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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5호 [기획]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 “시선의 권능과 인식의 전환”
김성찬 2022-10-10

부산국제영화제 특별기획 프로그램: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

영화를 인식하는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는 것과 맞물려 새롭게 구축되려는 인식 틀의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 거창하다면, 적어도 변화의 조짐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대체로 인정하는 시기일 것이다. 이 점은 다큐멘터리 영역도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그동안 변화가 감지됐던 작품들 사이의 의미관계를 조망하거나 정리하려는 시도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특별기획 프로그램 중 하나인 ‘21세기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시선’은 새 세기에 등장해 인상적인 자취를 남겼거나 남기고 있음에도 충분히 그 의의를 숙고하지 못했던 작품들을 선보여, 다큐멘터리라는 영토에 어떤 유의미한 지형이 그려지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되어 준다.

카메라 시선의 권능

이번 기획은 ‘카메라 시선의 권능’과 ‘다큐멘터리 장르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탐험하기를 권한다. 우선 카메라 시선의 권능은 기술 발달에 따른 촬영 장비의 고도화라는 특성에 기댄다. 소형화하고 경량화한 카메라는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자리에까지 위치해 전에는 볼 수 없던,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의 시선에서나 비칠 만한 정경을 포착한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모든 시기와 장소에서 유래할 만한 광경을 포획하는 시선은 상상과 추정으로나마 극영화이든 다큐멘터리이든 상관없이 구현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지털을 포함한 진보한 기술을 이용해 창조된 가상의 이미지와 다르게, 이전에는 불가능했더라도 지금은 물리적 실체의 기계가 최대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닿아 기어코 무언가를 잡아 내놓은 이미지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여기에는 권능감을 둘러싼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논의의 대표적 작품은 <리바이어던>이다. 초소형 경량 카메라 고프로를 활용해 어선의 일상을 기록한 이 영화에서 때때로 카메라가 스스로 움직여 나아가 무작위로 찍은 듯이 보이는 장면들은 편재하는 시선에서 파생한 권능감을 주기도 하지만, 시선의 주체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읽히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체해부도>도 같은 맥락에 있다. 초소형 카메라로 수술실 속 환자의 몸속을 파고드는 작품은 권능에 도취된 카메라의 폭주를 보는 것 같고 관객이 체험하는 감정은 불쾌에 가깝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는 숭고함마저 느낀다.

카메라 시선의 권능은 이 시선이 누구에게 복무하느냐에 따라 재앙이나 구원이 될 것이다. 상상과 어림짐작으로 구현한 것이 아닌, 실제로 다가가 포착한 이미지들은 민중이 구사하는 저항과 인내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시리아 내전의 무참한 광경을 담은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은 1001개의 영상들로 구성됐는데, 이는 애초 기획 의도에 따라 촬영된 장면들이 아니다. 권력자에게 으레 삭제와 은폐의 대상이 되었을 이 이미지들은 카메라 시선의 권능에 힘입어 살아남아 고발의 수단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도모한다는 미디어의 역할을 전복해 혁명의 기운을 키우고, 개인의 차원에서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결은 다소 다르지만 도시 로마를 감싸는 외곽순환도로 주변의 일상을 축적한 <성스러운 도로>와 중국 고산지대의 가난한 가정에 머무는 세 자매를 기록한 왕빙의 <세 자매>도 일반 민중에 다가선 카메라 시선의 권능을 보여준다. 만약 이 작품들이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면 상상이 아닌 실재를 증명하는 장면에서 비롯한 연민과 위로가 그 근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기술 발달에 따라 접근이 용이해지고 쉬이 활용할 수 있게 된 기계-카메라의 특성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식의 전환

한편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란 이 장르를 덮어온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관계한다. 다큐멘터리를 지배해 온 용어는 객관성, 인터뷰, 무서사나 비서사 등일 것이다. 특히 극영화의 대척점으로서 다큐멘터리 특징의 대명사는 절제된 표현이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언설은 진즉에 폐기됐다. 지금은 누구도 이 같은 요소들을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만든 의도와 목적이 그나마 남은 최소한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아직 유효한 기준으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의 의도와 목적은 정치, 교육, 계몽 등의 의지로 형성된다 할 만하다. 물론 이건 여느 극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면모다. 하지만 부수적인 결과일 뿐 극영화 제작을 추동하는 건 스토리텔링의 욕구와 미적 충동이 먼저라고 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또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다큐멘터리의 경우에는 그 순서가 반대라고 여겨진다. 이번 기획을 이루는 작품들의 상당수가 가난과 전쟁과 같은 사회역학의 비극적 현상을 배경으로 하거나 사회와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성을 담고 있는 사실도 이 점을 증거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다큐만의 의도와 목적으로 탄생한 이번 기획의 다수 작품이 주로 극영화가 동원하던 서사와 표현주의적인 양식을 내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일견 뉴스로 대표되는 경성적인 표현기법이 환기나 고발에 따른 정치, 교육, 계몽의 의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낼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니, 기획의 몇몇 작품들은 어쩌면 그러한 양식과 형식이 실패했기에 따른 고육지책의 결과일지 모른다. 따라서 어떨 때는 과잉으로 보이는 서사의 개입과 표현의 기교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적확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리티 판의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가 지닌 메시지란 케케묵은 것이다. 인간은 과오를 반복하면서 독재나 전쟁과 같이 인류 스스로에 고통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반복된 관념은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영상 클립들과 동물 형상을 활용한 인형극으로 그려지며 새삼스러운 인상을 준다. 또 이 작품과 유사한 함의를 품은 <파괴의 자연사>는 푸티지 이미지를 진취적으로 활용해 관객의 재인식을 유도한 사례다. 정치적 목적보다 개인적 경험과 인상을 다룬 것에 가까워 보이는 <나의 위니펙>, <실비아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들>과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품으로 장착된 서사들, 창명한 장면 구성, 전위에까지 다다른 듯 보이는 형용도 유사한 전략으로서 고착된 관객의 자리를 흔들려 애쓴다. 요컨대 오늘날 다큐멘터리는 적어도 표현 양식과 형식의 면에서는 탈경계로 수렴한다고 할 법하다.

이번 기획 프로그램의 구성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 보긴 했으나 사실 모든 작품에서 이 범주는 겹친다. 다만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크냐에 따라 거기에 좀 더 가중치를 둬 바라봤을 뿐이다. 가령 <인체해부도>의 경우 카메라 시선의 권능이라는 논지에서 살폈지만, 이 작품의 말미가 보여주는 장면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이면서 앞서 내비친 폭주하는 이미지의 권능을 누그러뜨리며 작품 전체를 중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 <카메라퍼슨>과 <은빛 수면, 시리아의 자화상>은 카메라 시선의 권능 없이는 탄생하기 어려웠겠지만 생경한 구조와 특별한 스타일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범작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획의 작품들은 새로운 곳에 자리 잡은 동류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점점 막강해져만 가는 카메라 시선의 권능을 보고 있자면 이러한 힘 따위 너끈히 파악하고 관리하는 게 가능하다고 여겼던 과거의 태도가 우스워진다. 반면 카메라 시선의 권능도 어차피 스크린이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경계를 개의치 않는 용기와 결기도 발견된다. 최근의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시선을 두고 불안과 염려만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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