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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프리 철수 리’ 하줄리, 이성민 감독
정재현 사진 오계옥 2023-10-26

1973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갱단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백인 목격자들은 사건의 범인으로 21살 청년 이철수를 지목한다. 실제 살인범과 신장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단지 동양인이라는 허술한 이유에서였다. 누명 속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철수는 감옥에서 또 다른 폭력 사태에 휘말려 사형수가 된다. 절망 속에 남은 생을 보낼 줄 알았던 이철수는 복역 중 당시 미국 주요 언론의 유일한 한국 기자였던 이경원을 만난다. 이경원은 그의 억울함을 간파하고 이 사연을 보도했다. 이후 미국 내 한인 사회와 아시아계 이민자 사회 전체가 들썩였고, 이들은 “프리 철수 리!”(철수에게 자유를!)를 외치며 미국 내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항거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1983년, 이철수는 석방된다. ‘프리 철수 리’ 운동 이전과 이후 이철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리 철수 리>는, 프리 철수 리 운동이 진행된 기간과 동일하게 총 6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언론인 출신 하줄리 감독과 <인사이드 잡>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영화 편집부에서 활약한 이성민 감독은 6년간 끈질기게 이철수와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프리 철수 리 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들었다. 하줄리, 이성민 감독의 성실한 노력은, 이철수의 목소리를 세상에 다시 알리고픈 또 하나의 프리 철수 리 운동이었다.

- 제작 당시부터 한국 개봉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줄리 40여년 전 프리 철수 리 운동이 벌어지던 때 대한민국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했다. 당시 프리 철수 리 운동을 소재로 한 MBC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도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이철수씨의 이야기가 한국에 다시 전해지길 희망했다. 더군다나 이철수씨는 한국전쟁 때 태어나 유년기를 한국에서 보냈다. 이 영화는 한국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 이철수씨의 절친한 친구였던 변호사 랑코 야마다, 운동 당시 언론의 소임을 제대로 보여줬던 이경원 기자 등 취재원들의 지원사격이 놀랍다.

하줄리 30년 넘게 나의 멘토인 이경원 기자가 직접 나서서 많은 취재원들 섭외를 도와주었다. 18살 때 이경원 기자를 만나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며 랑코 야마다, 제프 아다치 같은 분들의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다. 이경원 기자가 나의 영웅이라면, 랑코와 제프는 이경원 기자의 영웅이었다.

이성민 청소년 시절부터 이경원 기자를 알아왔다. 그는 천생 기자였고, 당시로선 드문 탐사 보도 전문 기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시안 커뮤니티에 큰 관심을 가졌다.

- 세바스찬 윤이 녹음한 1인칭 시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어떻게 창작해갔나.

하줄리 이 에피소드를 풀려면 이경원 기자 이야길 또 해야 한다. (웃음) 나는 이경원 기자 때문에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코리아타임스>의 인턴 기자로 일할 당시 그를 통해 이철수 이야기를 처음 접했고 바로 매료됐다. 프리 철수 리 운동이야말로 기자의 피를 끓게 하는, 언론이 아시안 이민자들로 하여금 연대해 사회정의를 부르짖게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후 아시아계 미국인 전문지 <코레암 저널>의 편집장이 됐고 이철수씨를 만나게 됐다. 이철수씨의 이야기를 꼭 기획 기사로 다루어야겠다고 준비하던 중 바로 다음해에 이철수씨가 세상을 떠났다. 기획 기사보다 부고 기사를 먼저 쓰게 된 셈이다. 상당한 중압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장례식장에서 프리 철수 리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만났다. 무려 본인 인생의 6년을 낯선 이를 돕는 데 쏟았던 그들도 장례식 내내 이철수씨와의 시간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골몰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이 영화의 실마리를 잡았다. 장례식장을 짓누르던 관련인들의 중압감에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무거운데 죽은 이철수씨의 마음은 오죽하겠나. 이철수씨에게도 평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이철수씨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그를 치하하는 것이 아닌 그가 자기의 목소리로 본인의 일대기를 읊게 만드는 것이었다.

- 방대하고 충실한 아카이브 자료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이다.

이성민 프리 철수 리 운동을 다루었던 방송국이나 지역 도서관 등에서 사료를 찾기도 했지만, 우리 영화에 사용된 푸티지의 상당수는 실제 구명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개인 소장 중인 자료로부터 나왔다. 아시아계 이민자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 그다지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아 사료로 보존되기보다 유실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투쟁사를 소중히 여기는 아시안 커뮤니티가 아니었다면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 이철수씨의 어머니 또한 이철수씨 못지않게 복잡한 캐릭터다.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학대를 가한 가정 폭력범이고, 첫 수감 때만 해도 아들을 불신하다 이후 누구보다 구명 운동에 열렬히 참여한다. 하지만 이철수씨의 출소 이후 두 모자는 또다시 긴 반목에 돌입한다.

하줄리 두 모자의 최측근인 도로시에 따르면 이철수씨는 어머니의 사망 직전 조우해 긴 대화를 나눴다. 둘의 시간이 끝난 후 이철수씨의 모친이 도로시에게 “나는 철수가 걱정돼. 내가 떠나면 철수를 꼭 지켜봐주겠니”라고 언급했다고 들었다. 분명 이철수씨의 모친은 학대 가해자다. 동시에 한국 역사가 낳은 피해자고,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아온 존재다. 아들과 평생을 갈등했지만 끝내 친구들에게 아들을 지켜달라 부탁한 것을 보면 그 속엔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 영화에 따르면 프리 철수 리 운동은 민권운동을 넘어 이민자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문화 현상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 운동을 기록하는 데 소홀했다.

하줄리 언급한 현실이 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 프리 철수 리 운동은 틀림없이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의 획기적인 사건이고, 범아시아 민권운동의 성공 사례다. 하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를 다룬 수업에서도 이 운동은 다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이철수씨가 출소 후 말끔한 인생을 살았다면 이 이야기는 역사에 길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철수씨는 출소 이후 방황하고 좌절하며 심지어 다른 죄목으로 감옥을 몇 차례 오갔다. 모범적 소수자(준법정신과 근면함으로 인종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이민자)라는 개념이 있지 않나. 이철수씨의 삶은 출소 이후의 이력이 깨끗하지 않다는 이유로 성공 사례 자체가 부정된다. 그래서 망가진 이철수씨의 인생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임으로써 출소한 이들의 자립을 위한 사회적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상징이 된 사람의 고역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평생 사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다.

- 영화가 이철수씨를 재현하는 방식이 사려 깊다. 재미교포인 두 감독님이 당사자성을 지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줄리 이철수씨를 한번도 대면 인터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남긴 흔적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충분히 다가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세바스찬 윤과 내레이션 작업을 시작했을 때에야 이철수씨의 본질에 닿은 기분이었다. 세바스찬 또한 수감 경험이 있는 배우다. 우리 영화의 PD가 출소자 교화 프로그램의 제도적 필요성에 관해 연설하는 그를 보고 이철수씨를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의 가편집본을 본 세바스찬이 “나는 이철수씨와 공명할 수 있다. 이 작업이 설령 나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대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던 이철수씨의 변호인이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성난 사람들> 그리고 올해 미국에서 큰 주목을 모은 <패스트 라이브즈>까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삶을 당사자의 언어로 표현하는 영화들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며 이같은 미디어 산업의 지형 변화를 체감하나.

하줄리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전부 표현하는 아시아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른다. (이성민 감독을 툭 치며) “나 때는 말야 아시아인 서사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 (웃음) 주류 미디어에 다양성이 충족되지 못하던 시절엔 나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반영하는 거울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느꼈던 재현의 불충족이 이민 3세대에 와선 옅어졌다. K팝이나 한국 드라마의 흥행도 어린 친구들의 자존감 고취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현상이 금방 사라질 트렌드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규칙이 되길 바란다.

- 영화 속 취재원들은 기실 이철수씨에게 마냥 호의적일 순 없다. 출소 후 이철수씨가 수차례 이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원들은 이철수씨로부터 받은 감화 덕에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추모한다. 두분에게도 이철수씨로부터 받은 긍정적 기운이 있나.

이성민 많은 미국인들이 가족 구성원들의 약물중독 문제로 고생한다. 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결속력은 변치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투쟁의 나날이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사랑이 존재한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사랑을 담아 몇번이고 이철수씨를 구원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깊은 고통이 지나가면 무조건적 인류애가 자란다”는 작중 대사를 사무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하줄리 작업 2년차에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암과 싸우는 과정은 당연히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낙심할 때마다 이철수씨가 떠올랐다. 이철수씨는 원가정으로부터 무조건적 사랑도, 주변의 지지도 받지 못했는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강인함을 반추하며 나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었다. 그 순간부터 이철수씨는 내 영화의 주인공을 넘어 계속 싸워나갈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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