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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2차 송환’, 틈입된 목소리가 말하는 것

156분에 달하는 길이로 공개된 김동원 감독의 <2차 송환>에서 공은주 감독이 연출자로 참여해 촬영한 시기의 영상기록은 대략 1시간50분을 차지한다. 영화 안팎의 설명을 빌리면 <2차 송환>은 공은주의 연출작으로 제작되었지만, 2006년에 연출자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고 김동원 감독이 계획하던 북한 촬영이 무산되면서 다큐멘터리의 완성은 기약 없이 지연되었다. 시간이 흘러 <2차 송환>의 작업을 재개하고 마침내 완성해낸 김동원은 작품의 균형 감각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30여분을 제외한 모든 분량을 자신이 현장에 존재하지 않은, 그래서 연출자로서의 관점이 투과되지 않은 촬영분으로 채우고 있다. 여전히 2차 송환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영화를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김동원은 과거의 기록이 담긴 화면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임하지 않거나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즉각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그 의미와 진폭을 성찰하는 면모는 김동원의 다큐멘터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연출자의 조건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상계동 올림픽>을 예외적인 사례로 둔다면 김동원의 다큐멘터리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 그 순간이 남긴 의미와 부채감을 되짚어가거나(<명성, 그 6일의 기록>) 피사체로 삼은 인물이 사망한 이후에 사후적으로 시작되곤 한다(<한사람> <내 친구 정일우>). 김동원은 시대착오를 통해 지나간 시대와 맺는 관계를 주시하는 다큐멘터리스트다. 하지만 이런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2차 송환>이 선택한 구조는 적잖이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김동원은 영화의 주된 인물인 김영식 선생과도, 그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공은주 감독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영상에 연루되진 않는다. 김동원 감독에게 주어진 그 스크린으로부터 먼 자리가 <2차 송환>의 뒤늦은 시작점이다.

과거는 낯선 시간이다

이런 미묘한 관련자의 상태가 이 영화의 화면과 목소리 사이에 감돈다. 여기서 김동원 감독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기록을 지켜보면서 반응하는 위치에 있다. <2차 송환>에서 구현되는 김동원의 ‘연출’은 관찰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장면 위로 서술자로서의 목소리를 틈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에서 인칭의 경계에 대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빌린다면 <2차 송환>에서 김동원은 “‘나’라고 말하지만 언제나 나는 아닌 서술자”에 근접한다. 물론 이 명제에는 명확하게 일반화되지 않는 애매함이 있다. 기록된 장면과 덧붙여진 목소리 사이에 남겨진 그 애매한 거리감을 이 다큐멘터리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2차 송환>의 엄밀하고 뒤틀린 형식이 촉발된다.

김동원 감독 스스로도 이런 복잡한 조건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2차 송환> 화면에 ‘연출자’로 개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한다(공은주에게 작품의 공동 연출을 제안했다고도 밝히지만, 사정상 그것조차 무산되었다고 한다. 제안의 무산은 이 영화의 안팎을 둘러싸는 기묘한 운명처럼 작동한다). 공은주 감독이 촬영했던 분량이 너무 많은 데다 그 물리적 기록들에는 “내가 안 묻어 있기 때문에” 재구성하는 데 곤란함을 겪는다. 김동원에게는 <2차 송환>에 새겨진 기록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 의미를 역사적이고 성찰적인 시간 속에 정박하는 구체적 기억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러하다. ‘나’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친밀한 기록에 나는 어떻게 연출자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결핍으로부터 한 가지 이상한 틈입이 발생한다. <2차 송환>의 초반부에는 지하철 안에서 홀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김영식 선생의 모습을 보여준 뒤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김동원 감독의 내레이션을 삽입해 그와 아버지의 일화로 넘어가는 대목이 나온다. 김영식 선생을 따라가던 시간이 순간적으로 중단되고 영화의 화면과 내레이션은 김동원 감독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침투하기 위해 조직된 ‘켈로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틈입된 장면

이 장면은 약간 당황스럽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첫 장면의 자막이 시사하듯 끝나지 않은 지난 세기의 거대한 접점을 통해 김영식 선생과 김동원 감독의 사적 역사를 겹쳐두는 순간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연결이 지나치게 빠르고 갑작스럽다는 인상을 남긴다. 1987년 상계동 철거 현장에서의 투쟁의 기록을 집요하게 따라간 뒤, 더는 정일우 신부에 대해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상계동 주민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상계동의 기억을 현시점의 용산 참사와 세월호 선박의 이미지에 접속하던 <내 친구 정일우>의 과감한 몽타주와 비교해보더라도 <2차 송환>에서 시간과 장소를 넘어 결합하는 두 지점의 연결은 얼마간 급작스럽고 평이하게 다가온다. 이는 과거의 화면과 접속할 지점을 찾지 못한 연출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낼 방법으로 선택한 인위적인 개입의 결과인 걸까.

김동원 감독과 아버지의 일화는 삽입구처럼 짤막하게 주어지고 지나간다. 이 짧은 일화는 연대기로 구성된 김영식 선생과 주변 비전향 장기수들의 시간을 가로막고 나타나 삶의 파편성을 메우려는 봉합적 구성을 저지한다. 대신 드러나는 것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조명하는 연출자의 선택이다. 이 장면 뒤로 김동원 감독 개인과 가족이 관련된 이야기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나온다. 느닷없이 던져지고 진전되지 않는 일화의 존재감으로 인해 영화의 시간에는 부득이한 단절감이 발생한다. 연대기적으로 조직된 기록에 어쩔 수 없는 결함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앞질러 말하자면, 언뜻 연대기 구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결함은 결코 <2차 송환>이라는 영화의 결함이 아니다.

앞선 장면과 모호한 연결점을 맺고 출현하는 사적 담화는 영화에 드러난 것 외의 다른 논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다시 말해, 김영식 선생의 이야기에 김동원 감독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는 근거를 찾게 만든다. <2차 송환>의 장면들은 김영식 선생의 기록을 비추면서, 그 기록에 반응하는 김동원 감독의 리액션을 끌어들인다. 슬로모션으로 걸어가는 김영식 선생의 장면을 자르고 들어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는 감독의 목소리는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김영식 선생의 기록에 접근하려는 다급한 반응을 증언한다. 이 순간에 김동원의 내레이션은 이미지를 붙잡아두려는 충돌적인 목소리로 영화에 개입한다. 이런 장면을 빌려, <2차 송환>이 김영식 선생의 연대기적 시간과 김동원 감독의 사후적 시간을 관통하는 균열적 구조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통과한 또 다른 시간도 있다. 김동원 감독의 말에 따르면 <2차 송환>은 “2006년에 영화가 한번 엎어지고 2013년 외국 프로덕션과의 합작 계획도 무산됐다. 그러다 2019년 남북미 정상회담으로 송환이 추진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부랴부랴 촬영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금세 열기가 식어버리고 작업이 세 번째로 중단되었을 때 김동원은 작품을 끝맺지 못한 채로 김영식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두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영화를 마무리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뒤집어 말하면, 이 작품에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편의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 역사적 차원의 요구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완성하지 못한 영화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긴급한 부담이 같이 새겨져 있다. 희망적인 결말을 찾지 못하면 영화를 끝낼 수 없지만, 영화를 끝내지 않으면 희망을 발견할 수도 없다. 김동원 감독은 이 어긋난 조건을 끌어들이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방식을 찾는다. ‘끝’에 도달하는 순간을 한없이 지연하고 끝내 임의의 칸으로 남겨두는 숏의 연쇄를 통해서 말이다.

영화를 끝낸다는 것

고다르는, 영화감독은 영화의 완성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를 끝내는 것은 개봉과 상영이라는 제도적 조건이 요구하는 바를 따르는 절차일 뿐이다.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소수의 작가들은 영화를 끝내지 않으려는 의지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 혹은 끝내지 않을 권리가 있다.

<2차 송환>의 첫 장면은 김영식 선생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의 표면적인 목적은 아들과 딸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제작해 북한에 방문할 예정이었던 다큐멘터리 제작자 올슨이 전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북한 촬영이 흐지부지되면서 장면의 실질적인 효용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김동원은 목적이 사라진 영상편지에 남아 있는 김영식 선생의 얼굴에서 표면적 의미로 흡수되지 않는 다른 것을 본다. <2차 송환>에서 김동원 감독의 역할은 유예된 사건의 기다림 속에서 의미를 잃고 모호함에 휩싸인 바로 이 얼굴을 관측하고 그 자리에 잔존하는 동력을 해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 방문이 좌절되면서 쓸모없어져버린 영상편지 속 김영식 선생의 얼굴이 그토록 강렬하게 김동원이라는 작가를, 혹은 <2차 송환>이라는 영화를 끌어당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송환 20주년 기념회 사업 행사가 초라하게 끝난 후 다큐멘터리는 영화에 모습을 드러낸 송환 신청자들의 얼굴을 차례로 비추고 검은 화면 위로 2차 송환 신청자 46명의 명단(이 가운데 9명이 생존해 있다)을 보여준다. 그 얼굴들 위로 “그 희망은 실현될 것이다. 아니, 실현될 수밖에 없다. 이들의 희망은 개인의 송환을 넘어 언젠가 오고야 말 통일이기 때문이다”라는 김동원 감독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김동원은 이 순간, 눈앞에 남은 한 사람의 얼굴(김영식 선생)을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린 다른 이들의 얼굴과 접속하는 장면의 이동으로부터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희망을 찾는다. 희망은 한 사람의 얼굴에 귀속된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이동하는 얼굴(들)의 형상에서 희망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만약 이것이 <2차 송환>의 결말이었다면 영화는 그런 한계적 조건에서 잠시나마 발현하는 희망을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2차 송환>의 마지막이 아니다. 암전된 화면이 밝아지면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방송을 보는 김영식 선생과 주변 사람들이 나온다. 김영식 선생의 기대와 달리 도널드 트럼프는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다. 날이 밝으면 1인 시위를 위해 만남의 집을 나서는 김영식 선생의 뒷모습이 보인다. 김동원 감독의 목소리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작품을 희망적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2차 송환도, 북한 촬영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김영식 선생은 오늘도 집을 나선다.” 김동원은 두 장면의 틈에서 상반된 목소리의 깊은 격차를 드러낸다. 그것은 희망인가, 혹은 그 모든 희망에도 불구하고 끝내 희망으로 끝맺지 못한 기록인가.

목소리의 몽타주가 말하는 것

수많은 장기수의 얼굴이 교차하는 데서 희망을 발견하는 몽타주는 작품을 희망적으로 끝내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내레이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두 장면 뒤로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숏이 기다리고 있다. <2차 송환>의 마지막 장면에선 청와대 앞에서 문자가 적힌 플래카드와 띠를 두르고 1인 시위를 하는 김영식 선생을 지켜본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문자가 적힌 띠를 두르고 시위하는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를 한 차례 지켜본 바 있다. 지하철 내부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던 그 모습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김동원 감독은 인위적인 배치를 무릅쓰고 그 이미지의 다음 칸에 자신과 아버지의 일화를 틈입해 <2차 송환>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김영식 선생의 기록과 연출자의 목소리가 교환되는 구조를 구축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카메라는 송환을 호소하는 김영식 선생의 1인 시위 이미지 앞에 선다. 2차 송환을 촉구하는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 앞에서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멈출 순 없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희망을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는 김동원 감독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2차 송환>이라는 영화를 지탱하던 두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가 몽타주를 이룬다. 그들의 몽타주는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한 가지 복화술을 선보인다. 송환에 이르지 못한 비전향 장기수의 얼굴과 영화를 원하는 대로 완성하지 못한 연출자의 목소리가 한 장면에 결합하면서 희망에 대한 미완의 노래가 형상화된다. 이렇게 목소리는 비로소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에로 도착한다.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이는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 위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되돌아와 그것과 같은 형식으로 이번에는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 <2차 송환>의 마지막이 되는 김영식 선생의 숏은 그 미래가 도래할 장소로 남아 있을 것이다.

<2차 송환>은 끝을 마련하지 않은 다큐멘터리이다. 기나긴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끝날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의 세 번째 촬영이 재개되어 편집을 진행하고 목소리를 녹음하는 과정에선 다큐멘터리가 목표로 하던 송환이 무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동원 감독은 김영식 선생의 이미지에 목소리를 덧대어 결말을 보류한다. <2차 송환>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다큐멘터리다. 그 자리에는, ‘끝’이 다가오는 순간을 밝히지 않는 현재를 웅변하는 자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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