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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과정을 ‘재미있게’ 전달하면 의미는 각자의 몫으로 피어난다, <서울의 봄>으로 천만 관객 돌파한 김성수 감독 인터뷰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24-01-05

진실은 의도를 초과하는 순간에 깃든다. 근현대사의 결정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서울의 봄>은 잘 만든, 재미있는 상업영화다. 단언컨대 이 영화의 재미와 의미는 관객의 선택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 숫자가 1천만 관객에 다다른다면, 그것도 사람들이 더이상 관성처럼 극장을 찾지 않는다는 엄혹한 시기에 달성한 성취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 수치를 넘어가는 순간 흥행은 완결된 결과가 아닌 진행형의 서사로 탈바꿈한다. 2023년 끝자락에서 출발해 2024년으로 이어지는 중인 <서울의 봄>은 의도를 초과해 다양한 형태로 호명되고 있다. <서울의 봄>의 흥행은 그 자체로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서울의 봄>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다시, 감독의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씨네21>에서는 <서울의 봄> 1천만 관객 돌파를 기점 삼아 김성수 감독을 다시 만났다. 이것은 흥행 요인 분석이 아니다. 왜 이렇게 많은 수의 젊은 관객들이 극장으로 기꺼이 걸음을 옮겼는지, 그들은 이 영화에서 무엇은 보았는지 살펴보기 위한 질문의 시작이다.

- 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축하드린다.

= 감사하다. 몇번을 말해도 모자라다. 후반작업에 매진한 올해 7월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쉰 적 없는 강행군이었다. 초반부에 혼자 무대인사를 돌 때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다. 어느 정도 반응이 올라온 후 배우들이 합류하면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더 치열하게 했다. (웃음) 천만을 기점으로 공식 행사는 대부분 마무리됐고 인터뷰도 더이상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씨네21>과 약속한 게 있어서 이렇게 나왔다.

- 1995년 데뷔 이후 28년간 다양한 경험을 했겠지만 이 정도로 관객과의 만남이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 홍보는 늘 어렵다. 육체적인 피로도 있지만 왠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피곤이 더하다. 말이 많아지면 피치 못하게 과장되거나 스스로 진실되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작품을 보여주는 걸로 끝나면 좋겠지만 사람들의 부름에 응답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매 순간 진실하고 싶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더 조심스럽고 어렵다.

- 역대 22번째 천만 영화다. 개봉 33일 만에 달성한 것도 놀랍지만 영화산업 전반이 침체를 겪고 있는 시기에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어냈다.

= 이제 천만은 구체적인 수치나 목표라기보다는 한국영화계의 어떤 상징이 됐다. <감기> 이후 나는 천만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절감했다. <감기> 때는 최대한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작, 이른바 천만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뒤돌아보니 그렇게 흥행을 목표로 삼으면 스텝이 꼬이고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걸 느꼈다. 다음 작품인 <아수라>에서는 정반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끝까지 파고들어 해봤다. 주변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 오로지 혼자, 원했던 걸 원없이 찍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걸 다 쏟아내고 나니 개인적으로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대중과의 접점,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한계도 체험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걸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진 않는구나’라는 걸 직접 확인한 셈이다. 그리고 <서울의 봄>을 만났다. <서울의 봄>의 시나리오는 충무로에서 꽤 오래 돌았는데, 김원국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가 딱 나에게 어울리는 시대의 이야기라며 제안을 건넸다. 김원국 대표는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 그 방면으로 꾸준히 영화를 개발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스탭과 배우들의 노력을 쏟을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준 기획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망원경에서 현미경으로, 모두 안다고 착각했던 역사 속 그날의 긴박감

- 때때로 시대로부터 호명되는 영화가 있다. <서울의 봄>이 그런 경우다. 무엇보다 10대, 20대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응답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정신의 발현으로도 보인다.

= 그런 의미는 언론에서 찾아주는 거니까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았다. (웃음) 많은 관객들이 봐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불의가 승리했던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인 만큼 상업적으로는 한계와 약점도 많다고 생각했다. 목표가 있었다면 영화를 잘 만들어서 역사를 잘 몰랐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대중영화인 만큼 오락적으로도 재미있게 만드는 거였다. 약점이 많으니 관객들에게 외면받지 않도록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노력한 거지 특정 관객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젊은 관객들에게서 반응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왜?’였다. 천만 관객이 넘은 지금도 내게 숙제 같은 질문이다. 조금 더 거리를 둔 다음에야 찬찬히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집단지성, 대중의 힘, 시대정신 등 뭐라 부르건 확실한 사실 하나는 관객들은, 대중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보다 현명하다는 사실이다.

- 극장의 침체를 이야기했지만 결국 좋은 영화, 필요한 영화에는 응답한다는 게 새삼 증명됐다. 그런데 그게 <비트>와 <태양은 없다>를 만들었던 김성수 감독의 최신작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30여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흐름과 트렌드를 잡아내는 비결이 있을까.

= 애초에 노린 것도, 잡아낸 것도 아니다. 심지어 <비트> 때도 그랬다. 굳이 말하자면 찾아와준 거지.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어둠 속에 관객을 가둬놓는 행위다. 내 세대의 관객들은 자발적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스크린이 펼치는 마법에 매혹될 준비를 마친 후 숨 죽인 채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 지금은 극장 바깥에도 볼거리가 너무 많아 과거와 같은 방식이라면 금방 튕겨져나가는 시대인 거 같다. 사실 나도 잘 알지 못한다.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거나 공략한 적도 없다. 그저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면 러닝타임 동안은 관객들을 극장에 꼭 붙들어매두고 싶었다. 일단 12·12 쿠데타의 8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내릴 수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달려나간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지만 진짜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고. (웃음) 적어도 그렇게 해야 이 영화의 존재 의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영화들이, 필요한 메시지들이 무관심으로 흘러 지나가는 걸 숱하게 봐왔던 입장에서 그날 밤의 상황만큼은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그게 핵심이다. <서울의 봄>은 일단 재미있다. 일종의 워게임 같은 상황을 바탕으로 선악 구도를 확실히 나누고 정신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캐릭터를 깊게 파고드는 걸 일정 부분 포기하고서라도 상황과 흐름의 속도감을 놓치지 않는다.

= 처음부터 명확했던 목표는 상황을 선명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다만 그게 인과관계의 ‘설명’이 되지 않길 바랐다. 워게임 같다고 했는데 그게 컨셉 중 하나였다. OTT 콘텐츠 중 가장 인기 높은 것 가운데 하나가 축구 중계라고 하더라. 두팀이 대결하면 관객들은 어느 한팀을 응원하기 마련이다. 사실 별다른 서사 없이 공 하나 던져줬을 뿐인데 공의 향방에 따라 끊임없이 긴장감이 유지된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12·12 쿠데타의 결과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긴장감을 줄 수 있는 건 과정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다.

- 맞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결과임에도 예측 불가능하다. 그게 재미의 핵심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선악 구도, 변하지 않는 인물 등 서사적으로 약점투성이인 영화인데 그게 전혀 약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 전통적인 선악 구도와 단순한 인물은 액션영화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과정을 재미있게 디자인하는 게 중요하다. 12·12 쿠데타는 단 하룻밤 사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그것만 충실히 풀어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매혹된 영화들은 서사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예상 밖의 방식으로 이어나가는 작품들이었다. 무협영화나 서부극도 그렇고. 인과관계에 의한 연결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 사이가 조금 헐거운. 논리 바깥의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그 사이에 생동감과 ‘진짜’가 피어난다. <비트> 때부터 생긴 나쁜 버릇이랄까, 서로 상관없는 장면들을 점프하듯 연결시켜 긴장감과 톤을 유지시키는 게 재밌다. 대중적으로 친절한 방식은 아니다. 나는 늘 실패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이번에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서사적으로 결정된 이야기, 실화 바탕이라서 극대화된 접근법인 것 같기도 하다. 김상범 편집감독은 <아수라> 때부터 함께했는데 나와 관점이 비슷하다. 영화적 매혹이라고 할까. 매끄러운 연결보다 예측 불가능한 충돌이 좋다.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는 장면을 들이밀 때 관객도, 나도 만족할 수 있다. 내 역할은 과정을 ‘재미있게’ 전달하는 것까지고, 해석과 의미는 각자의 몫이다.

- 실패라고 하지만 그거야말로 김성수 감독의 색깔과 개성이다. 오늘날 한국영화에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한편, 생각해보면 지금 설명과는 반대로 초반 30분가량은 마치 교육다큐멘터리처럼 친절하고 정확하게 전사(前史)를 설명해준다. 바로 자극적인 본론으로 치고 나가는 게 요즘 콘텐츠들의 경향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반대 방향인데, 이게 도리어 12·12를 잘 몰랐던 관객에게 효과적인 전략이 됐다.

= 140분 동안 관객을 극장에 붙들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설명이 짧을수록 좋다는 걸 알지만 관객을 납득시키려면 일단 내가 납득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그 최소한의 시간이 30분이었다. 20분 정도로 끊어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편집을 해도 더 줄일 수 없었다. 옛날 같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편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감기>와 <아수라>를 차례로 경험하고 나서 생각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아무리 잘된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6개월 뒤까지 생각나는 영화는 흔치 않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흘러가는 매체다. 기왕 그럴 거라면 내가 생각했던 모습으로 영화가 살아 있으면 좋겠다. 지금 버전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었고, 더 다듬을 여지가 없다.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1212만 관객을 달성하면 5시간 버전 디렉터스 컷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첫 버전이 3시간가량이었고 거기서 다듬고 다듬어 지금의 러닝타임까지 왔다. 앞일을 장담할 순 없지만 현재로선 디렉터스 버전을 낼 생각은 없다.

감독 김성수의 길 위에서 마주한 시대의 교차점

- <감기>는 흥행을 위해 여러 요소를 많이 신경 쓴 영화였고, <아수라>는 하고 싶은 걸 다 쏟아낸 작품이었다면 <서울의 봄>은 이른바 대중성과 작가성, 그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결과물처럼 보인다.

= <감기>는 매우 좋은 소재와 이야기였고 배우, 스탭 모두 좋았다. 다만 감독으로서 내가 이 정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전체적인 운용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걸 느꼈다. 내적인 통일성이나 장면의 밀도 같은 것들. 흥행감독으로서의 안목이나 엄격함 같은 게 부족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 영화다. <아수라>를 찍을 때 이미 50대 중반이었고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면 어떻게 하고 싶을까를 먼저 생각했다. 내 방식대로 찍어보고 조용히 사라지자는 마음으로 끝까지 갔다. 나는 너무 좋은데 소통의 여지를 닫았더니 편협해졌다. 뒤돌아보니 그런 태도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반영된다는 걸 절감했다.

- 겸손하게 얘기하지만 <아수라> 같은 영화가 세월이 지나도 결국 기억되고 소환되어 살아남으리라 생각한다. 감독의 개성과 의지가 오롯이 빛나는, 그래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영화들이 한국영화를 지탱해왔다.

= 결과와 무관하게 <아수라>처럼 문을 닫아걸고 ‘이건 내 영화야’라고 찍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꽉 찬 객석도 언젠가는 텅 빌 수밖에 없고 온전히 나 혼자 남을 때의 충만함, 쾌감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대중을 상대로 한, 대량복제 시대의 예술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서울의 봄>은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할 수 없는 영화였다. 실제와 픽션 사이 어떤 균형감각과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영화가 비로소 지금, 내게 찾아온 거다.

- 개인적으로 인연과 운명을 믿는다. <서울의 봄>은 <비트>와 <태양은 없다>, <무사>와 <감기>, <아수라>를 거쳐온 김성수 감독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김성수 세계의 총합과 같은 영화라고 본다. 남성성을 현현한 판타지, 가장 김성수스러운 장르라고 할까.

= 총합이라. 그건 언론이나 평론의 몫으로 남겨야 할 언어다. 다시 말하지만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저 필요한 이야기를 객관적이면서도 재미있게,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고 현재의 최선이 <서울의 봄>이다. 이 소재가 가진 대중영화로서의 약점을 어떻게 극복할지, 그것만이 나의 고민이었다. 다행히 내 주변엔 오랫동안 함께해준 좋은 동료와 스탭과 배우들이 있어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했다. 다만 한 가지, 지금 내게 이 영화가 찾아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 빛을 상징하는 이태신(정우성)이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장면이나 대척점의 어둠에서 전두광(황정민)이 어둠 속에 잠기는 장면 등 명장면이 많다. 그 밖에 유독 마음이 쓰이거나 언급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 전두광의 디테일은 배우 황정민의 것이다. 이태신은 이상적인 남성성의 총합인데 결국 현실 버전으로 말한다면 정우성이 곧 레퍼런스였다. 정우성 배우가 참고할 자료를 달라고 했을 때 정우성 본인이 했던 인터뷰를 보내줬다. 훌륭하고 근사한 인간. 그 태도는 한국영화에 소중한 자산이다. 장면은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공수혁 특전사령관(정만식)과 그를 호위하는 오진호 소령(정해인)이 나오는 장면인데, 교차편집 방식으로 진행하던 영화에서 갑자기 8분 가까이 쭉 보여준다. 전체의 결을 해칠 수 있지만 이 장면이 통으로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단편영화 같은 느낌도 있고 관객들에게 주고 싶은 나 나름의 선물이었다. 내 생각에 12·12 쿠데타를 압축하는 진정한 피해자이자 실존 인물인 정병주 장군과 김오랑 소령은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진짜 군인들이다. 전체적으로 픽션을 가미했지만 그 시퀀스만큼은 100% 사실에 기반했다. 또 하나는 정상호 참모총장(이성민)을 납치할 때의 롱테이크다. 한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그날의 출발인데, 이 장면을 찍을 때 이성민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잘라내지 않고 통으로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이게 맞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잘라낼 수 없는 자로 잰 듯한 연기. 그때 이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만 관객을 훌쩍 지나 벌써 1100만명이다. <서울의 봄>은 이미 한국 영화산업의 흐름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진행형이라 조심스럽지만 <서울의 봄>이 감독 본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

= 그걸 말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영화로부터 거리를 두는 중이다.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어떤 일이든 반작용이 있다. 다만 이 나이가 되니 깨닫는 게 있다.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태도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1천만 관객은 이미 개인의 노력과 성취를 떠난 차원의 결과다. 이 거대한 축복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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