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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평론가의 ‘제로스 앤 원스’

이미지 테러리즘

에이블 페라라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신작 <제로스 앤 원스>는 한국에서 개봉하지 못했다. VOD 서비스로 직행한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주된 무관심과 소수의 지독한 악평으로 채워져 있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편인지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지만 IMDb에 등재된 평점은 페라라 영화 가운데 가장 낮은 3.3에 불과하며 적잖은 평들이 이 영화의 터무니없는 단점들을 지적한다. 이변이 없다면 <제로스 앤 원스>는 대중은 물론 시네필에게조차 환대받지 못하고 있는 페라라의 최근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특별히 거센 불평과 비난에 시달리는 실패작으로 취급될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제이제이(에단 호크)가 플랫폼의 노동자들을 지나쳐 로마의 텅 빈 밤거리를 걷는 도입부의 몇 장면만으로 나는 이 영화에 사로잡혔지만, 영화에 쏟아진 악평에 맞서 적극적인 반론을 펼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장인들의 장르영화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엉성하고 조악하기 때문이다. 소재와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폭파하려는 국제적 테러를 막으려는 정치 스릴러물로 소개되고 있지만,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줄거리가 짜놓은 기대를 엇나간다. 사건의 단서는 무신경하게 처리되고 복잡하게 얽힌 인물과 조직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데다 일관성 없이 제시되고 사라진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흔히 관객을 유혹하는 긴박한 리듬과 과감한 액션은 아예 실종되어 있다. 기술적인 불안정성도 덧붙여진다. 현저히 낮은 화질로 포착된 로마의 밤 장면은 과도하게 어둡고 위태롭게 흔들리며 때로는 상황을 비약적으로 이어 붙인 듯한 연결로 혼란을 가중한다.

제이제이는 테러를 막는 임무와 이탈리아 정보국에 억류된 무정부주의자 쌍둥이 동생 저스틴(에단 호크가 1인2역을 맡아 연기한다)을 찾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로마에 도착하는데,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하는 일이라곤 차례대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다.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이르면 폭발 테러로 성당은 폭파되고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은 뒤늦게 전해진다. 에이블 페라라는 테러의 위협과 그것을 막으려는 자의 임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정작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기울이지 않는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교회에서 마주친 노파는 제이제이에게 “모두가 너를 배신할 것이다. 네가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대사의 맥락과 상관없이 페라라가 영화에 드리우는 기묘한 주문처럼 들린다. 노파의 말처럼 이 영화는 국제 조직간에 벌어지는 테러 위협을 다루면서 엉뚱하게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결과물로 거듭난다.

너무 많이 본 남자

이 불투명한 영화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활동이 있다면 그건 영상을 촬영하고 상영하는 기록들이다. 이 영화에서 제이제이는 총 대신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눈앞의 풍경을 강박적으로 담아낸다(테러가 일어난 뒤에 나타난 정체 모를 인물이 제이제이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말하자 그는 카메라를 손에서 놓는다. 여기서 카메라는 총과 등치된 사물이다). 보이지 않는 테러 위협에 대응하는 제이제이의 여정은 영화를 제작하는 절차에 근접한다. 그는 테러를 막는 것도, 동생을 구출하는 데도 실패하지만 영화의 막바지에 성 프란치스코의 유언을 인용하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완수했다”라고 말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색적인 말을 주고받을 뿐인 이 사내가 로마에서 ‘완수’한 일은 끊임없이 카메라를 들어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유일하다. 그는 살해된 마약중독자 여성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도, 그를 납치한 조직의 한 여자와 섹스할 때도 어김없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기록한다. 말하자면, 제이제이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영화 내부에 또 다른 이미지와 사운드를 도입하는 자다. 이는 관음증적 시선이 아니다. 카메라는 더이상 숨겨져 있지 않다. 섹스, 테러, 고문의 이미지들은 그의 시선을 경유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매개되며 변형에 이른다. 그러므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전모와 소행이 밝혀지지 않는 테러는 가시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비가시적으로 영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무엇보다 제이제이라는 카메라 장치를 영화에 침투시키는 사건이다.

그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면서 이미지를 목격하는 자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촬영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희미해진 인간의 흔적은 각종 모니터와 디스플레이 장치에 전시된 이미지로 대체되어 있다. 제이제이는 숙소에 켜진 컴퓨터를 통해 옛 동료와 대화를 나누고, 군인들과 마약상이 건네는 스마트폰에 담긴 영상을 보며 단서를 찾는다. 매체에 기록된 이미지는 어디에서든 나타나고, 또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것이 나타나고 재생될 때마다 현실에 놓인 제이제이의 여정에 수정이 가해진다. <제로스 앤 원스>의 무대는 ‘내가 보는 현실’과 ‘내가 보는 이미지’ 사이에서 복수의 스크린이 현실의 질감과 경합하고 전투를 벌이는 장소다.

제이제이의 시선이 닿는 곳에 보이는 풍경이 그가 든 카메라에 채집되고, 또한 그의 주변에 편재하는 디스플레이 위에 전시된 이미지들이 있다. 그 모호하고 희박한 이미지들이 <제로스 앤 원스>의 영화적 신체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는 맨눈을 통해 드러나는 대신 여러 프레임과 모니터 장치에 결부되어 있다. 그렇게 매개된 이미지는 흔들리는 카메라, 깜빡이고 흐릿한 화면, 정상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난 구도 속에서 안정된 형상으로 정박하지 못하고 추상화된다.

에이블 페라라는 그 이미지들을 통해 카메라에 비친 세계를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조형하는 데 몰두한다. 이는 페라라에게 있어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특정한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도시의 밤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위협과 종교적 여정, 에로틱한 몸짓과 죽음에의 충동에 몰두하는 것은 뉴욕을 무대로 한 페라라의 ‘실감나는’ 거리영화를 특징 짓는 요인들이었다. <제로스 앤 원스>에서 페라라는 지극히 페라라적이라 거론할 만한 감각적 요소를 공유하면서, 그것들을 이야기와 장르의 틀로부터 철저히 떨어뜨려놓는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것을 가리킨다. 이 영화에는 물론 섹스와 폭력이 나오지만, 페라라가 구사하던 신체의 손상으로 연결되는 도착적인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페라라는 이미지 자체를 가해하고 파손한다.

폭발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예로 이 영화에서는 폭발하는 도심의 이미지가 세 차례 반복된다. 첫 번째 장면은 모니터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던 제이제이가 떠올리는 상상의 이미지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대성당에 가해지는 테러의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제이제이와 교류하던 노숙인이 군인들에게 위협을 받자 가슴팍에서 폭탄을 터트려 자폭하는 장르적 과잉의 순간이 묘사된다. 이상한 것은 실제로 행해진 두 번째와 세 번째 폭발에서도 전혀 물리적인 효과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면에는 폭발이 일어난 뒤에 부서진 건물 잔해도, 공중에 흩날리는 잿더미와 먼지도,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신체도 보이지 않는다. 이 폭발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상황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위생적이다. 앞뒤 상황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성당을 폭파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제이제이와 정보를 나누던 노숙인이 어떻게 대형 폭탄을 준비하고 터트렸는지도 알 수 없다. 즉, 이 영화의 폭발은 물리적인 인과율로 벌어진 결과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의 액션을 초과하는 비현실적이고 기계적인 층위의 이미지로, 차라리 견고해 보이는 이미지의 뒤편에 새겨진 취약한 물질성을 폭로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건축물과 인간의 몸은 단단하게 유지되기는커녕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취약한 표면의 이미지일 뿐이다. 페라라는 영화 이미지를 부서지기 쉬운 얇은 피부처럼 표피적인 대상으로 관측한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폭발 장면의 목적은 서사적인 문제에 있지 않다. 그것의 목적은 오직 스크린을 광적인 빛으로 뒤덮고, 보는 사람들의 시각적 체험을 중단시키는 데 있다. 이는 대성당 건물과 인간의 몸이 아니라 스크린과 관객의 눈에 손상을 가하는 이미지의 빛이다. 여기에는 프레임 바깥을 표적으로 삼는 영화의 자기 훼손적 몸짓이 전면에 밝혀지고 있다.

과잉된 폭발은 영화 속의 현실에서 일어난 상황이라기보다는 서사의 속박에서 벗어난 이미지의 물질성을 직접 대면케 하는 공백이다. <제로스 앤 원스>는 홈 무비(로마는 몇년 전부터 페라라와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도시이기도 하다)와 시네마베리테의 양식으로 실내 공간과 거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 후면에 비인격적인 부조리의 세계를 비추는 기이한 이중효과를 산출한다. 그곳은 제이제이를 포함한 인간들이 거하는 세계지만 동시에 인간적 흔적이 배제된 세계이다. 이를 단순히 팬데믹의 상황을 반영한 낯선 광경을 영화적 무대로 가져온 것이라 말하는 것은 부족한 해석이다. 반대로, 페라라는 인간과 비인간의 이미지가 나란히 경합하는 무대를 구축하기 위해 팬데믹 시기의 봉쇄된 로마를 급하게 선점한 것인지 모른다. 페라라의 전작인 <4:44 지구 최후의 날>이 종말영화가 전제하는 종말 직전의 한정적인 시간을 무대로 인간과 인간이 배제된 이미지의 대립적 배치를 구성했던 것처럼, <제로스 앤 원스>는 팬데믹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무대로 인간과 비인간의 이미지가 대면하는 광경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영화의 경로는 미국에서 로마로 찾아오는 한 남자의 지리적인 여정에서 디지털 스크린에 의해 추상화되는 이미지의 질감과 현실의 공간이 교란을 겪는 감각적 탐사로 전환된다. 페라라는 주인공의 손에 카메라를 건넴으로써 지층을 탐사하고 진단한다. 제이제이는 수많은 이미지의 표면을 거치며 세계를 진단하고 그것의 지층을 짚어내고 있다.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이 연결된 디지털 시대의 폭력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가속화한 대규모 봉쇄를 겪은 이후에도 우리의 삶의 형식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제로스 앤 원스>는 현대적 인간의 교란된 감각을 탐사하는 영화다.

이미지 테러리즘

<제로스 앤 원스>는 벌어지지 않은 상상된 악몽과 모니터로 대면하는 매개된 이미지가 인물이 지각하는 실제 체험과 구분되지 않는 감각으로 세계를 대면하고 있다. 이것이 페라라에게 특별한 문제라면, 그의 영화를 가동하는 동력이 이중적이고 모순된 세계의 구조를 하나의 단면에 혼합해서 보여주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킹 뉴욕>에서 지하의 범죄적 세계와 세속의 정치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악질 경찰>의 부패 경찰에게는 강간과 폭력의 행위와 죄의식과 종교적 신념의 이미지가 함께 깃든다. <어딕션>에서는 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과 어둠 속의 뱀파이어들이 있다. <퓨너럴>에선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거대한 범죄조직간의 대립과 허망한 진실이 나뉜다. 지하의 어둠과 세속적 밝음의 세계가 교차하고, 더러운 자는 은총을 얻은 자와 겹친다. 페라라가 구성해온 영화적 세계는 이미지를 이면화로 바라보는 규칙이 작동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조건, 특히 팬데믹 시기의 환경에서 세계는 모순과 이중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세계의 대다수는 동시에 봉쇄를 택했고, 인류는 똑같은 혼란과 불안과 분노를 경험했다. 복잡한 문화적 관계는 공통된 체험으로 연결되고 불순한 차이를 표백하고 만다. <제로스 앤 원스>가 끝없이 이어지는 밤의 시간을 비추는 데는 그런 이유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기나긴 밤은 쉽사리 낮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이런 부동의 세계에서 분할을 일으키는 것은, 달리 말해 이원화된 몽타주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영화의 제목처럼 0과 1(Zeros and Ones) 혹은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나뉘는 스크린 이미지, 또는 감염병을 둘러싼 음성과 양성,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상태의 대립이다. 페라라는 제이제이가 카메라를 들어 대상을 바라볼 때마다 현실의 이미지를 슬로모션과 네거티브 이미지로 변형한다. 현실과 이미지간의 경합을 알리는 광학적 비전을 통해 인간과 전염병 시대의 표상과 디지털 이미지는 공통의 무대에 속할 수 있다.

무한히 증식되고 폭발하기를 반복하는 이미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그들이 속한 밤을 종결 짓는 방법은 세계의 새벽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옥상에서 군인들과 대치한 제이제이와 저스틴의 아내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끝으로 급작스럽게 아침을 맞는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으로 넘어간다. 출구가 보이지 않은 옥상에 다다라 사방으로 포위되었을 때, 영화는 비로소 밤의 시간에서 벗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풍경과 거대한 자연을 스크린에 가져온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그래서 영화 전체에 무관심한 지구의 뒤집힌 반대편을 보는 듯하다. 현실적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들을 결합하는 이 전환에는 시적 논리가 작동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삶에서 물리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영화는 ‘이미지로의 탈출’을 타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제이제이가 어떤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을 때, 영화는 밤의 봉쇄된 시간에서 이탈한다. 하지만 우리는 뒤늦게 자신의 운명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카메라를 바라보던 제이제이의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던져진 미세한 빛이다.

<제로스 앤 원스>는 이미지에 테러를 가해 스크린에 일어나는 과잉된 폭발을 주시하는 이 시대의 문제적 영화다. 페라라는 더이상 영화가 기능하지 않는 조건 안에서 영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의 집합을 응집시켜 한꺼번에 폭발시킨다. 이런 구조적 토대에서 번쩍이며 폭발하는 이미지는 하나의 윤리가 된다. 제이제이가 바라보는 영상에서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한 동생 저스틴은 외친다. “나라면 내 몸에 불을 붙이겠어. 왜 아무도 몸에 불을 붙이지 않는 거야?” 다시 말해, 영화가 우리에게 외친다. 왜 내 몸에 불을 붙이지 않는 거야? 화면을 불태우는 폭발의 순간이 없다면, 영화가 스스로 이미지에 테러를 감행하는 자기 파괴적 몸짓이 없다면, 영화는 봉쇄와 격리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비명 섞인 윤리가 이 영화에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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