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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영화, 미술을 만나고 패션을 입다, 프라다 모드 서울
정재현 2023-09-15

제10회 프라다 모드 서울 행사가 9월5일과 6일 양일간 인사동에 위치한 문화 공간 코트(KOTE)에서 열렸다. 프라다 모드는 동시대 문화를 중심으로 프라다 회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는 순회형 프라이빗 클럽으로 전세계 다양한 지역을 돌며 각 지역에 걸맞은 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을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행사다. 프라다 모드는 2018년 미국 마이애미를 시작으로 런던, 파리, 상하이, 모스크바 등을 거친 후 2023년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추어 대한민국을 찾았다. 이번 프라다 모드 서울의 핵심은 전시 <다중과 평행(PLURAL AND PARALLEL)>에 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휘트워스 미술관 관장인 이숙경 큐레이터가 기획한 이 전시엔 김지운, 연상호, 정다희 감독이 참가해 세곳의 부스에 자신의 개성과 숙고를 담은 장소 특정 설치 작품을 전시했다. 또한 세 감독은 자신의 전시와 어울릴 만한 세편의 영화를 선정해 행사 기간 중 하루 1회 상영회를 가졌다. 9월 초입임에도 여전히 무더웠던 날씨가 무색하게 행사장 안팎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행사 중간에 마련된 세 감독의 대담 자리 또한 모두 만석이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1시간 전 세계 각국의 언론사를 대상으로 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기자간담회에는 이숙경 큐레이터와 김지운, 연상호, 정다희 감독이 참석했다. 행사를 기획하며 “무엇이 한국 문화의 현재와 동시대 감수성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한 이숙경 큐레이터는 장고 끝에 영화를 떠올렸다. 이숙경 큐레이터에 따르면 “영화는 모든 이가 즐길 수 있는 대중예술”이라 “수십년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영화가 미술과 패션을 만나고 입었을 때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다”고 전했다. 또한 이숙경 큐레이터는 프라다가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를 넘어 문화 재단으로 기능해온 오랜 역사를 언급하며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미우치아 프라다 회장이 직접 프라다 문화 재단과 한국 영화감독이 협업한 후 이들의 작품을 한국의 영화사와 연결해보는 시도를 제안했다”는 비화도 밝혔다. 한편 기자간담회에선 프라다와 김지운 감독의 인연이 공개되기도 했다. 2009년 열린 ‘프라다 트랜스포머 영화제’에서 프로그램 큐레이팅에 참여한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영화평론가 로버트 미첼이 직접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상영작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지운 감독이 준비한 설치 작품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다. 김지운 감독은 설치 작품을 제작하게 된 배경으로 ‘서울’을 꼽았다. 김지운 감독 본인이 “집안 대대로 서울 토박이라 서울이 변해오는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쭉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은 서울을 “서로 다른 것끼리 분열과 융합을 일으키는 용광로 같은 공간”이라 느낀다. 김지운 감독은 모든 것이 금세 역동적으로 변하는 서울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친숙하지만 어느새 사라진 것들에 관한 아쉬움을 담아 전시를 준비했다. 김지운 감독이 물리적 실체를 넘어 그것이 품은 정서까지 복각해내고 싶었던 공간은 ‘평상’이다. 김지운 감독이 생각하기에 평상은 “동네의 경조사와 대소사를 알 수 있는 소통의 장이자 공동체 형성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평상은 “고도화된 도시가 모든 것을 효율 위주로 재편”하며 사라져갔고, “고립과 무관심의 세상이 도래해 안타까웠”던 김지운 감독은 “우리가 잃은 것 중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을 이야기해보”자는 취지로 평상을 설치했다. 이 전시엔 김지운 감독이 전봉석, 윤나경 배우를 데리고 직접 연출한 단편영화도 함께 상영됐다. <한 잔의 추억> <나는 너를>과 같은 70년대 노래가 흐르던 전시장에선 누구나 평상 위에 앉아 오래전 서울처럼 황주전자에 담긴 막걸리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전시장 왼쪽에 따로 마련된 공간엔 김지운 감독이 생각한 미래형 평상인 디지털 평상 또한 구현돼 있었다. 돗자리 대신 요가 매트가, 죽부인 대신 폼 롤러가 놓인 평상 한쪽에선 김지운 감독의 초기작 <반칙왕>이 거듭 재생되었다.

지옥

연상호 감독에게 이번 전시는 오래 접어둔 꿈을 실현하는 기회였다. 연상호 감독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정작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작업과는 기회가 닿지 않아 그리움을 느끼던 중” 프라다로부터 제안이 와 신작 촬영으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전시에 참여했다. 연상호 감독의 설치 미술품 <지옥>은 자신이 만든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다. <지옥>은 원작의 설정 그대로 “일상적인 공간이 완전히 비일상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작품 속 고시원을 바탕”으로 한다. 고시원의 가장 안쪽에 “끝을 알 수 없는 하얀 공간”을 만든 후 까맣게 소진한 작품 속 정진수의 형상을 놓았다. 실제 고시원처럼 좁은 복도를 중심에 두고 만들어진 전시장은 10인 이하의 출입만 가능했다. 한참 줄을 서며 기대감에 젖어 있던 관람객은 열리지 않는 고시원의 닫힌 문을 열어보려 애를 쓰기도, 전시장 끝의 열린 문 앞에 붙은 사전 경고문을 보고 걱정에 떨기도 했다.

종이, 빛, 유령

정다희 감독은 “애니메이션은 주로 홀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전시에선 각기 다른 분야의 종사자들과 협업할 수 있어 재미있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정다희 감독이 구상하고 만든 <종이, 빛, 유령>은 전시 공간 코트에 실제 마련된 도서관을 움직이는 이미지와 빛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을 공간으로 구현했을 때 관객이 어떤 경험을 할까” 하는 호기심을 가졌던 정다희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주요 재료라 할 수 있는 빛과 종이로 만들어진 공간을 지나면, 그 두 재료가 합쳐진 영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장 끝엔 직접 입체 오브제로 만든 전시품까지 만날 수 있다”며 작품의 관람 순서와 제작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었다. 실제 <종이, 빛, 유령>의 공간에선 감독의 전작 <빈 방><의자 위의 남자>의 원화와 애니메이션이 크고 작은 스크린에 영사되며 인상적으로 얽혀 있었다. 정다희 감독의 연출 특징인 ‘스케일의 전환’도 이번 전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실제 부피를 역전해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묘사하는 감독의 영화처럼, <의자 위의 남자>의 주인공인 의자 위의 남자가 거대한 크기와 자그마한 크기로 전시장 끝에서 각각 관람객을 맞이했다. 해당 공간은 이번 행사의 가장 인기 있는 포토 스폿이었다.

연상호 감독이 선정한 <초록물고기>

세 감독은 자신의 설치 작품과 어울리는 영화도 각각 프로그래밍했다. 김지운 감독은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을 선정했다.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나의 행보와 가장 유사한 흐름을 보인 선배 감독이 멜로, 스릴러, 서부극을 오간 이만희 감독이었다”고 선정의 변을 밝힌 김지운 감독은 “우리나라에도 60, 70년대에 훌륭한 고급 스릴러가 있었단 걸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 후 “곧 공개할 <거미집>도 1970년대 영화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며 신작 홍보도 잊지 않았다. 연상호 감독은 선배 감독의 수많은 영화들 중 “영화에 관한 꿈을 꾸게 한 시작점”이었던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를 선정했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연출을 처음 만난 작품이라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때의 강렬함을 관람객과 공유하고 싶다”는 감상도 함께 전했다. 20세기의 영화를 선정한 두 감독과 달리 정다희 감독은 올해 초 개봉한 <다음 소희>(2022)를 선정했다. “나와 같은 세대의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고르고 싶었”던 정다희 감독은 “2부로 구성된 <다음 소희>의 형식이 애니메이션의 내러티브 구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현실을 바꾸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는 평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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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