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도쿄의 무더위가 가신 10월23일, 제36회 도쿄국제영화제(이하 도쿄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예년처럼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를 중심으로 축제의 열기는 긴자지구와 유라쿠초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안도 히로야스 도쿄영화제 이사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영화제가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영화와 영화인들을 초청했다”며 그간의 노력을 전했다. 실제로 올해 개막식에는 “430명을 기록한 지난해 개막식 참석자 수의 2배를 웃도는 892명이 참석”(안도 히로야스)했다. 첫날의 에너지가 강렬했던 덕일까. 개막식 이후로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당일의 상영 시간표를 확인하고,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 앞에 마련된 야외극장을 방문하는 관객의 발길이 계속됐다.
36번째 도쿄영화제의 개막작은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였다. “숲속에서 조용히 삶을 영위하는 듯한”(야쿠쇼 고지)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을 차분히 담아냈으며 히라야마 역의 야쿠쇼 고지로 하여금 제76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게 한 작품이다. 개막작이 상영되기 전, 빔 벤더스 감독은 야쿠쇼 고지를 비롯한 출연배우들과 무대 인사를 가졌다. 작품을 연출하게 된 경위를 묻는 질문에 일본 건축가들이 시부야의 화장실을 리모델링한 “‘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답했다. “화장실이라는 장소가 몰라보게 변해 있었고 이 장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앞서 칸영화제에서 상영하긴 했지만 도쿄영화제에서도 선보이길 바라던 차였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꿈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영화산업에 공헌한 감독에게 주어지는 도쿄영화제 특별공로상 시상식의 주인공은 장이머우 감독이었다. 그는 1986년 도쿄영화제에서 <노정>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때를 상기하며 “이것은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여러분과 또 만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폐막작 <고질라 1.0>의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 배우 가미키 류노스케, 하마비 미나미(왼쪽부터).
48개국 219편의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고 이중 15편이 경쟁부문에 올랐다.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3편의 일본영화 <정욕> <안개 낀 낙원> <우리가 누구였지?> 외에도 <성스러운 거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자르 아미르가 가이 나티브 감독과 공동 연출한 <타타미> 등이 포함됐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설표> <롱숏> 등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린 세편의 중국영화를 가리키며 “돋보이는 중국영화들이 많았다”고 평을 남겼다. 개막작 감독 외에도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겸한 빔 벤더스 감독은 영화감독 알베르트 세라, 프로듀서 구니자네 미즈에·트란 티 빅 응옥, 배우 겸 프로듀서 자오타오 등 다른 4명의 심사위원과 함께 “마음을 열고 지적이고 교양 있게 심사를 진행하겠다. 논쟁은 폐막식이 거행된 후에 치르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진정한 교류의 장
“도쿄‘국제’영화제인 만큼 국내외 영화인들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안도 이사장은 “지난해엔 104명의 해외 게스트가 방문했으나 이번에 초청한 해외 영화인은 2천명에 육박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토크 프로그램, 심포지엄을 비롯한 이벤트에서 여러 국가가 협업한 작품을 소개하고 일본과 해외 영화인들의 소통의 장을 형성하고자 한 시도가 눈에 띄었다. 아마존 오리지널 영화 <너클 걸>을 소개하는 스페셜 토크 세션 ‘한일 영화 제작의 미래’ 심포지엄이 대표적인 예다. <너클 걸>은 동명의 한국 웹툰을 원작으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크로스픽쳐스와 일본의 아마존 스튜디오가 공동 제작했다. 복서 란(미요시 아야카)이 범죄 조직에 납치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불법 격투에 참여하고,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치는 범죄 액션물이다. 연출을 맡은 창감독, 프로듀서 토머스 김, 복서 란 역의 미요시 아야카, 이시자카 다구로 촬영감독이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영화 <표적> <계춘할망>,드라마 <장미맨션> 등을 만든 창감독은 “합작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건 시나리오의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장르 면에선 액션,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물이 전세계 관객에게 소구하기에 좋다. 앞으로도 타국간에 교류하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됐으면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개막작 <퍼펙트 데이즈> 상영 전, 빔 벤더스 감독과 출연진의 무대 인사.
10월26일 열린 ‘아시아 영화 학생 교류 프로그램 마스터클래스’에는 일본, 중국, 홍콩,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초청됐다. 참여한 학생 수가 많아 의자를 새로 가져다가 자리를 채워야 했고 금세 라운지가 메워졌다. 젊은 영화 창작자들이 모인 현장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함께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93년, 자신이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감독에 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일부 보여주며 말문을 열었다. “20~30대 시절에 TV프로그램과 영화 중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마찬가지로 처음 영화계에 입문할 여러분들에게 당시의 내 경험을 나누면 좋을 것 같았다.” 대화는 <환상의 빛>을 제작할 때 그가 허우샤오시엔 감독에게 들은 조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완성작을 본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기술은 좋다. 그렇지만 모든 숏의 스토리보드를 미리 그려둔 채 작업한 게 아닌가. 배우의 연기를 보기 전에 어떤 신을 어떻게 촬영할지 어떻게 알겠나”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을 찍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허우샤오시엔과 여러 번 합을 맞춘 마크 리핑빈 촬영감독과 협업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스토리보드를 그려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리핑빈은 먼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싶어 했다. 배우의 연기를 본 뒤 촬영할 위치를 지정하고, 거기서부터 내가 원했던 그림의 동선을 정리했다. 그 경험이 내겐 굉장히 중요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미리 준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에 얽매인다면 눈앞의 흥미로운 상황을 놓치게 될 것이다. 나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나에게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려 했다고 믿는다.”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 날은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은퇴 뉴스가 들려온 날이기도 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대만뿐 아니라 홍콩,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젊은 감독들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를 부르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의 목표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여긴다.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열띤 질의응답과 함께 이날의 마스터클래스가 마무리됐다.
밀도 높은 감상의 자리
마스터클래스가 끝난 뒤 포즈를 취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3년은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탄생 120주년이자 사후 60주년이 되는 해다. 안도 이사장은 “지난해 영화제가 끝난 직후부터 오즈 감독의 120주년을 기리는 이벤트를 계속 고민”해왔다고 전했다. “오즈 감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빔 벤더스 감독이 심사위원장으로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도쿄영화제는 축제 기간 동안 일본의 영상자료원인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와 협업해 “30편이 넘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디지털 복원본에 영어 자막을 첨부해 상영”(이치야마 쇼조)했다. 안도 이사장과 이치야마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못 말리는 꼬마>(1929) 최장판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세계 최초로 상영하게 된 점 역시 강조했다.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에선 관객들이 실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는데, 덕분에 다양한 국가와 나이대의 관객이 즐겁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상영이 새로운 관객들에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소개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던 이치야마 프로그래밍 디렉터의 바람이 마침내 실현된 순간이었다.
‘오즈 야스지로 120주년 기념 토크: Shoulders of Giants’는 행사가 열리기 전부터 일찍이 관객과 기자들의 기대를 모았다. 빔 벤더스 감독의 개회사와 함께 <안녕하세요>의 디지털 복원판이 상영된 뒤 구로사와 기요시, 켈리 라이카트, 지아장커 감독이 오즈 감독의 영화에 관해 논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에 관한 짧은 감상을 전한 세 감독은 자신들이 인상 깊게 본 오즈 야스지로 작품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무네가타 자매들>을 고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즈의 작품이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간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오즈는 전쟁이 일어난 후 10년 동안 강렬한 감정과 관계를 묘사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무네가타 자매들>의 일부 구간에선 폭력적인 모습이 연출되는데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일지 모른다. 아티스트들은 전쟁과 같은 강렬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을 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오즈의 작품이 보다 풍부해지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지아장커 감독은 <늦봄>에 관한 의견을 전했다.
오즈 야스지로 120주년 기념 토크 행사에 참석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켈리 라이카트 감독, 지아장커 감독(왼쪽부터).
“오즈 야스지로 감독 작품의 대부분이 일본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탐구하고 장기적인 변화의 기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묘사한다. <늦봄>에서는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는 부녀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는 가족 관계의 따뜻함이 때로 구속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늦봄>은 가족 관계에 동시대성이 미치는 영향을 강력하게 묘사하고 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번 심포지엄을 위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도쿄 이야기>는 로드 무비지만 미국의 로드 무비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미국의 로드 무비는 주로 주인공이 자아를 찾는 여정이며 가족의 제약에서 벗어나 집을 떠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오즈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반응이다.”
곧이어 “오즈의 초기작은 다소 붐비는 느낌이지만 후기로 갈수록 미니멀해지고 세트와 배우 등을 최소화해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놀라웠다. <도쿄 이야기>에서도 카메라가 단 한번 움직이는데, 그 정적인 분위기가 아름다웠다”고 덧붙였다. 심포지엄이 치러진 다음날, 인터뷰로 만난 조조 히데오 감독은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지나가는 마음>을 드라마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 관해 들려주었다. 100년 전 완성된 거장의 작품이 디지털로 복원돼 상영되는 동시에 동시대 감독의 손에서 새롭게 재해석되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뿐인가. 다른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결의 작품을 만들어 온 세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를 논하는 한편, 데뷔작을 손에 든 신예 창작자가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들 앞에 선다. 시공간의 경계를 가뿐히 무너뜨리며 신선한 감상의 기회를 선사하는 영화제의 힘을 다시금 실감했다.
레드 카펫에 선 빔 벤더스 감독과 배우 다나카 민(왼쪽부터).
폐막식이 치러진 11월1일, 최우수작품상은 페마 제덴 감독의 <설표>에 돌아갔다. 지난 5월 갑작스레 별세한 감독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조하오 프로듀서와 배우들이 대리 수상했다. <정욕>의 기시 요시유키 감독이 관객상, 최우수감독상을 차지함으로써 주연을 맡은 이나가키 고로는 지난해 초청된 <창가에서>와 더불어 2년 연속 관객상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됐다. 영화제측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총 7만4841명의 관객이 도쿄영화제를 찾았다. 5만9541명의 관객이 든 지난해와 비교해 성대한 행사였음을 의미하는 지표다. 폐막작으로 선정된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의 <고질라 1.0> 상영과 함께 도쿄영화제는 10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도쿄영화제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