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월드 스타라는 왕관을 쓰고 당신은 참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스타답게 잘 버티고 견뎠다.”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 1980년대부터 전세계에 아시아영화의 위상을 알린 입지전적 배우 강수연이 지난 5월7일 오후 뇌출혈로 인한 심정지로 병원에 이송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살. 평소 국화를 싫어했다고 알려진 고인을 기리며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는 장미와 수국, 호접란으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영정 제단을 마련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로 인연을 맺은 구본창 사진작가가 2004년 촬영한 화보 사진 속에서 고인은 끝까지 특유의 고아하고 당당한 자태로 영면을 알렸다. 그의 곁을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 영화인들이 내내 지켰다.
5월11일 오전 10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강수연 배우의 영결식이 열렸다. 고인은 지난 5월5일 오전부터 자택에서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다가 뇌출혈에 따른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위중한 상태로 인해 병원에서도 유족들에게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중환자실에 머무는 동안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배우 박중훈이 차례로 그의 곁을 지키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김동호 이사장은 매일 병원에 머물며 임종 순간에도 그의 손을 잡았다. 영결식 추도사에 앞장선 김 이사장은 “비록 인공호흡기를 썼지만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당신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라고 애통해했다. 고인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영화제가 <다이빙벨>(2014) 사태의 후폭풍을 회복하는 시기에 파란을 함께했다. 한국영화사에서 배우가 남긴 족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다. <씨받이>(1986),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달빛 길어올리기>(2010)를 만들며 작품 활동의 정점을 함께 조각했던 임권택 감독은 눈물과 함께 짧은 한마디만 어렵게 남기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수연아, 친구처럼 딸처럼 동생처럼 네가 곁에 있어서 늘 든든했는데 뭐가 그리 바빠서 서둘렀느냐, 편히 쉬거라.”
발인을 앞두고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는 유족과 영화인 동료들.
1998년 <송어>로 인연을 맺은 배우 설경구는 강수연을 “나의 누이, 나의 사부”라 칭했다. “너무 당당해서 너무 외로우셨던 선배. 아직 할 일이 너무 많고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선배가 가장 행복해했던 촬영장, 극장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해주십시오.” 배우 문소리는 고인이 한국영화에 보여준 헌신과 자부심을 기리며 애틋한 소망을 남겼다. “언니, 영화의 세계가 이 땅에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에 가면 고 이춘연 대표님, 고 이규형 감독님, 부산에서 함께한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님도 계실 텐데 그분들이랑 영화 한편 만드세요. 마음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 늘 그랬잖아요. 싸워가며 웃어가며. 그렇게 잘 해결될 거예요.”
강수연의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으로 배우 정윤희의 어린 시절을 연기했던 <핏줄>(1976)부터 평생의 필모그래피를 압축한 추모 영상이 유족과 조문객을 위로했다. 제니퍼 자오 대만영상위원회 부위원장, 배우 양구이메이 등과 함께 추모사 영상을 보내온 차이밍량 감독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2분간 화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슬픔을 전했다. 복귀작이자 유작인 연상호 감독의 SF영화 <정이> 촬영 현장에서의 모습도 일부 공개됐다. 쇼트커트에 밝은 얼굴로 스탭들과 소통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단상에 오른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당시 작품에 흥미를 보이는 칸 관계자 앞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강수연 위원장이 다가와 통역해준 일화를 소개했다.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가 이름도 없는 후배 독립영화 감독을 도와주는 그 상황이 제게는 의문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의문을 이렇게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강수연 선배가 그 자체로 한국영화였기 때문에, 자신이 한국영화인 것처럼 살았다고. 그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고."
고인이 아꼈던 후배, 배우 문소리가 추도사로 애통함을 전했다.
운명적 배우, 구력과 ‘가오’의 소유자
KBS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로 하이틴 스타(제2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신인연기상) 반열에 오른 강수연은 배창호 감독의 <고래 사냥2>(1985)를 거쳐 성인배우로 발돋움했다. 전성기는 갓 20살을 넘긴 무렵 이르게 찾아왔다. 1987년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같은 해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로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1989년에는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등을 차례로 휩쓸었다. 임권택 감독의 토속적 작품 세계 아래 가부장제 내 여성 수난사를 대변한 강수연은, 1990년대 들어 한국영화에 찾아온 리얼리즘 경향과 발맞추어 운명적 인간이 아닌 자유의 대변자로 변신했다.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안의 블루>(1992)에서 그가 연기한 도시 여성들은 당대의 강수연이 한국영화의 흐름과 얼마나 밀착한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선명한 지표다. 이 시기 강수연은 <그대안의 블루>로 개런티 2억원을 받으면서 한국영화사 최초로 배우의 억대 개런티 시대도 열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처음 방송가에 입문한 것이 그의 나이 4살 때. 이제는 용어의 실효성을 질문받고 있는 ‘여배우’라는 표현이 그에게는 중요한 관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독립심이 강했던 강수연이 남성 중심적인 영화판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식은 그가 생전 즐겨 썼던 말처럼 ‘가오’와 자긍심으로 표출됐다. 강수연은 신비주의 대신 솔직한 카리스마로, 수줍음 대신 긍지와 자기주장으로 스스로를 바로 세웠다. 위엄과 친절은 강수연의 자존심이자 명예이기도 했다. 영화 현장의 임금 체계가 열악하던 시절에 동료 영화인들의 밥값을 책임지던 그가 남긴 말,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에서 명대사로도 재현됐다. 또 그는 고 김지석 전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가 칸국제영화제 출장 중 급작스레 타계한 이후 몇달 지나지 않아 부모상을 치르면서, 아직 실의에 빠져 있을 동료들을 배려해 영화제에도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결식에서 김동호 이사장이 “당신은 억세고도 지혜롭고도 강한 가장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부모님과 큰오빠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왔고 동생을 잘 이끌어왔다”라고 추모한 이유다. 2000년에는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부단장을 맡아 한국영화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예술적 수명을 중시하는 배우들의 직업관 사이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과단성, 책무를 의식하는 태도, 영화계를 대하는 결의는 자기 삶을 지키려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배우 유지태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은 조문객들이 차례로 묵념하며 고인과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강수연을 해석할 더 많은 시간과 언어가 필요했기에
2000년대 들어 강수연이 남긴 작품은 단 7편. 영화 <써클>에서 검사, <한반도>에서 명성황후, <비무장지대로 튀어라>에서 조폭 두목을 연기했다. 전설적인 중년 여성배우에게서 강인하고 센 캐릭터성을 추출해낸 2000년대 초반의 작품들은 한국영화계의 안전한 상상력과 자기 커리어의 무게를 실감한 배우의 안목이 공교롭게 조우한 결과였다. 그 가운데 2011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는 베테랑 다큐멘터리스트를 연기한 강수연의 침착하고 편안한 맨얼굴, 일상적인 뉘앙스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남았다. <영화판>(2012)과 <주리>(2013)에서는 ‘강수연’으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상징성을 새로운 영감의 재료로 삼는 흥미로운 행보도 걸었다. 안타까움이 있다면 그의 독보적인 상징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제하는 아이디어가 그 이후 한국영화계에 오랫동안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배우 강수연에게 더 풍성하고 적확한 팔레트를 부여할 시간이, SF <정이> 이후 펼쳐질 강수연의 새로운 장에 덧붙일 더 많은 언어가 필요했다. 겁 없고 담대한 품을 지닌 채로 할머니가 된 그의 연기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던 관객과 동료가 이제 어떤 식으로든 그 몫을 나눠가질 것이다. 고인은 끝까지, 스타다운 자세로, 마지막 인사를 제의가 아닌 영화로 전할 예정이다. 연상호 감독은 “이 영결식이 끝나면 나는 영원한 작별을 하는 대신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우리가 함께 선보일 새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할 것”이라고 추모사를 마쳤다. “앞으로의 40년이 훨씬 더 힘들고 중요할 것 같아요”라고 담담하고도 분명한 미래를 그렸던 배우 강수연. 그 바람대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상영되기를, 그 영화들 속에서 부디 영생의 배우로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