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한 얘기도 있다. 어떤 글은 사실상 글 이전 상태로 내게 도착한다. 자기가 말하길 원하는지 아닌지 작가도 모르는 상태에서 써내려간 글들. 그런 글에 대해 용감하다거나, 말해줘서 고맙다거나 하는 합평이 나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그건 더이상 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그 사람이 무엇보다 작가로서 여기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야기가 글로서 재밌어질 때까지 여러 번 써도 되고 나중에 번복해도 된다고 말한다. 왜곡도 하고, 편집도 하고, 과장도 하고, 축소도 하는 작가적인 힘을 실험해보라고.
- <소녀는 따로 자란다>는 3년 전에 완성한 소설을 이번에 책으로 출간한 경우다. 수정한 부분이 있나.
= 소녀의 엄마 얘기가 처음에는 마지막에만 언급되는 식이었다. 중반에 엄마의 전사에 가까운 이야기, 혹은 소녀가 엄마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지에 대한 에피소드가 추가되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이 소설을 읽고, 이 세계에는 좋은 어른이 부재해서 얘들이 이렇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최선의 어른이 있다고 해도 아이들이 경험하는 어떤 일들은 막을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 인간이 자라는 과정, 자기 욕망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이상한 사념이 있다.
= 아이든 여성이든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에게서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백해버리는 순간이 많이 일어난다. 실제로는 욕망이 있는 존재인 이상 어떤 순간에는 추해지게 되어 있고, 자기 욕망이 뭔지 모를 때는 이리저리 부딪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하고 민폐를 끼치면서 자랐을 텐데, 어른이 돼서 유년기를 상상하면 그런 건 휘발되고 환상만 남는다. 그때는 순수했는데, 하고. 그런데 아이들도 욕망으로 똘똘 뭉친 존재고 또 그 욕망을 연습해 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 주인공의 나이를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
=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하기에는 살짝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들 할 정도로 어렸으면 하는 정도의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중학생 정도만 돼도 어른의 기준을 적용할 때가 많으니까.
- <엄살원>은 안담 작가의 논픽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다. 활동가를 초대해 비건식을 대접하는데, 손님은 와서 엄살을 부리면 된다는 컨셉이 재미있다.
= 처음에는 아프고 우울한 여자들에게 밥을 해주고 싶다는 게 기획의 전부였다. 혼자 힘으로 비건 지향인이 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고, 가난하고, 우울한 사람은 어떻게 비건 지향인이 될 수 있나? 또는 아프고 가난하고 우울한데 왜 비건 지향인이 되려는가? 그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공동 저자인 한유리, 곽예인 두 사람이 참여하면서 ‘활동가에게 비건 만찬을 차려준다’는 지금의 정체성이 완성되었다. 예인은 이미지에 능해서 사진과 영상을 통해 엄살원의 감각적인 층위를 만들어주었고, 유리는 여러 활동가를 게스트로 섭외해서 엄살원이 동시대의 굵직한 운동들과 연결되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활동가들이 하는 일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인데 이들의 얘기를 듣는 사람은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엄살원>을 읽다 보면 하게 된다. 연대 현장의 분위기가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도 기억나고. 그 와중에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그런 활동가들의 말을 들어주고 밥을 먹인다는 게 그야말로 처방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부디 그랬기를 바란다. 사실 정말 밥 한끼로 퉁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엄살원을 하면서 예상외로 자괴감에 시달렸다. 이렇게 귀한 이야기인데, 내가 꼴랑 밥을 차려주고 들어도 되나 하고. 밥에 대해서도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어떨 때는 밥이 하늘인 것 같다가, 어떨 때는 ‘죽지 않기 위해서 먹는다’는 표현처럼 가장 천한 단계의 욕망과 관계하는 일인 것 같기도 했다가 그러니까. 그런데 손님들이 냉혹하게 가르쳐준 것이, “밥은 사랑이다, ‘꼴랑 밥’이라고 얘기하면 안된다”였다. 엄살원이 오히려 내게 처방전이 됐다면 손님들 때문일 것이다.
- 예정한 작업들이 있나.
= 메일링했던 글을 묶어 단행본으로 낼 예정이다. 올해는 정력적으로 일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나중에 한해를 돌아볼 때 원고를 많이 쌓았다고 느끼면 좋겠다. 메일링도 한번 더 할 예정이다. 채널예스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첫 원고에서 꽤 많이 헤맸다. 좀더 가볍게 쓰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처럼 비장해지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번에 참 재밌었다. 리듬을 잘 탔다” 하는 산뜻한 기분이 드는 마감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