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서 무엇인가 의미를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음악가들은 대개 10주년, 20주년, 30주년 등등을 기념하면서 음반을 발매하거나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내 경우는 밴드 데뷔 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할지 애매해서 딱히 크게 기념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음악가가 아닌 나에게 2022년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바로 지상파 라디오방송 출연자로 꾸준히 활동해온 지 10년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회성으로 초대석을 진행하는 경우 말고 특정 요일에 고정 출연해서 진행자와 대화를 나누고 이런저런 내용을 진행하는 출연자들을 ‘고정 게스트’라고 부르는데, 나는 2013년 봄에 SBS 라디오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코너의 제목은 ‘꽁꽁 브라더스의 상식이 너마저’였는데, 밴드 9와 숫자들의 송재경(9)과 함께 상식을 쉽게 배워보는 시간이었다. 당시 방송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 두 사람은 단어 암기법이나 어려운 내용을 외우는 비법을 공개하곤 했는데, 방송 실력은 어설펐지만 DJ였던 정선희 누나의 능수능란한 진행으로 그 시간을 잘 소화할 수 있었다. 그때 누나가 “나랑 같이 라디오했던 사람들은 다 나중에 DJ가 됐어”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중에 정말 DJ가 되고 지금껏 라디오를 하고 있을 거라곤 그때는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말을 잘한다는 면에서 나는 그렇게 능력치가 높은 편은 아니다. 원래 말이 많고 이야기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긴장을 많이 한다. 소위 말을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않는 편이라 계속 이야기가 끊어지면 안되는 라디오방송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일이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일할 수 있는 복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진행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말문을 틔울 수 있었고, EBS <詩 콘서트, 강성연입니다>에서 만난 강성연 누나는 나를 다음 진행자로 추천해줘 DJ로 데뷔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가 진행자로서 만났던 분들에게는 왠지 조금 죄송한 마음도 있다. 지금 다시 만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방송을 오래 하면서 보니 세상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 참 많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흥미롭고 솜씨 좋게 이야기하는 재치 있고 입담 좋은 사람들이다. 말 자체를 능수능란하게 하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도 많다. 특히 DJ로 진행했던 <詩 콘서트, 윤덕원입니다>에서 만났던 수많은 시인과 작가님들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냥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 자신이 더 풍성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그때 얻은 것들이 지금까지 내가 방송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 라디오를 시작할 때는 너무 어렵고 긴장되었다. 나중에 덜컥 DJ를 맡게 된 뒤에는 두려움 반, 잘하고 싶은 마음 반으로 발성 스피치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말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제 경력이 좀 돼 그런가? 라디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평소에 무엇인가에 쉽게 자신감을 갖는 편이 아닌데 이 정도면 꽤나 열심히 해온 것 같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라디오를 꾸준히 해온 게 지난 10년 동안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좋게 이야기하면 한자리에 진득하게 있는 편이고 반대로 말하면 큰 변화를 갖지 않는 편인데,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 잘 버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오랜 시간 라디오를 하면서 스스로의 장점을 깨달은 것도 있는데, 바로 마이크를 잘 사용한다는 거다. 레코딩하면서 마이크를 많이 다루고 녹음을 많이 해본 경험은 방송에서 목소리가 전달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가창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마이크의 작동방식이나 원리를 안다면 같은 환경에서도 더 좋은 소리를 입력할 수 있다. 녹음할 때 어떤 위치로 이동해야 목소리의 톤이 달라지는지 안다면 더 좋은 소리를 찾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내용에는 덜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방송되는 소리를 그 순간 객관적으로 들으면서 확인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소리를 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기침날 때 어떻게 대응해야 덜 새어들어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숨소리와 입소리가 버릇처럼 들어가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순간에도 마이크와 입의 거리와 방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좋은 소리가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너무 혼란스럽고 어려웠지만 이제는 말하는 내용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도 이런 요소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가 켜질 때 사람들은 보통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게 된다. 이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왠지 신경 쓰일 때도 있어서 나는 습관적으로 마이크가 올라가기 전에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호흡의 중립을 유지한 상태로 첫마디를 뱉는다. 이건 최근에서야 완벽하게 밴 습관이다.
늘 시간에 맞추어 현장에 도착하는 것도 라디오를 꾸준하게 하는 데 있어 겪어야 할 어려움이다. 한주에 4~5회 정도 아침에 생방송을 하던 <詩 콘서트, 윤덕원입니다> DJ 시절은 좋으면서도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들이었다. 새벽같이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방송을 하러 가던 그 시기를 잘 버텨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노래가 나가던 순간에 대본 옆에 적어두었던 메모들이 노래가 되어서 다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단호한 출근> _브로콜리너마저
도망치고 싶은 날은 매일매일인데
돌아갈 곳이 없는 나는
길 위에서야 달콤하게 꿈을 꾸네
단호하게 마음을 먹고 출발할 시간
아니 망설이지 않고 움직여야만
벗어날 수 있는 정체된 이 길